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아니 뭐 이런 것까지 경쟁을 해?
연습생들이 크게 동요했다. 짝꿍이 된 그룹과 실력이 엇비슷해도 조금 못해도, 조금 더 뛰어나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었다.
아니 좀 조화롭게 협력하고 화목하게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며 좋게 좋게 경쟁하면 좀 좋아?
하지만… 팝넷이 싫어하겠지……?
서도화는 빠르게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좋게 좋게 경쟁하다니 정말 꿈같은 소리다. 경쟁에 하하호호가 어디 있겠나. 당장 서도화 본인만 해도 91번을 철저히 이겨 먹을 생각으로 오지 않았던가. 더구나 이곳은 악명이 자자한 팝넷 서바이벌 프로 전용 합숙소였다.
‘그래도 우린 사정이 좀 낫지.’
서도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비뽑기로 걸린 언밸런스한 실력차의 그룹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너지 효과를 노렸던 베네핏 순위권들도 단체로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마 합숙 내용을 들었더라면 절대 뽑지 않았을 법한 그룹들끼리 뭉친 경우가 참 많았다. 이제 와서 보면 베네핏이 베네핏이 아니었다.
그리고 91번은…….
서도화는 스치듯 그들을 보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안색이 무척 안좋다.
그럴 만도 했다. 언밸런스한 다른 그룹들이 그렇듯 저들에게도 56번은 파트 경쟁을 치르기엔 무척 버거운 상대일 테니까.
혼란 속 서영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설명은 모두 마쳤고요. 이제부터 한 시간동안 팀별 회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팀별 회의 시간엔 커버할 곡과 컨셉을 정하고 멤버들끼리 1차 심사 때 선보일 수 있도록 임시로 파트를 배분한다.
처음엔 멤버들이 결정한 파트로 연습을 할 테지만 이후 3박 4일 동안 트레이너 심사를 통해 파트가 유지될지 수정될지 정해질 것이다.
서영은 진행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연습생들에게 간단한 팁을 말해주었다.
“각 그룹은 이번 회의 때 최대한 많은 파트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뺏는 것보단 유지가 덜 어려울 테니까요.”
“흐음…….”
서도화는 생각에 잠겼다. 겉으로 보기에 여러모로 불리한 쪽은 91번인 듯하지만 사실 56번이라고 그리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다.
지금까진 대개 케이가 비주얼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서도화의 보컬 실력, 주상현의 댄스 실력, 한야, 아덴의 탄탄한 보조와 아크로바틱을 모두 적절히 활용해 좋은 순위와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의외로 잘 맞는 멤버들의 시너지와 대표 김유진의 기획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개개인으로 보면? 아덴과 케이의 실력은 아직 부족하다. 많이 부족하다.
아무리 늘었다고 해도 아크로바틱을 제외하면 보컬도 댄스도 평균, 혹은 평균보다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아덴은 제 피지컬로 주상현이 인정할 만큼 댄스 실력이 늘었으니 노래 파트는 뺏겨도 안무 포지션에선 그럭저럭 유지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케이는 비주얼을 제외하고는 아직 혼자 누군가와 경쟁하긴 힘들었다.
서영이 말한 ‘파트가 한 소절도 없는 멤버’가 케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케이는 쭉정이지만 그래도 우리 쭉정이다. 91번 따위에게 밀리는 꼴은 절대로 못 본다.
거기다 문제는 하나 더, 56번에게는 이젠 이들에게 걸린 기대치라는 게 생겼다.
빠르게 올라가는 순위, 높은 화제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분명 잘하겠지! 하는 시청자들의 기대, 팬들의 기대, 그리고 파트 경쟁 심사위원들의 기대 같은.
그런 기대를 받는 이들이 이번 합숙에서 실력의 부족함을 보인다면? 역으로 반감을 얻는다면?
서서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아덴과 케이의 실력을 안정권에 올려놔야 해.’
적어도 이번 파트 경쟁에서 한 파트라도 본인의 힘으로 뺏을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저놈들, 내 손을 더럽히기는 싫지만 이번 합숙까지 어떻게든 56번의 이미지에 알맞은 연습생으로 만들어 놓아야 했다.
“왜 저래?”
“나한테 묻지 말라.”
“너한-”
케이를 향해 너한테 물은 적 없다고 말하려던 아덴이 입을 다물었다. 김유진의 말대로 케이와 싸우지 않겠노라 약속했으니까.
아덴과 케이는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어쩐지 의욕적인 서도화의 모습을 불길하게 바라보았다.
