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이야…….”
서도화는 감탄했다.
무려 2위, 상상 속에서나 하던 순위였다.
순위가 높겠지, 높을 수밖에 없지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급격한 상승을 할 줄이야.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희비가 교차되는 순간에 막 좋아할 수는 없지만 몸은 솔직하게 반응해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형 우리 2위래요…….”
옆에서 주상현이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도화가 대답하지 않자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아덴이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러곤 주상현 대신 한 번 더 말을 전했다.
“우리 2위래.”
“어어, 들었어.”
지금만큼은 사이코 용사가 말을 걸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간의 노력과 고난들이 상당히 고되었기 때문일까? 아직 합산 순위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감격이 차올라 툭 치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한야 형이 2위면 베네핏 확정 아니겠냐는데?”
“들었어, 그만…….”
“상현이가 너 우냬.”
“그만…….”
그런데 아덴이 툭툭 치며 멍하니 있는 서도화에게 멤버들의 말을 전달했다. 그러더니 서도화의 먹먹한 표정을 확인하곤 이번엔 걱정을 담은 물음을 전해왔다.
“진짜 울어? 아파? 갑자기 아픈 거야? 어디가! 왜 울려고 그래. 왜 참아? 참지 말랬잖아.”
“그, 그만.”
제발 말 좀 그만 걸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서도화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데엔 아덴의 탓도 있었다. 저 자식이 조금만 덜 사이코 같았더라도 제 2세계에서 서도화의 스트레스는 조금이나마 덜했을 것인데.
어쨌든 서도화는 이런 상황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순위 공개로 희비가 교차되는 상황, 남들은 탈락의 고배를 마셔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데 혼자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건 너무 꼴값 떠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덴의 주책에 눈치없는 마왕 한 마리가 또 달라붙었다.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만 참아라. 서도화. 너는 네 힘으로 치료가 가능할 테니.”
“안, 안 아프다니까…….”
아니 설마 쟤 내 걱정하는 건가? 마왕의 걱정스러운 뉘앙스 덕분에 감격이 쏙 들어간 서도화였다.
그래, 그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이 세계에 용사와 마왕이 있으니까 말이다.
다행히 아덴의 걱정이 더 커지기 전 C 키워드의 순위공개 화면이 바뀌어 A, B, C 모든 키워드의 순위가 한 화면에 채워졌다. 서영이 진행을 이었다.
“이로써 모든 키워드별 순위가 발표되었습니다. 지난 1라운드 때 말했듯 각 키워드당 절반은 오늘을 끝으로 탈락하게 됩니다.”
서영의 말을 따라 화면 속 순위 위로 딱 절반의 위치에 날렵한 효과음과 함께 선이 그어졌다.
“B키워드 18위, A와 C키워드 17위 이하는 모두 탈락. 3라운드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연습생들은 탄식했고 그들의 탄식 소리가 라이브 스트리밍에 고스란히 송출되었다.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던 100팀, 하차한 그룹을 제외하고 94팀은 순식간에 49팀으로 줄었다.
서영은 잠시 진행을 멈추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연습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겐 익히 익숙한 광경이었다. 한쪽은 차마 슬픔을 감출 수 없었고 한쪽을 감히 기쁨을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뒤로한 채 탈락된 그룹은 꿈을 향해 날아오를 기회 하나를 잃었다.
서영 본인도 진행자로서 팝넷의 악랄한 기획을 돕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참 씁쓸하기 그지없는 시스템이다.
“후우.”
서영은 조용히 숨을 내쉬곤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의 감정이 어떻든 진행을 계속해야만 했다.
“다음은 A, B, C 키워드 참가자 모두를 합한 전체 순위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화면이 전환되며 총 100개의 슬롯이 한번에 돌아가며 공개되었다. 2라운드 최종 순위가 발표 되었다.
현장은 무언가 하나 발표할 때마다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러한 혼란은 최종 순위에 다다라 절정에 달했다.
“어?”
서도화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11위] 56번(유제이 엔터테인먼트)
무려 10계단이나 올랐다. 그러나 서도화가 목소리를 낸 건 순위가 상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낮아서였다.
키워드 경연에서 2위를 했던 56번이 전체 순위에선 11위를 했다. 4위에 오른 C 키워드 팀 1위 그룹을 제외하면 10위까지의 순위를 차지한 그룹들이 모두 A와 B에서 나왔다.
현장은 동요했다.
무려 10계단을 올라간 56번 그룹, 5위로 밀려난 너튜버 그룹. 1위를 차지한 데스티니 소속 그룹 1번 팀.
그 외에도 키워드별 순위와 다른 여러 반전 요소가 될 만한 큰 변동이 이루어졌다.
다만 너튜버 그룹을 제외하곤 1위부터 10까지의 그룹은 1라운드와 큰 변화 없이 콘크리트 같은 철옹성을 자랑했다.
‘뚫기 쉽지 않겠네.’
팬덤의 단합도, 순위도, 얼마 안 되는 라운드 동안 뚫고 들어가기가 참 어려울듯하다.
더군다나 3라운드 이후엔 첫 방송이 방영될 것이고 그렇다면 따로 컨텐츠를 찍었다던 1라운드 1위부터 5위까지의 벽은 더욱 견고해질 터다.
“허.”
그때 자신의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서도화가 고개를 돌렸다. 한야가 코웃음을 쳤다. 별 이상할 것 없는 그냥 미소일 뿐이었지만 그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서도화는 곧장 알 수 있었다.
저건 기분이 좋아 지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서도화는 알아차렸다.
