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곡을 통틀어 가장 임팩트 있는 파트, 거기다 연출상 확정적으로 원샷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이 부분만큼은 놓칠 수 없었다.
서도화가 도입부에 대한 욕심을 내비친 후 두 그룹 사이에 꽤 오랜 침묵이 오갔다. 이 침묵을 깨트린 건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덴이었다.
“도화도 음색이 좋아서 도입부 잘할 것 같은데.”
겨우 입을 떼고 한다는 말이 서도화 편들어주기였다.
맞다맞다! 케이도 이번만큼은 아덴의 말에 크게 동의하며 말없이 그러나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리 타이밍은 좋지 않았다. 지한과 오현민의 표정이 한층 더 여유가 없어졌다.
그들 또한 서도화의 음색이 좋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현장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상 현상을 체험한 장본인들이었다.
“근데 도입부 저희 현민이가 정말 잘 살릴 수 있거든요…….”
그러나 이 곡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파트인 만큼 누가 더 이 파트에 잘 어울리든 자신들의 메인보컬이 했으면 했다. 서도화가 잘 부르는 건 알고 있지만 솔직히 실력은 오현민도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를 갈무리한 건 한야였다. 한야는 서도화를 달래듯 말했다.
“그럼 도화야. 우리는 여기 해보는 거 어때?”
서도화는 한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가사를 보았다. 하이라이트 고음 파트였다. 도입부만큼의 임팩트는 아니었지만 댄스 브레이크 후 메인보컬이 자신의 실력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엔 그보다 좋은 파트였다.
서도화는 한야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툼이 싫은 듯 서도화를 미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서도화는 한야의 눈빛의 또 다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일단’은 양보하자.
서로 사전에 말을 맞춰뒀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 있는 눈빛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서도화의 눈썹이 빠르게 내려갔다. 그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을 연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형.”
세상 고분고분한 말투였다. 욕심은 나지만 존경하는 리더의 말이니까 얌전히 듣는다. 그의 유순한 얼굴만큼이나 순한 행동이었다.
나란히 앉아있던 주상현과 케이가 서로를 보며 떨떠름한 시선을 교환했다.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어요.’
‘음유시인의 평소 말투가 아니다.’
마치 형들을 대할 때의 주상현과 같은 말투였다. 물론 서도화의 행동이 가식이라는 건 유제이 멤버들만 알아차렸다.
사실 서도화는 전혀 아쉽지 않았다. 아쉬울 게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뺏어올 건데.
한야는 양보하는 서도화가 기특하다는 듯 토닥이곤 대신 지한에게 말했다.
“도입부는 현민 씨가 하시는 대신 이 부분은 저희 도화가 불러도 될까요?”
“어엇……,”
지한은 머뭇거리며 오현민을 바라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어… 네, 그러세요.”
양보받은 게 있으면 양보하기도 해야 한다. 표정 관리는 잘 못 했지만 욕심도 정도껏 내지 않으면 이기적으로 보일 것을 지한은 잘 알고 있었다.
메인보컬들의 킬링파트 분배가 정해지자 그 이후엔 그럭저럭 빠르게 진행되어갔다. 물론 몇몇 파트에 부딪히는 부분이 있었지만 멤버들은 김유진의 말에 따라 양보와 배려로 일관했다.
어차피 뺏어올 생각이니 괜찮았다.
무난하게 끝난 1차 파트 분배. 그러나 이들은 기획 구상에서 또 한 번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으음…….”
곡의 발재간 댄스 부분. 이 곡의 트레이드마크 안무는 곡의 시작과 함께 나온다. 센터 하나를 두고 삼각대형으로 서서 펼치는 안무.
트레이드마크인 만큼 살리기는 살려야 하는데 가장 앞에 설 센터, 메인 댄서를 결정하는 게 곤혹이었다.
