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도와줘?”
서도화는 할 말을 잃었다. 이미 별명이 되어버린 음유시인이란 호칭 따위는 이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자식 요즘 왜 이러냐.’
도와달라니? 도와다오라니? 한때 세상을 정복하려는 야망을 품고 수많은 인간들을 학살했던 마왕이 지금 고작 노래 실력을 지적받은 것으로 기가 죽었다고?
“무, 물론이지. 당연히 도와야지.”
서도화는 잠시의 침묵을 무마하듯 서둘러 말했지만 당황한 표정은 차마 숨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비록 지금은 핵이고 뭐고 없는 이빨 빠진 호랑이일 뿐이지만 눈앞에 있던 놈은 한때 서도화를 숨도 못 쉬게 할 정도로 공포에 몰아넣었던 작자다.
저런 연약하고 유약한 표정으로 도와달라고 하는 마왕? 서도화는 모른다.
“……너 누구냐?”
서도화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묻자 케이는 인상을 푹 찌푸리더니 혀를 차며 대답했다.
“미친 건가? 빛의 대적자, 피와 악몽의 제왕, 케이클랍스의 지배자… 죄송합니다. 케이다.”
“어어, 케이 맞나? 어? 진짜?”
“……내가 계속 대답해야 하는지요?”
케이는 어이없어하며 바로 옆에 있는 한야에게 물었다. 그러자 한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화가 케이 기죽었을까 봐 장난치나 봐. 그래도 케이 말을 너무 거칠게 하면 안 돼.”
‘미쳤다는 말을 하면 안 돼.’
한야가 케이의 귀에 속삭이려 하자 케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귀를 손으로 막아버렸다.
“아, 알겠습니다.”
“그래, 아무튼 도화는 케이 보컬 연습 좀 도와주고. 오늘은 온종일 91번 분들이랑 연습할 거니까 나는 지한 씨랑 연습실 둘러보고 올게.”
“네.”
“편곡 확인도 해야 해서 좀 늦을 거야. 너희들은 먼저 숙소로 가 있어. 연습하고 있어도 되고.”
“넵!”
한야는 지한과 함께 편곡 확인 겸 빈 연습실을 둘러보러 갔고 남은 멤버들에겐 잠깐의 자유시간이 생겼다.
“하하, 저희 먼저 갈게요. 좀 있다 연습할 때 봐요.”
91번은 조용히 어색한 인사를 건네곤 어디론가 사라졌고 남은 네 명의 멤버들은 멍하니 강당에 서 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할 일도 없는데 뭐해요?”
주상현의 물음에 아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유시간이야? 그럼 난 산책할래. 연습해야 하니까 짧게 공기만 쐬고 바로 돌아올게.”
아덴의 말에 주상현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
“어, 그럼 저, 저도! 저도 같이 갈래요.”
이전부터 아덴과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었던 주상현은 무척 저돌적이었다. 아덴은 조금 놀랐는지 그를 빤히 쳐다보다 손짓했다.
“가자.”
아덴은 이곳에 온 이후로 자주 바깥을 보고 싶어 했다.
‘하긴 그런 세상에서 살았으니까.’
서도화가 그 세계에 떨어졌을 때부터 온전한 숲은 찾기 힘들었다. 그저 검은 연기, 불탄 나무와 사라진 숲, 후반부엔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운 독기가 가득했던 세상.
마왕이 사라진 지금, 제2세계는 조금 나아졌을까?
아덴의 말로는 예전 그 세상도 이곳처럼 푸른 나무가 가득했다고 하니 아덴은 고향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가진 이 장소가 무척 좋은 듯했다.
서도화가 케이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왕인 케이 또한 이곳에 도착한 직후 바깥을 신기하게 쳐다보았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세계를 그리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이었는데, 그 마왕 또한 독기 하나 없는 푸른 세상을 신기해하다니.
“너도 다녀올래?”
마왕과 단둘이 같이 있기 껄끄러웠던 서도화가 선심 쓰는 척 물었다. 그러자 마왕은 서도화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난 되었다. 그보다 나를 도와준다고 했지?”
“그, 그렇지?”
서도화가 은근슬쩍 케이의 시선을 피했다.
“도와줘야지. 뭘 도와주면 돼?”
“감히 내 것을 하찮은 이들에게 빼앗길 순 없지. 그래서…… 파트를 가지고 싶은데. 가능한가?”