순위에 무언가 있구나.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 무언가는 이번 라운드의 1위 데스티니 그룹과 연관된 것이겠구나.
서도화는 시선을 다시 순위표로 향했다.
‘더 뚫기 힘들겠네.’
아니 뚫을 수 있을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이 프로그램의 최대 투자자가 데스티니라는 걸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서도화 또한 한때 그 엔터테인먼트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그들은 눈에 보일 정도로 갑질과 조작을 일삼아 팬덤들 사이 더티(데스티니의 줄임말 데티를 변형한 용어)라고 불림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이것을 신경 쓰고 씩씩거릴 필요는 없다.
외부의 힘이 가해진 그룹이 얼마나 많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56번에겐 아직 그 압력을 실감하기까지 오를 계단이 많았다.
“이것으로 모든 순위 발표가 끝났습니다. 3라운드에 진출한 그룹에게는 진심 어린 축하를 탈락한 그룹에게는 위로와 함께 다음을 기약하며-”
서영의 다음 멘트에 탈락한 그룹들의 표정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10분간 휴식 후 3라운드 주제를 발표합니다.”
모든 것이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진행되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이를 테면 출연진, 스태프들의 피로함 그리고 탈락자들에 대한 배려와 같은.
지금이 딱 그런 어쩔 수 없는 때였다.
서영이 멘트를 끝냈고 그와 함께 라이브 스트리밍 화면이 대기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탈락자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제작진의 안내를 받아 퇴장했다.
만약 녹화로 이루어졌더라면 그들은 조금 더 부드럽게 위로받을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로 비참하게 슬픔마저 꺾어버리진 않았으리라.
아주 짧은 대기 시간, 순식간에 탈락자들이 사라지고 합격자들이 가운데 앞 좌석부터 다시 재배치되었다.
남은 합격자들은 3라운드에 진출하게 되었음에도 왠지 모를 씁쓸함에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방송이 재개되길 기다렸다.
잠시 후 방송이 재개되었다.
-ㅁㅊ텅텅 비었네...
-허 다들 어디 갔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ㅜㅜㅜㅠㅜ퓨ㅠㅜ
-ㅠ탈락자들 퇴근?
-10분만에 이걸 정리해버리네
-현장 정리라는 게 탈락자 정리였냐ㅋㅋㅋ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짧게 비춰준 연습생 좌석. 반이 날아간 현장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기탄했다.
서도화가 스트리밍 화면 아래 표시된 시청자 수를 확인했다. 좌석이 비춰지자마자 시청자가 일시적으로 줄어들었다.
응원하던 그룹이 없어진 시청자들이 대거 이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탈수가 많아도 인기 그룹이 여전히 대거 자리에 남아 있었기에 크게 타격은 없었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팝넷 사상 최대 규모의 라이브 프로젝트. 밀리언 아이돌…….”
서영이 멘트를 하다 말을 멈추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3라운드 주제 발표를 시작할 텐데요. ……빈 좌석을 보니 참……. 마음이 그렇네요.”
언제나 단호하게 진행을 이어가던 서영이 처음으로 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내 서영은 제 감정을 추스르곤 언제나와 같이 진행을 이어갔다. 빠르게 진행하지 않으면 참가자, 제작진, 시청자 모두의 피로도만 올라갈 뿐이다.
“그럼 3라운드 주제 발표하겠습니다.”
서영이 옆으로 비켜서며 무대 뒤 대형 스크린을 향해 반쯤 몸을 틀었다.
화면에 커다랗게 3라운드의 주제가 나타났다.
[그룹 합동 퍼포먼스]
“3라운드의 주제는 그룹 합동 퍼포먼스입니다.”
……합동, 퍼포먼스?
열정 가득한 눈빛으로 정면을 보던 서도화, 그리고 그 옆의 주상현의 얼굴이 알게 모르게 창백해졌다.
서영이 말했다.
“참가 그룹 전원은 3박 4일 동안 합숙하며 두 그룹씩 함께 합동 퍼포먼스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규칙은 간단했다. 참가 그룹들은 두 팀씩 짝을 지어 합동 퍼포먼스를 한다. 팀은 순전히 제비뽑기로 정해지며 남은 인원이 짝수이니 한 팀은 세 그룹이 묶인다.
그렇게 합숙하며 경연을 준비하고 공연하고 순위를 정해 탈락자를 걸러내는 듣기는 아주 간단한 룰이었다.
다만 팝넷에서 치러졌던 모든 시즌의 합숙이 그러했듯 합숙 기간 동안 연습생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고통받게 될 것이다.
3라운드 규칙을 들은 서도화는 생각했다.
“세 그룹이 묶이는 팀에만 들어가지 말자.”
혼자 참여한 서바이벌이면 몰라도 그룹으로 참여하는 경연에 무려 세 그룹이 함께하는 건 좌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파트도 훨씬 더 많이 쪼개질뿐더러 멤버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대형을 구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그룹까지 있는 자리에서 케이와 아덴을 동시에 컨트롤할 자신이 없다.
‘근데 내 제비뽑기 운이…….’
서도화는 이세계로 날아간 직후부터 도통 따라주지 않던 제 운을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고 말하면 되고 마는 게 용사 파티의 숙명이다.
어쩌면 서도화의 운이 나빠진 것 또한 아덴, 아니 용사 파티에 속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때 아덴이 서도화를 툭 쳤다.
“세 그룹 같이하는 팀만 안 들어가면 좋겠다 그렇지? 인원수 많으면 전술 짜기 힘들지 않아?”
“아.”
서도화가 탄식했다. 큰일이다. 기어이 용사가 플래그를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