‘그래 얼마나 욕심이 거대한지 보자꾸나’ 하는 성자와 같은 태도로 가져올 건 가져오고 양보할 건 양보하던 멤버들도 이 부분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어차피 편곡하며 부분부분 댄스 브레이크 부분을 만들기는 할 거라 크게 욕심이 나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56번의 메인댄서가 무려 주상현이지 않은가.
주상현이 춤 잘 추는 건 업계 사람 모두가 알고 또한 팬도 안다.
그러니 도입부와 같이 멤버들이 이 부분을 양보한다면 주상현, 그리고 56번 그룹 팬들의 반발과 더불어 남들이 다 인정하는 주상현의 댄스 실력을 정작 멤버가 욕심내지 않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한야가 말했다.
“댄스 브레이크 부분은 나중에 연습실에서 정하는 게 어떨까요? 직접 보고 좀 더 적절한 사람이 맡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곡의 상징적인 댄스 파트다. 일단 연습실에서 선보이고 나면 무조건 주상현이 이 파트를 가지게 될 거라고 한야는 생각했다.
한야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낸 건 의외로 주상현이었다.
“이 파트는 손지 씨가 맡으셔도 전 괜찮아요.”
“진짜요?”
91번 그룹의 메인 댄서 손지가 눈을 키운 채 곧장 말했다. 하도 주상현의 인기와 댄서로서의 이미지가 확고하니 저 파트는 뺏길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주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이 부분 다음에 바로 나오는 댄스 파트는 제가 하게 해주세요.”
“아.”
서도화가 탄성을 내뱉었다. 주상현은 임팩트보다 실속을 택했다. 물론 이 곡의 안무 중 가장 유명한 부분은 방금 손지에게 양보한 그 부분이 맞다.
하지만 가장 고난도 안무를 선보이는 부분은 바로 그다음이다. 고난도에 긴 시간 안무를 선보이며 실력도 뽐내고 카메라 분량도 가져간다.
원곡에선 메인 댄서 혼자서 모든 파트를 처리했지만 이들은 두 그룹이 함께해야 하니 댄스 파트도 쪼개 나눠야 했다.
주상현의 말을 이해한 손지는 ‘진짜요?’하던 신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대답 없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임팩트 있는 짧고 쉬운 파트를 맡을 것이냐, 그 뒤에 있는 고난이도의 안무를 맡아 카메라 앞에 긴 시간 자신의 실력을 어필할 것이냐.
애초에 원곡의 메인 댄서가 댄스 브레이크 전체를 맡았기에 그렇지 트레이드 마크인 삼각대형 부분은 아무나 비주얼 멤버 하나 데려다 놔도 무난히 소화할 만한 동작이었다.
비주얼?
서도화의 시선이 잠시 자신의 뒤쪽에 머물렀다. 서도화의 시선 끝엔 입이 근질거려 죽겠다는 표정의 케이가 있었다.
케이는 서도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팍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전부 양보하는 것이냐.’
‘왜 저들의 횡포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냐.’
그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서도화는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이고 케이의 시선을 피했다. 악편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91번 똥고집에 대응을 하나. 저들의 표정과 행동에 대한 대응을 굳이 멤버들이 기분 나쁜 티를 내며 할 필요 없었다.
저들의 욕심에서 우러나온 고집은 촬영분이 방영된 이후 시청자들이 심판하도록 두면 될 일이다.
‘더 고집부리고 더 욕심부려라.’
괜히 손 더럽히지 말자. 멤버들은 그냥 파트나 열심히 가져와서 실력으로 밟아 주상현을 업신여겼던 그 건방진 표정을 찌그러트리면 그걸로 된 것이다.
그래도 케이의 불만을 너무 무시하면 탈이 날지도 모르니…….
서도화는 잠시 고민하다 나지막이 말했다.
“어차피 편곡을 할 거니까-”
지한과 손지의 시선이 삐딱함을 띤 채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또 너냐?’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으나 서도화는 깔끔히 그 눈을 피한 채 말했다.