의욕적인 음유시인이라니, 이따금 우나나가 말했던 ‘부드럽고 거칠게’라는 표현처럼 말이 안 되는 문장이었다.
“그럼 팀별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짝꿍 그룹과 함께 원하는 장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한 시간 뒤 이곳에서 다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해산!”
서영이 단상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연습생들은 각자의 짝꿍 그룹과 함께 강당을 떠나 원하는 회의 장소로 향했다.
한야는 멤버들을 챙기며 91번 그룹의 리더에게 물었다.
“저희는 어디서 회의할까요?”
한야의 물음에 91번 그룹의 리더 지한은 여유 없던 표정을 고치곤 자신의 발밑을 가리켰다.
“그냥 여기서 할까요? 다들 나가고 저희밖에 안 남았는데.”
“그럴까요?”
멤버들은 리더의 말을 따라 강당 바닥에 자리 잡고 앉았다. 지한이 연습생들을 보며 물었다.
“저희 무슨 곡 할까요?”
“저는 저희도 그렇고 91번 그룹 분들도 그렇고 아크로바틱을 잘하는 편이라서 그걸 살릴 수 있는 곡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해요. 혹시 생각해두신 곡 있으세요?”
“이 곡은 어떨까요?”
지한의 물음에 한야는 고민 없이 휴대폰을 켜 생각한 곡을 재생했다. 멤버들끼리 상의한 건 아니고 한야 혼자 고민해 가져온 곡, 아이돌그룹 헤이트의 세 번째 정규앨범에 수록된 To come였다.
댄스곡이었지만 온갖 악기가 쌓여 만드는 잊지 못할 멜로디. 클래식하고 서정적이며 아련한 분위기가 무척 인상적인 곡이다.
명곡으로 불리며 k-pop 팬들 사이에서 무척 유명한 곡이지만 콘서트에서만 선보인 터라 대중적이진 않았다.
댄스 포인트마다 현을 긁는 바이올린 소리가 특징인 곡이니 임팩트 주기도 좋고 콘서트용 곡인 만큼 편곡도 쉽다.
여러모로 경연에 딱 어울리는 곡이었다.
“오…….”
서도화와 주상현이 감탄하며 곡에 맞춰 리듬을 탔다. 한야는 멤버들을 보곤 곡을 끊지 않은 채 말했다.
“곡도 좋지만 저희도 그렇고 91번 분들도 그렇고 서정적인 컨셉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해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 가져와 봤습니다.”
한야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지한과 91번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어떠세요? 우리 멤버들은 어때?”
어떤 의견이든 수용하겠다는 매우 어른스럽고 다정한 물음이었다.
“너무 좋은데요? 이 곡을 생각 못 했네.”
“저도 좋아요.”
아덴은 서도화가 동의하고서야 자신도 좋다 말했고 케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당연히 56번 그룹은 한야 무한지지 체제였다.
“……으음.”
그러나 91번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떨떠름하게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 리더 지한을 바라보았다.
“어…… 곡은 좀 더 상의해볼까요?”
‘뭐야.’
아덴은 그들의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대하는 건 좋다.
하지만 리더를 통해서 말하는 꼬락서니가 예전 귀족들이 하인을 통해서만 자신과 대화를 나누려던 것과 똑같았다. 마치 상전이라도 된 듯 입은 꾹 다문 채 눈빛으로 자기들끼리 의견을 주고받는 게 무척 기분 더러웠다.
뭐가 저렇게 꽁한 건지 이유를 이해 못 하겠으니 납득할 수도 없었다.
아덴이 표정 관리를 하는 찰나 한야가 무척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생각하신 곡이 있으신가요?”
“그건 아닌데, 저희는 여기서 곡 정해주는 줄 알고. 더 좋은 곡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조금 더 생각해볼까요?”
서도화는 지한을 보며 어지간히 말 못 하는구나 생각했다. 하는 말 하나하나가 참 트집 잡히기 쉬운 말들인데, 그걸 진짜 모르는 건가? 아니면 견제하느라 신경 쓸 여유도 없는 건가.
‘하긴, 이쪽도 대표님 아니었으면 표정 관리 못 하는 녀석들 더러 있었겠지.’
서도화가 아덴과 케이, 그리고 주상현을 힐끔거렸다.
“네, 그럼. 다른 멤버들도 의견 있으면 말해주세요.”
“그럼 이 곡은 어떨까요?”
