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1차 연습이 끝난 뒤엔 순위대로 한 팀씩 트레이너와의 면담 겸 1차 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편곡도, 안무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의 1차 심사라 미숙함이 어느 정도 감안은 되겠지만…지금까지의 서바이벌 예능을 생각하면 아마 이번 면담에서 멤버들은 처음으로 심장을 후두려패는 평을 가감 없이 듣게 될 거다.
그러므로 연습생들끼리 연습하는 1차 연습은 무척 빡세게 이루어졌다.
면담하러 오면서 안무조차 완성 못 하고 왔냐는 지적만큼은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우린 완성 못 했지.’
서도화가 탄식하며 고개를 숙이자 주상현, 아덴, 케이가 순서대로 시무룩해졌다.
“연습을, 연습을 열심히 한다.”
“그래, 도화, 나 저녁에 연습 진짜 열심히 할게.”
“제, 제가 도울 거니까 형!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서도화가 번쩍 고개를 들고 무슨 소리냐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연습은 같이해야지. 무슨 말이야?”
아무래도 서도화가 멤버들에게 실망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서도화는 그들에게 실망한 게 아니었다.
절망했을 뿐이지.
아예 완성을 못 한 건 아니다. 안무 자체를 외우고 곡 끝까지 춤추고 노래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실수가 몹시 잦았고 심각하리만치 몇몇 멤버의 보컬이 너무 부정확했다. 난 비주얼로 들어왔어요~ 광고하는 듯한 모습인지라 갈수록 91번은 표정이 폈고 서도화와 멤버들은 심려가 가득해졌다.
‘오늘 뺏긴 파트, 내일 도로 뺏어올 수 있으려나.’
서도화는 심사에 들어가기 전부터 뺏길 파트를 예상한 채 덤덤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아덴과 케이의 실력을 확연히 향상시킬 수 있으려나? 아덴은 이틀이면 충분히 제 맡은 바는 완벽히 익혀오겠지만 케이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주상현에 대한 91번의 비아냥과 멤버들의 양보가 무척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인지 케이가 드물게 불타오르고 있는 건 다행이었다.
서도화는 멍하니 1차 심사 장소로 향하는 문을 바라보다 일어났다.
“그래, 열심히 하면 되지. 다 같이 열심히 하자.”
걱정해도 멤버는 바뀌지 않는다. 다행히 케이를 제외한 다른 멤버의 파트는 별걱정이 없으니 일단 뒷일은 심사를 마치고 생각해보자.
“56번, 91번 심사 들어갈게요.”
제작진이 말했고 멤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열심히 합시다!”
“네!”
91번 지한의 말에 대답하며 그들은 심사장으로 향했다.
* * *
“너희 아직 곡 제대로 못 익힌 거 알고 있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해. 감안하고 볼 테니까.”
1차 심사의 심사위원은 도로시를 포함한 밀리언 아이돌의 트레이너들 그리고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유명한 작곡가와 아이돌 출신 솔로가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대한 편한 분위기를 유도하며 말하던 심사위원들은 56번과 91번의 공연이 시작되자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서도화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던 처음과 달리 갈수록 굳어가는 그들을 시간대별로 봐야만 했다.
완전히 실망한 얼굴이었다.
물론 중간중간 마음에 드는 파트가 있을 땐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91번 멤버 중 일부와 케이, 아덴을 볼 땐 대놓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케이와 아덴이야 저런 표정에 눈 하나 꿈쩍 않는 강한 정신을 가졌지만 91번 멤버들은 꽤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많이 긴장했는지 연습 때만 해도 잘하던 동선과 안무가 꼬였고, 심지어 가사와 본인 파트조차 까먹은 멤버가 나올 정도였다.
“잠깐.”
결국 심사위원 중 보컬 트레이너 지소희가 곡을 멈춰 세웠다. 곡이 뚝 끊기고 멤버들은 당황한 채 주섬주섬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의 눈빛이 몹시 날카로웠다.
“곡 끊어서 미안하긴 한데요. 혹시 너희 1절도 못 익히고 왔니?”