“댄스 브레이크 부분을 따로 만들어서 상현이랑 손지 씨 모두 한 번씩 맡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 다 너무 잘하니까.”
“그럼 삼각대형 부분은…….”
지한이 말했다. 공정함을 위해 한 사람은 삼각대형, 한 사람은 고난도 안무를 맡겠다고 하는 건데 두 사람 모두가 고난도 안무를 하게 되면 가장 중요한 삼각대형은 누가 맡아?
지한이 인상을 푹 찌푸리며 손지를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상대가 주상현이니 무대 분량 적을까 봐 걱정되는데 삼각대형 맡겠다고 하면 좋으련만, 꼴에 댄서 자존심을 세우며 고난도 안무를 맡고 싶은 기색이다.
지한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손지 대신 서도화가 했다.
“그 부분만 하는 거면 안무가 크게 어렵지 않으니까 어음, 저희 초반부터 시선 몰이 확실히 하도록 그냥 비주얼 좋은 멤버가 맡으면 어떨까요?”
그리곤 가볍게 씨익 웃었다. 아직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봐서 대충 얼버무리는 듯한 뉘앙스였다. 하지만 이미 가식 범벅이 된 회의, 이곳의 사람들은 서도화가 말하는 ‘비주얼 좋은 멤버’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비주얼 좋은 멤버요…….”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비주얼 좋은 멤버. 말수가 적은 편인지, 낯가림이 심한지 말 한마디 없이 한야와 서도화의 뒤에 앉은 채 구경하던 케이였다.
“아.”
“아아…….”
91번이 탄식했다. 저 얼굴은……그래,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아주겠네. 몰입도 확 올라가겠네…….
분하게도 케이는 말없이 의아한 듯 두리번거리는 그 얼굴조차 빌어먹게 잘생겼기 때문에.
* * *
한 시간의 회의가 끝난 후 강당으로 연습생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영의 진행에 따라 각자의 숙소와 연습실, 그리고 연습 시간을 배정받았고 잠깐의 휴식 뒤 약 세 시간 정도의 1차 연습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파트만 분배한 이 상황에 1차 연습부터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었다.
편곡도 안무 회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 할 수 있는 건 서로 협의했던 파트들의 확인과 안무 숙지 정도였다.
주상현과 서도화, 그리고 91번 그룹의 메인댄서 손지가 안무를 따고 회의 때 정했던 파트대로 연습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조금 난이도가 어려워져요. 발을 이렇게 하고, 또 케이 형 파트-”
연습을 진행하는 동안 불합리한 파트배분에도 평온했던 서도화와 멤버들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가기 시작했다. 반면 91번은 여유 잃은 표정은 어디 가고 흥미롭게 주상현의 가르침을 받는 이를 바라보았다.
“돌아서도 나는 그곳-”
“케이, 노래 음정 안 맞아. 휴식 시간에 듣고 온 거 맞지?”
“들었…습는데…….”
“노래 뿐만 아니고 지금 안무가, 아덴 씨도 방금 너무 빨랐어요.”
“아, 어.”
한야와 주상현, 그리고 손지가 케이와 아덴을 향해 칼 같은 지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들을 보며 서도화는 유제이에서 처음으로 연습한 날들을 떠올렸다. 그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답답-한 광경이었다.
‘아, 밑천이 다 드러나네.’
어떻게든 후반에 외우기는 외운다만, 곡을 처음 뜰때는 언제나 이 모양 이 꼬라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모습을 카메라와, 제작진과, 91번 멤버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여기서 발을 따다닥! 빠르게 하는데 멤버 모두 속도가 맞아야 해요. 탭댄스 하듯이 손도.”
“네.”
서도화는 주상현과 손지의 지시에 따라 몸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1차는… 글렀네.’
아무튼 케이, 아덴 파트는 모조리 뺏길 것이니 마음 준비 단단히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