“가능…… 쓰읍, 하아.”
서도화는 대답하기 힘든지 한참 고민하다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 사람과 한 마리의 마왕 사이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애써 착한 대화를 나누려 하니 오늘 처음 만난 친구의 친구와 단둘이 마주 보는 게 차라리 덜 껄끄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 가능할걸?”
도와주기는 싫은데 도와주기는 해야 하는 이상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래, 쭉정이……. 얘는 우리 편, 지금은 우리 쭉정이…….
케이파이브도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스스로 협조한다는데 도와줘야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카메라 앞에서 할 의욕이라도 보여서 다행이라고 합리화하는 서도화였다. 서도화는 마음먹은 듯 고개를 끄덕이곤 케이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가자. 연습하자 우린.”
그 순간 케이의 눈이 아주 잠깐 반짝였음을 서도화는 보지 못했다.
* * *
두 사람이 향한 곳은 56번의 방이었다. 서도화와 케이는 각자 맞은편 침대에 떨어져 앉은 채 가사지를 읽는 척하며 카메라를 뚫고 느껴질 어색함을 무마시켰다.
이게 무슨 일이람.
서도화는 그 세계에서도 이곳에 돌아와서도 마왕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단둘이 있을 만한 일을 만들지 않았다. 다행히도 유제이의 연습생들은 개인보단 단체로 움직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아 그런 상황을 피해 다니기는 몹시 쉬웠다.
‘그랬었는데…….’
하필 카메라 앞에서 단둘이 남게 될 줄이야.
이 어색한 공기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가사지의 끝을 만지작거리며 슬퍼하던 서도화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예전부터 말주변 없다는 소리를 꽤 들었지만 그건 아덴과 함께 모험을 하며 많이 나아졌다.
지랄 맞게 여기저기 시비 걸고 다니는 아덴을 대신해 숙소를 잡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정보를 얻으며 터득한 사회성 덕분이었다.
그에 반해 케이는 말주변이 없는 서도화보다, 용사치곤 반사회적 기질이 있는 아덴보다, 심지어 갓 태어난 강아지, 고양이보다 더 사회화가 덜 된 놈이 아닌가.
적어도 카메라에 비치는 두 사람은 같은 그룹 멤버로서 어색해 보이면 안 되었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사회성 있는 서도화가 대화를 이끌어나가야만 했다.
서도화는 가사지에서 겨우 시선을 떼 꼴 보기 싫은 케이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일단, 노래 한번 불러볼래?”
그러자 마침 어색함을 느끼고 있던 케이가 화들짝 놀라며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서도화도 움찔거리며 케이와 눈을 마주쳤다.
완벽한 어색함이었다.
케이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음유시인의 시선에 슬그머니 가사지로 시선을 옮겼다.
‘협조, 머무르는 것에 대한 대가, 목숨을 보전하는 것에 대한 조건.’
인간은 싫고, 눈앞의 기분 나쁜 음유시인은 더 싫지만 협조하기로 했고, 무엇보다 음유시인과 마주하고 있는 것보다 이곳에 온 뒤로 자신이 하등한 존재보다 뒤처지고 있음을 견딜 수가 없다.
힘을 키워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 케이클랍스를 재건하기 위해, 또 머무르는 이곳의 인간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음유시인에게 고개 숙일 것이다.
‘굴욕은 순간에 불과할 뿐.’
생각을 마친 마왕은 더듬더듬 창피함을 목소리에 담은 채 비장하게 말했다.
“춤도 춰야 하나?!”
“어? 춤?”
서도화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비장한 케이의 모습에 당황하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추면서 하면 좋지? 좁은데, 할 수 있겠어?”
아마 이 자리에 아덴이 있더라면 안 어울리는 짓 그만하고 그냥 한야에게 맡기라며 서도화를 내보내 버렸을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럼 춤추면서 해봐. 네 파트만 불러도 되고, 후렴구까지 불러도 되고.”
서도화는 최대한 살가운 표정과 말투로 케이를 대했다. 서도화가 완전히 침대 안으로 들어가 조금 더 자리를 넓혀주자 케이는 지가 춤추겠다 해놓곤 왜인지 분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섰다.
“그럼 하겠다.”
“어, 그래 해라.”
서도화의 앞에서 케이가 무반주로 춤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지쳐버린 표정 마치이…….”