“아…니요. 다 외웠는데…….”
대답하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러자 아이돌 출신 솔로가수 찬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전혀 외운 것 같지 않은데요? 틀려도 너무 많이 틀리잖아요. 음, 이건 긴장했다는 걸로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아요.”
하아. 지소희의 답답한 한숨 소리가 작은 심사장에 크게 울려 퍼졌다. 연습생들은 어쩔 줄 몰라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서도화 또한 타는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숙였을 때 이번엔 도로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분들 말씀대로 이건 너무 미완성이네. 2절은 볼 필요도 없겠다.”
2절은 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너네 이길 생각 있어? 다른 그룹은 그래도 1절은 제대로 외워왔는데. 순위도 높은 애들이 이게 뭐 하는 거야? 안무야 그렇다 쳐도 이 파트들 너희가 직접 나눠온 거 아니야?”
“맞습니다…….”
“그럼 가사나 멜로디는 제대로 외워야지. 특히 케이, 손지, 아덴, 보현이.”
“네…….”
잘 들리지도 않는 작은 대답 소리에 도로시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너희 연습 정말 많이 해야겠다.”
“여유도 없고 가사도, 안무도 못 하는데 표정들은 엉망이고. 멤버들끼리 합도 안 맞고. 그러고 무대 위에 올라갈 수 있겠어?”
심사위원들의 냉철한 지적들이 이어졌다. 그중 집중적으로 지적받은 멤버가 56번의 케이와 아덴, 91번의 손지와 보현이었다.
특히 케이는 비주얼만 좋지 보컬과 춤 실력 모두 꽝이라며 일반인이었으면 울면서 뛰쳐나갈 만큼 모진 말을 들었다.
천하의 케이도 몹시 자존심 상했는지 무척 상심한 표정이었다.
“하아. 기대했는데.”
심사위원들은 한숨을 퍽퍽 쉬며 무기력하게 가사를 뒤적거리더니 자신들끼리 무언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2절은 듣지도 않았으니 유지, 1절이라도 파트 배분을 새로 하려는 모양이었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 속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흘러갔다. 정말 대차게 말아먹은 심사라서 1절부터 많은 파트가 바뀌었을 듯했다.
잠시 후 의논을 마친 심사위원이 말했다.
“일단 도입부.”
도입부 이야기가 나오자 오현민의 표정이 싹 굳었다. 그가 도입부를 불렀을 때 심사위원들의 반응이 무척 좋았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유지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의 파트 뒤 서도화의 파트에서 심사위원들의 흥미가 배로 뛰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뻔뻔하게 욕심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변이 없는 한 빼앗길 것이 자명했다.
“도입부 현민이 너무 잘 불렀는데 바로 뒤 파트 도화가 너무 임팩트가 커서 이 곡의 하이라이트가 묻히는 감이 있거든?”
완벽하게 도입부를 부른 오현민, 그리고 91번의 실수는 바로 뒤 파트를 서도화가 부르도록 내버려 뒀다는 것이었다.
‘건반’의 하이라이트는 도입부다. 이때 소름을 확 돋구며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바로 뒤에 노래를 부른 서도화가 그보다 더 임팩트 있게 제 소절을 소화하는 바람에 곡의 하이라이트가 완전히 묻혀버렸다.
그리고 그건 이 곡의 매력이 완전히 반감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쉽지만 도입부 파트는 도화, 현민이는 원래 도화가 불렀던 뒷 파트로 두 사람 파트 교체할게요.”
1차 심사 만에 파트가 교체되었다. 단 한 번 유지조차 못 하고 파트를 뺏겼다. 오현민의 가지런히 모인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서도화가 데스티니 연습생이었던 시절부터 그가 몹시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도화는 메인보컬 감이면서 춤도 잘 추고 무대 센스도 좋은 다각형 연습생이니까 그의 소문을 오현민이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기 싸움을 해서 뺏어온 파트를 이렇게 간단히 뺏긴 것이 몹시 자존심 상했다. 오현민 또한 메인보컬이었기에.
