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C키워드 경연의 첫 시작을 무난하게 끝마친 30번 그룹.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 중앙무대에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56번 그룹.
지난 1라운드에서 자신들보다 순위는 낮았지만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그룹이었다.
‘우리 반응 괜찮았는데.’
준비한 무대도 자신 있었고 경연의 메인 점수인 마음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 멀리 자신들의 무대를 준비하는 56번 그룹에 대한 경계를 놓을 수가 없었다.
한 명 한 명 개성이 강하고 그들만의 강점이 있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라운드는 그것 외에도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들이 무척 많았다.
이를테면 범상치 않은 의상과 무대세트 같은 것들 말이다.
녹이 슨 것처럼 꾸며놓은 수많은 철봉, 철봉을 타고 올라간 식물들, 무너져 내린 건물과 도로처럼 쌓아 올린 세트장.
마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주제로 한 영화의 세트장을 떼다 놓은 느낌이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준비한 모든 것이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어쩔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 그럼에도 이번엔 또 얼마나 소름 돋는 무대를 보여줄까 하는 은근한 기대감.
짧은 시간에 이렇게 인상을 남기기도 쉽지 않을 것인데.
30번 그룹의 리더가 그들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대 위, 아래 연습생들의 시선을 듬뿍 받으며 56번 그룹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 * *
조명 없이 어두운 무대 위, 서도화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아직 경연 초반이라 그런가? 지친 기색 없이 눈빛들이 살아있다.
그들의 시선엔 흥미와 호기심, 그리고 불안과 경계가 가득했다.
바로 이전 그룹도 이러한 시선을 받고 있었을까? 단순히 무대를 관람하기 위해 온 관객들과는 다른, 꽤나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그러나 멤버들 중엔 신기하리만치 주눅 드는 이가 없었다.
다들 시선을 받는 것에 몹시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없었다.
못할 자신이.
‘잘 보라지.’
더는 실수할 구석도 부족한 곳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했으니까.
우웅-
곧 56번 그룹의 공연이 시작됨을 알리는 진동 소리와 같은 전자음이 들려왔다.
멤버들의 위로 어둑한 조명이 떨어지며 무대가 시작되었다.
무대 위엔 노란 조명 아래 다양한 크기의 철봉이 넝쿨에 휩싸인 채 가득 쌓여있다.
낡다 못해 타이어까지 빠진 폐차, 부서진 신호등에도 마찬가지로 식물들이 얽히고설켜 을씨년스러움이 느껴졌다.
멸망 후 정글이 되어버린 세계.
이게 56번이 준비한 정글이었다.
-…큰 거 온다…….
-분위기 오졌는데…
준비된 무대에 올라온 멤버들과 댄서들은 상당히 불량해 보이는 차림으로 철봉 위아래 불규칙적으로 자리 잡았다.
-ㅠㅠ벌써 눈물 날 것 같음
-무대퀄 뭐냐…왜 얘네만 음방임
-여러분!! 오른쪽 아래 ★★마음연타★★잊지 마세요!!!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나 이미 채팅창은 요동치고 있었다. 세트장만 봐도 벌써부터 56번이 무언가 대단한 걸 준비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사람들은 빠르게 마음점수를 누적시켜 갔다.
준비부터 범상치 않았다. 모두 숨죽이고 지켜보는 와중 경연이 시작되었다.
뿌우우- 현장을 울리는 뿔피리 소리, 곧 가벼운 전자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철봉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내려와 대형을 맞췄다.
댄서들과 함께 등장한 건 아덴과 서도화였다.
“오오!!!!”
멤버들의 등장과 동시에 하트 아이콘은 더욱 빠르게 연타되었다. 올라가는 마음 점수와 탄성을 내뱉으며 적절한 리액션을 해주는 관객석의 연습생들.
좋은 등장이었다.
그리고 어두운 조명과 거칠고 무거운 편곡, 등장한 멤버들의 표정은 야성적인 컨셉과 딱 맞게 위협적이었다.
이를 지켜보는 연습생들은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뭔가 달랐다.
