제34화
리허설까지 남은 날은 이틀, 연습은 계속 이어졌다.
“와… 여기까지만 하고 잠시 휴식할게요.”
주상현이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탁 풀었다.
그러자 털썩 원치도 않게 바닥에 주저앉는 꼴이 되었다.
멋있긴 멋있는데 격정적인 느낌을 내기 위해 지난 라운드 때보다 고난도 동작이 너무 많아졌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주상현이라고 해도 더는 움직이기 힘들 지경이었다.
게다가 고된 일정으로 회복할 체력이 남아나지 않는 것도 있었고.
기어서 거울에 기댄 주상현의 곁으로 서도화가 다가와 앉았다.
“자.”
주상현은 서도화가 건넨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곤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웬만하면 안 지치는 편이거든요.”
“그런 것 같더라.”
예전 가끔 보았던 경연 프로에서 땀 뻘뻘 흘리며 지쳐 기어 다니던 멤버들을 일으켜서 기어코 다시 연습시키던 이가 주상현이었다.
댄스 멤버답게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어떤 연습이든 끝까지 남아 연습하는 노력파 이미지로 꽤 많은 팬들을 모았었다.
주상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덴을 바라보았다.
아덴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연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저 형은 저보다 더해요. 어떻게 안 지치지?”
조금 씁쓸해 보이는 주상현의 말에 서도화가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더라. 서도화를 만나기 2년 전 죽어가는 드래곤의 마지막 숨결을 받았다고 하던가?
그 덕분에 웬만해선 지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아덴은 동료들과 같은 인간임에도 평범한 인간들의 고됨을 잘 모를 때가 많았다.
그런 지치지 않는 체력을 주상현처럼 단순한 노력의 결과라고 오해한 몇몇 동료들이 마음 깊이 그를 존경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서도화와 하이넬은 어이없는 시선을 교환하곤 했다.
아덴과 다른 근육질의 동료들이 쉬지 않고 경쟁하듯 훈련하는 모습을 모닥불에 땔감이나 넣으며 구경하는 게 평소의 일상이었다.
물론 지금 주상현의 눈빛은 존경보단 일종의 열등감에 가까운 눈빛이긴 하지만.
체력이 유독 좋다는 자신의 장점을 뺏겼다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노력이 그보다 부족하다 생각한 걸까?
주상현은 지치지 않는 아덴을 보며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룹을 이어가기에 그다지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주상현이 안타까웠다. 그는 스스로가 얼마나 뛰어난지, 그리고 그의 노력의 가치를 모르는 듯하다. 결정적으로, 저 용사 놈은 같은 인간과 비교하면 안 되는 것을….
“쟤는 파쿠르로 몸이 단련되어서 그래.”
서도화가 말했다.
“쉴 때는 쉬어줘야 해. 쉬는 시간에 쉰다고 네가 열심히 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주상현의 얼굴은 열기로 새빨개져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얼굴에서 땀이 계속 흘러 떨어졌다.
몇 번이나 수정된 안무를 멤버들에게 다시 가르치고 저 지경이 되도록 열심히 한 애가 노력파가 아니면 뭐야.
물론 그 마음은 잘 알겠지만.
서도화가 그리 말하자 주상현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형.”
“뭐가?”
“어, 케이 형 일어났다.”
주상현의 중얼거림에 서도화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그러곤 케이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 주상현만큼이나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놈이 있다.
“으윽….”
케이는 주상현보다 훨씬 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기어코 연습을 재개하겠다고 아덴의 옆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건 오기다. 주상현과 같은 순수한 열의와는 다른 용사를 뭐라도 이겨보겠다는 마왕의 집념과 열등감이다.
“아이고오.”
매가리도 없는 게 뭘 굳이 연습을 더 하겠다고…….
무슨 사우나 오래 참기 하는 것도 아니고.
서도화는 힘겹게 일어나 케이에게로 향했다. 그러곤 케이를 잡아 거울 쪽으로 이끌었다.
“너도 이제 얌전히 쉬어. 네가 예전 같은 줄 알아?”
그러자 주상현도 후다닥 케이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곤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형. 여기서 더 하다가는 진짜 쓰러져요.”
“이거허허흐…….”
“이거 봐. 혀도 풀렸네.”
케이는 자신을 잡아 끄는 손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았더라면 하찮은 손 치우라며 떨쳐냈을 터인데…….
아쉽게도 그에게는 그저 소리칠 힘조차 남지 않았다.
‘영웅은 아직도 멀쩡히 서 있거늘.’
자신은 인간들이 당기는 대로 끌려가는 게 고작이라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분함보다 더욱 그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이번 라운드 끝나면 케이는 형이랑 운동 다니자.”
멀찍이서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한야가 말했다.
음유시인과 주상현은 기어코 자신을 곁에 끌어앉혔다.
‘나를 걱정하는 건가.’
케이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비소했다.
설마 그럴 리가. 이 생각을 말했다간 음유시인이 특유의 냉랭한 눈을 하며 부정할 터.