반면 당연히 뺏어올 거로 생각한 서도화는 별 표정 없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야는 랩을 잘하는 앤데 왜 랩을 안 가져갔어?”
도로시가 의문스레 물었다. 낮고 정확하며 드라이한 발음으로 데스티니에 있을 때부터 노래보단 랩을 주로 담당했던 한야가 이번엔 랩보다 보컬 파트를 주로 맡았다.
데스티니에서부터 함께 하던 도로시는 그걸 알고 있었다.
도로시가 한야의 프로필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프로필에도 랩, 서브 보컬이라고 적혀 있네. 왜 랩 파트 안 가져가고 보컬만 가져갔어?”
“아, 저희 팀에 랩 잘하시는 분이 계셔서요.”
“야! 너도 잘해 인마!”
도로시가 크게 소리쳤다. 91번의 래퍼가 랩을 통으로 욕심내길래 한야는 어차피 뺏어올 수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으로 양보했다. 그의 도발과 매 파트마다 기 싸움을 해대려 하는 데에 지쳐서 그랬기도 했다.
그게 도로시는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이러면 안 되지! 한야 너는 대중들한테 널 어필할 생각이 없어? 의욕이 없는 거야 뭐야. 잘하는 걸 해야지. 난 못하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욕심 안 내고 의욕 없는 게 더 별로야.”
“죄송합니다.”
“랩 파트는 따로 손 안 볼 건데 수정은 하세요. 2차 심사까지 경수랑 한야가 알아서 말 맞춰서 파트 나누고 와.”
“네.”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조정이 들어갔다. 심사위원들은 파트 비중을 조절해가며 적당히 바꾸거나 수정해갔다.
아무래도… 새로 바뀐 파트와 안무를 외우는데 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할 듯했다.
이어지는 지적, 그러나 도입부를 뺏긴 오현민을 제외하곤 아직까지 크게 상처받을 만한 파트 수정은 없었다.
아덴도 많이 뺏기긴 했지만 대신 받은 파트도 좀 있었고.
‘꽤 무난한데?’
서도화가 말아먹은 심사 치곤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리고 케이 파트는 전부 뺄게요.”
“…….”
가위로 줄을 자르듯 분위기를 뚝 끊는 지소희의 단호한 말. 연습생들은 어떠한 반응도 못 한 채 그저 놀란 얼굴로 획 고개를 돌려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의 표정이 한층 더 안 좋아졌다. 케이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려다 김유진과 멤버들의 조언을 생각하곤 고개를 푹 숙였다.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지소희는 매정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케이 파트 재분배된 건 심사 끝나고 제작진 통해서 보낼 거고, 케이는 보컬, 댄스 2절까지 제대로 익혀서 오지 않으면 파트 없이 무대에 설 거야. 내 말 이해했어?”
케이 또한 이번만큼은 매우 놀랐는지 흔들리는 눈동자로 지소희를 바라보았다. 한야가 케이의 등을 감쌌다. 놀랐거나 억울하거나 화가 났어도 대답은 해야 한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제야 케이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네,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차 심사든 3차 심사든 케이가 한 파트라도 가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직 2절엔 파트 하나 있으니까 여기라도 잘 살려서 부르면 좋겠어.”
지소희는 이렇게 말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56번, 91번은 여기까지. 나가봐도 돼요.”
“감사합니다!”
1차 심사가 끝났다. 연습생들은 심사위원들에게 힘차게 인사하곤 심사장을 빠져나왔다. 완전히 망한 심사에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 연습생들이 연습실로 돌아가는 동안 주상현과 서도화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니지?’
‘그죠 형?’
몇 개월 같이했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대화가 됐다.
이래서는 너무 자존심 상해서 안 된다. 그것보다 이거 이대로 가다가는 저 잘난 비주얼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파트를 전부 뺏겨 잘생긴 병풍 엔딩이 날 것만 같았다.
‘무슨 수를 써야겠어.’
‘네, 형.’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곤 고개를 획 돌려 케이를 바라보았다. 기가 팍 죽은 케이를 한야가 성심성의껏 위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