한야의 말에 드디어 91번 그룹 멤버가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91번의 메인보컬 오현민이 자신이 생각한 곡을 말했고 그 이후 모든 멤버들이 적어도 한 곡씩 의견을 냈다.
주상현 또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메종 선배님의 건반이라는 곡 어때요? 댄스 브레이크는 따로 없는데 전주랑 후반에 발로 하는 안무가 되게 멋있어요.”
건반이란 곡은 재즈풍 댄스곡으로 상당히 신나는 리듬과 능글능글 익살맞은 무대 연기가 인상적인 곡이다.
“어! 저도 그거…….”
91번의 메인 댄서는 큰 소리로 말하다 멤버들의 눈치를 보며 작게 말했다.
“그 곡 저도 좋아해서, 저도 ‘건반’으로 하는 것에 찬성입니다.”
서로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은 채 의견만 계속 내던 두 그룹은 같은 의견이 나오고서야 선곡을 정했다.
“그럼 ‘건반’으로 할까요? 저도 개인적으로 이 곡 좋아해서요.”
“네, 좋습니다.”
“좋아요.”
“이제 곡도 정했는데 저희 임시 파트 정해볼까요?”
한야의 말에 양측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여기서부터 경쟁의 시작이었다.
이 순간 멤버들은 가며 다시금 김유진의 말을 떠올렸다.
-싸울 것 같으면 부드럽게 양보하고 그냥 져줘.
멤버들의 표정이 굳어지자 김유진은 얼른 한마디를 더 얹었다.
-그리곤 은근슬쩍 다시 이겨.
서도화와 멤버들은 이걸 ‘사람 좋은 척 양보하고 나중에 은근슬쩍 다시 빼앗아라’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아마 이 뜻으로 한 말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멤버들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번 합숙 전략 방향을 정했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양보하자.
그리고 도로 뺏자.
최대한 김유진의 조언대로 이미지를 구축해볼 생각이었다.
* * *
지한은 꽤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도입부는 저희 현민이한테 한번 맡겨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민이가 음색이 진짜로 좋거든요.”
파트 차지하기에 무척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지한이 91번 팀의 메인보컬 오현민을 앞에 내세우자 오현민은 ‘응?’하는 표정을 짓다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열심히 할게요.”
“다들 말씀 없으시면 현민이가 하는 것으로!”
“감사합니다!”
……진심이냐.
아직 56번 그룹 멤버들은 가타부타 말도 없었는데 이미 도입부 파트는 오현민으로 확정된 것마냥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메인보컬 간의 너무나 큰 격차. 여유가 없는 이 그룹은 철가면을 너무 일찍 벗어버렸다.
그래 91번도 절박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파트 배분은 공정하게, 서로가 납득되는 선에서 해야하는데.
“어음…….”
그에 서도화는 그저 얼굴에 난감함을 띤 채 대답을 미뤘다. 주상현도 무척 곤혹스러워 보이고 아덴과 케이는 그냥 대놓고 납득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야는 멤버들의 표정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 장면이 방송에 나간다고 해도 표정으로, 멤버들의 반응으로 저들의 막무가내 파트 배분 방식에 이쪽도 기분이 좋지 않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하하. 이거 어쩌죠.”
한야는 소탈히 웃었다.
말하자면 두 그룹의 파트 분배는 도입부부터 꽉 막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건반’의 도입부 파트는 다름아닌 메인보컬의 파트였다.
음색으로 몰입도를 크게 끌어올리는 중대한 역할이자 가장 임팩트 있을 파트였기 때문에 두 그룹 다 각자의 메인보컬에게 배분하고 싶음은 당연했다.
물론 심사 후 파트가 수정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뺏는 것보단 현상 유지가 조금 더 쉬우니.
“사실 저희도 도입부는 좀 탐이 나서요.”
한야의 말에 한동안 조용하던 서도화도 앞으로 나섰다.
“저도 도입부는 꼭 해보고 싶어서-”
한야, 지한, 오현민 셋의 시선이 서도화에게로 향했다.
“아.”
지한의 짜증 섞인 탄식 소리. 아주 짧게 어색한 정적이 일었다.
“엇…….”
서도화는 당황한 척 머쓱하게 웃었다. 거참 하고 싶어서 하고 싶다고 말한 건데 눈치 더럽게 많이 준다.
그래도 서도화는 물러서지 않고 한야의 뒤에 숨듯 곁에 섰다.
“도입부 저도 부르고 싶어요.”
임시로 양보를 하긴 하더라도 경연 이기겠다고 여기까지 왔으면 욕심은 한번 내줘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