이제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자신은 이들에게 짐짝이다. 저들이 아니라고 말해도 그건 그저 자신을 구슬리는 감언이설일 뿐이다.
아니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영웅과 음유시인에게 자신은 많은 것을 잃게 한 철천지원수.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내가 아프면 경연에 지장이 생길 테니까.’
걱정이 아닌 성가심.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다.’
정화계 치유사인 음유시인의 노래를 듣거나 그와 함께 있으면 사무치게 들게 되는 감정이 있다.
부모에 의해 칼리바니아 절벽 아래로 버려지며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인간성.
마왕은 자꾸만 인간과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이를테면 후회나 분노, 혹은 기쁨 말이다.
그가 배운 단어만으론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그들에게 느꼈다.
성가심을 포장한 배려일지라도 이건 느껴본 적 없었던 확실한 작은 온기였다.
이건 정화 때문인가 핵이 사라졌기 때문인가.
그러나 곧 케이의 감정은 사그라들었다.
이제 와선 후회해도 늦었다.
“무슨 생각 하냐? 왜 또 아덴을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어?”
서도화가 퉁명스레 물었다. 그냥 보고 있었던 건데 인상이 별로 안 좋았던 모양이다.
케이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제 할 말을 했다.
“나에게서 떨어져라.”
“웃기시네. 떨어질 거면 너나 떨어져.”
칼같이 서도화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같이 있으니 마치 동료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허.”
서도화는 말문이 막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피곤할 때 들으니까 오글거리는 것도 참기가 힘들다.
서도화는 서로 죽이고 싶어 안달이던 이들이 동료 비스무리한 게 되어버렸다는 게 문득 서글퍼져 케이와 살며시 거리를 벌렸다.
“동료는 무슨.”
“안다. 우린 동료 같은 게 아니다. 적이지.”
케이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들의 동료를 아주 많이 죽였다. 저들 또한 자신의 수하 수천 수백, 아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의 수를 소멸시켰다.
이들은 절대 자신의 동료가 될 수 없다.
그때 서도화가 말했다.
“어우 무슨 소리야. 이제 적은 아니지.”
“……뭐?”
서도화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적은 무슨 적? 이제 서도화는 그 화장실도 열악한 세계와는 상관없어진 몸. 더는 마왕과 적이 아니고 하기도 싫다.
서도화의 강한 부정을 본 케이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놀람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는 듯 서도화가 바로 말했다.
“그냥 뭐 척을 좀 진 관계지 그냥.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안 볼 사이.”
“무척 동감하는 바이다.”
“형들 또 싸워요?”
주상현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주상현의 말은 마치 친한 사이에 잦게 있는 다툼 정도라고 생각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두 사람이 몹시 떨떠름해 보이자 주상현은 불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 한야에게로 사라졌다.
두 사람, 아니 아덴까지 해서 친하면서도 친하지 않은 참 묘한 관계가 따로 없다.
적막한 침묵이 흐르는 거울 앞.
서도화가 말했다.
“피차 싫은 건 마찬가지라도 이 세계에 있는 동안 동료인 척이라도 해. 나도 그럴 테니까 협조해.”
“난 지금도 충분히 협조하고 있다만?”
“아 뭐 그래. 지금만큼만 해라.”
서도화는 고개를 내젓곤 일어났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연습을 시작할 셈이다.
“다들 대형 다시 맞춰보자. 케이 너도 이제 일어나고.”
서도화가 연습실 가운데로 이동하려던 차 뒤에서 케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대도 나에게 협조를 해라.”
서도화가 뒤돌아 케이를 바라보았다.
“뭔 협조?”
케이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더는 짐짝 취급받고 싶지 않군. 적어도 힘을 키워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지 용사 수준의 실력은 쌓을 수 있도록 나에게 협조해라.”
서도화는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거 설마.’
그러니까 혹시 마왕이 나한테 춤, 노래 잘 할 수 있도록 가르쳐달라 말한 건가?
그리고 지금 명령 같은 부탁 좀 했다고 저렇게 고개도 못 들고 있는 건가?
순간 서도화의 머릿속에 소싯적 대단했던 마왕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마왕은 지금처럼 병약 미소년 이미지도 아니었고 부끄러움도 부탁도, 아니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는 자가 아니었다.
서도화는 달라진 그의 태도에 순간 크게 소름이 돋아났지만 용케도 티 내진 않았다.
‘당분간은 잘 됐어.’
모두가 옳지 않다고 해도 내가 말하고 행동하면 그게 옳은 것이라던 똥고집, 유치한 자존심은 평생 안 고쳐질 줄 알았더니.
상황이 이러니 천하의 마왕이라도 별수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이지.”
서도화의 대답에 마왕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네가 여기 있는 동안은 어쩌겠어. 다른 인간들한테 피해 끼치지 않도록 할 테니까. 일단 일어나.”
서도화는 케이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지 않고 걸음을 계속했다.
이 세계에서 마왕은 타협할 필요조차 없는 별것 아닌 존재.
도움을 받고 싶으면 어련히 알아서 기어라도 오겠지.
‘이제 케이파이브는 그만 팔아도 되겠네.’
일이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