원래부터 매서운 눈매. 무대 위에서 짓는 표정은 표현을 위한 연기임이 틀림없는데. 특히 가장 앞에 선 아덴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그들이 선 장소가 무대가 아닌 정말 전장인 것처럼, 보는 사람마저 문득 겁이 나 감탄 어린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위험해 보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 어디 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본 적 있는 거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조차 못 하고 있을 때 아덴의 뒤에서 안무를 맞추던 서도화가 앞으로 나서며 첫 파트를 노래했다.
다가오는 challenger
끝도 없이 도전해
또 겁을 먹고 도망치지
여전하게
다행히도 무서울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는 비교적 순한 인상의 서도화가 앞으로 나오며 조금은 옅어졌다. 그러나 서도화가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은 이번엔 다른 이유로 또 굳어버렸다.
[패시브 : 정화] 발동!
“……와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이제야 말문이 트인 연습생 중 누군가가 카메라가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말에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그는 탄식했다.
감성적이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툭 내뱉어진 노래. 아마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저음의 소리일 것이다. 그게 이 무대의 분위기와 퍽 잘 어울렸다.
또, 또 서도화의 보컬 때문이다. 몇 번을 들어도 아무리 적응하려고 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고, 변함없이 경이로운 저 목소리 때문에.
넋이 나간 듯 서도화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이내 감탄하기 시작했다.
서도화의 무기는 본디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또한 표현력이 상당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경험하면 저런 표정을 보일 수 있는 건지 웃음기 싹 뺀 무거운 표정, 곡을 안무로 표현하는 방식은 아덴보다도 훌륭했다.
그때 아덴이 다시 한번 앞으로 나서 자신의 파트를 불렀다.
hey 감정을 드러내지 마
함부로 고개를 들지 마
이곳은 우리의 영역
조금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또다시 얼어붙었다.
-이거 뭐냐…
-컨셉 좋다….
-ㅋㅋㅋ오늘도 채팅창 얼어붙은거봨ㅋㅋㅋㅋ
-아니 무슨 경연프로에서 영화를 찍고 있어ㅠㅠㅠ
-적시자~ 이게 연습생이냐? 이정도 표현력이면 타 아이돌이랑 비교해도 탑급 아님?
채팅창 또한 현장의 연습생들과 같은 반응으로 조심스레 적힌 칭찬만이 채팅창을 채워갈 뿐이었다.
서도화는 뒤로 물러서며 하트 아이콘을 힐끔거렸다.
‘그래도 이번엔 꽤…….’
채팅창이 얼어버렸길래 이번에도 1라운드 같은 상황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더니 다행히 마음 점수는 제대로, 아니 겁나게 빨리 올라가는 중이었다.
누군가 이를 악물고 버튼을 연타하는 게 아닌 이상 저렇게 빨리 올라가기도 힘들 터다.
두 사람이 노래를 끝내자 이번엔 반대편 방향의 철봉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댄서들과 함께 나온 사람은 한야, 주상현, 케이. 그들 팀의 첫 파트는 주상현이 맡았다.
넌 너답지 못한 모습으로
겁이 없는 척 한 발자국 내딛어
경험자답게 춤을 추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라이브, 주상현의 파트답게 안무 난이도가 급상승하며 곡에 박력이 더해졌다.
그들은 댄서들과 함께 거침없이 무대 중앙으로 향했고 그곳엔 미리 도착해 있던 도화와 아덴이 그들을 향해 몸을 튼 채 대기하고 있었다.
멤버 모두가 무대 중앙에 모이자 대형의 앞에 서 있던 주상현과 서도화가 확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를 아덴과 케이가 댄서들과 함께 차지하곤 그대로 댄스 브레이크가 시작되었다.
‘뭐지 진짜?’
그러자 관객석의 연습생들은 전에 없던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사실 아크로바틱을 제외하면 크게 눈에 띄는 댄스 실력을 가진 멤버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댄서들과 함께 서로를 공격하는 듯한 안무, 마치 이들이 진짜로 피 튀기게 싸우는 것처럼 치열하게 보였다.
분명 두 사람은 그냥 안무를 하고 있을 뿐인데 시청자들에겐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표현하지 못할 박력이 있었다.
그들은 이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위협감이 정말 서로를 싫어해서, 경험과 깊은 감정에서 우러나온 표정임을 몰랐다.
‘뭘 봐. 죽어 이 새끼야.’
‘하찮은 놈. 죽어라 용사.’