“…….”
서도화는 이 상황이 꽤 참기 힘들었다. 아니 애초에 눈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저게 케이가 아니고 한야나 주상현이었더라도 1대1로 멤버의 무반주 공연을 관람하는 것 자체가 무척 뻘쭘했을 것이다.
“나를 포기한 듯하안 그으…….”
차라리 부끄러워하지를 말던가.
표정 하나 없이 상당히 창피한 듯 맥없이 늘어지는 케이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서도화는 반사적으로 저도 모르게 침대 가장 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가사지로 얼굴의 반을 가려버렸다.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인 건 케이의 파트가 딱 한 소절뿐이라는 것이었다.
케이는 자신의 파트만 딱 부르고 움직임을 뚝 멈췄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만 얼굴만 쪽팔림에 빨갛게 물들인 채 말했다.
“다했다.”
“……쓰읍, 어어. 잘 봤어.”
서도화가 천천히 침대를 기어 나왔다. 이 상황 카메라로는 어떻게 보일까. 과연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일까.
부디 옹기종기 화기애애하게 보였으면 좋겠다.
서도화는 민망한 나머지 도망칠 뻔했던 방금을 생각하며 구겨진 가사지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폈다.
일단 돕기로 한 건 돕자.
“일단 음, 표정에 너무 감정이 없고 또 목소리에도 힘이 없어.”
“감정이 없고 힘이 없다?”
케이가 다시 침대에 앉았다.
“이제 음은 잘 맞거든? 테크닉은 없어도 자신감 있게 부르면 괜찮을 거 같은데.”
서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케이의 파트를 흥얼거리려다 멈췄다. 케이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자제하기로 했다.
대신 따라 하라는 듯 목소리를 힘있게 냈다.
“이런 식으로. 복부에 힘 딱 주고, 단전에서 목소리를 내, 지금은 뭔가 노래 부를 때 살짝 흐리멍덩한 것 같아.”
“그렇군.”
“그 김에 춤에도 힘 좀 더 줘보는 건 어떨까?”
“춤에도 노래에도 힘을 주고 자신감 있게. 음은 괜찮다는 것이지?”
“응.”
케이가 벌떡 일어났다.
“한번 해보겠다.”
“……뭐?”
그냥 앉아서 불러도 될 텐데. 라고 말하기도 전에 케이는 다시 힘차게 무반주로 춤과 노래를 시작했다.
“오 마-”
이 갓. 정말 환장하겠다.
한번 해봤다고 이젠 부끄럼도 없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서도화의 몸은 튕기듯 도로 침대 구석으로 향했다.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누군가 무반주로 춤추고 노래하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걸 꼼짝없이 봐야 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게 세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던 그 마왕이라면?
서도화는 답을 알 수 없어 침대를 더듬거리며 가사가 적힌 종이를 집어 들어 일단 다시 얼굴을 가렸다.
“지쳐버린 표정 마치!”
“…….”
“나를 포기한 듯한! 그!”
케이는 서도화의 심정도 모르고 그가 말했던 대로 힘차게 노래 부르고 춤췄다.
그렇게 서로 민망한 상황을 견디며 마왕을 보던 서도화가 또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돕자. 도와야 산다. 91번한테 파트 하나 못 가져오는 꼴은 못 보니까……. 쟤도 살아보겠다고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서도화가 얼굴을 가린 종이를 치웠다.
“이번엔 역으로 너무 힘이 들어갔-”
그리고 나름 정성껏 피드백을 하려던 찰나 벌컥 문이 열리고 산책을 끝낸 아덴과 주상현이 방으로 들어왔다.
“……!”
케이가 우뚝, 갑자기 고장 난 로봇처럼 동작을 멈췄다.
서도화는 상체를 뒤로 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주상현은 당황한 듯 입을 떡 벌린 채였고 아덴은 대놓고 케이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이 상황.
좁디좁은 방안에서 음유시인의 앞에 마왕이 재롱을 떨며 춤사위를 보이고 있다. 그것도 무반주로.
누가 봐도 상당히 민망할 법한 광경인데 하필이면 그걸 아덴과 주상현이 봐버렸다.
“어 이, 이건……!”
케이의 동공이 요동쳤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안에서 공간 가득 울려 퍼지는 소리.
“……푸흡.”
아덴의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