두 사람은 아까 전 무대 뒤에서 서도화가 시켰던 대로 눈빛으로 싸웠다. 이게 바로 진심 어린 표정이란 것이다.
댄스 브레이크인데도 댄스보단 서로를 향한 공격적인 분위기로 무대를 이끌어나가던 두 사람이 댄서들 사이로 들어가고 그 자리를 다시 주상현, 서도화, 한야가 채워 본격적인 댄스 브레이크를 시작했다.
이번 무대의 컨셉과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는 이미지로 그룹의 비주얼과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던 아덴과 케이, 프로페셔널한 실력을 보여주는 서도화와 주상현, 한야.
마지막으로 서도화의 보컬 실력, 컨셉을 잘 살린 전투적인 구성.
아직 경연을 치르지 않은 그룹이 이렇게나 많지만 미친 듯이 올라가는 하트 아이콘을 보며 현장의 사람들은 직감했다.
순위가 어떻게 되었든 이번 C 키워드 최대의 수혜자는 56번이리라.
* * *
준비한 공연을 끝마친 서도화는 인이어로 들리는 신호에 맞춰 바로 섰다.
“헉… 후우…….”
역대급으로 힘든 안무였지만 지난번 오프닝 곡을 연습하던 때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도화는 숨을 몰아쉬며 연습생들과 하트 아이콘을 힐끔거렸다.
채팅창이 반쯤 얼어붙은 건 이미 알고 있으니 괜히 마음 아프게 확인하지 말고 결과만 보자 결과만.
그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다 픽 웃었다. 도화뿐만 아니고 멤버들도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직도 경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혹은 풀죽은 얼굴들을 보니 원하던 대로 공연이 잘 치러진 듯하다.
특히 리허설부터 경연 직전에 이르기까지 사납게 생긴 아덴의 눈치를 살살 봐 가며 주상현과 서도화에 대해 구시렁거리던 연습생들의 얼굴이 참 재밌었다.
그들은 기도 죽고 화도 나는데 그럼에도 무대의 훌륭함을 부정할 수 없어 자신감은 떨어진 매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도화는 그들을 보며 더 순진한 척 웃었다. 저들은 정화되지 않고 그냥 저 열등감 그대로 탈락했으면 좋겠다고 몰래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멤버들은 인사하며 무대에서 내려오고 곧바로 다음 차례 그룹들의 경연이 이어졌다. 그동안 멤버들은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땀과 머리를 말리며 서둘러 다시 관객석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진짜 너네 대박이다!!!”
“반응 괜찮았어요? 우리 멤버들 이번엔 라이브도 안 흔들리고 잘한 거 같은데.”
“당연하지! 이야, 너네 표정 장난 아니라고 다들 난리였어!”
이병수가 기특함과 흥분을 담아 걸죽한 칭찬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한야는 그에게 부드럽게 대처하며 멤버들을 챙겼다.
“형들, 형들 진짜, 너무…… 감사해요.”
상현은 완벽했던 무대에, 딱 봐도 높았던 마음 점수까지 무척 감격했는지 정말로 눈물을 글썽이다 결국 훌쩍였다.
“뭐 어쩌라고 허접한 마왕, ……상현? 어디 아파?”
“……연약한 인간이군. 인간이란 고작 이 정도 움직임으로 몸이 아프단 말인가.”
그에 아직도 무대 위 무언의 싸움에 감정이 풀리지 않아 투닥거리던 아덴과 케이가 상현에게 다가가 그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덴은 걱정하는 게 무척 자연스러웠지만 케이는 일단 다가와 놓고 순간적으로 뻘쭘해졌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아픈 게 아니고요……흐읍…… 저는 진짜 형들이이…….”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요오…. 하는 은근슬쩍 내뱉는 솔직한 뒷말이 서도화의 귀에도 흐릿하게 들려왔다.
서도화는 그럭저럭 또 조화되기 시작한 멤버들을 보다 이미 내려온 무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동결된 채팅창과 움직이지 않는 하트 아이콘 때문에 걱정하느라 지난 1라운드에선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솟구쳤다.
그토록 오르고 싶었던 무대, 갈망하던 반짝임.
5년의 목숨 값, 거기에 반년의 노력 값이었다.
누군가는 5년을 대가로 고작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바랐던 대로 무대 위에 올라보니, 그 값을 치르더라도 할 만한 노력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