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서도화는 살아생전 마왕이 저렇게 쪽팔려 하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롱을 듣고 있는 케이.
당연하게도 그를 조롱하는 건 마왕의 영원한 적 용사 아덴이었다.
“푸… 흡… 케이…. 노래… 잘하네헥….! 춤만… 잘, 추는… 큽…. 풉… 줄…. 알았더니힉! 흐학! 대박……!”
미친놈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웃어가며 최선을 다해 정성스럽게 놀리고 있었다.
마왕도 저렇게 놀리진 않겠다.
“아유, 흡, 케이! 아학학! 연습이 하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같이 했을 텐데.”
서도화는 아덴이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 저렇게 즐거운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았다. 그리고 케이에게 저렇게 살갑게 구는 것도 처음 보았다.
아덴이 신나서 말할수록 케이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아, 아니다.”
“아니긴! 도화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있었어? 같이 하면 좋았잖아! 같이 할까?”
“다, 닥쳐라!”
서도화는 침대 구석탱이에 낑긴 채 두 사람의 모습을 떨떠름하게 지켜보았다. 그의 한쪽 입술이 삐죽였다.
아주 케이 놀리기에 신났다. 서도화는 아직도 케이의 춤사위와 미숙한 노래를 눈앞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봤다는 것에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데. 지는 좋댄다.
“뭐, 도화 앞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면 돼? 같이 할까!”
아덴은 씨익 얄밉게 웃고는 서도화의 앞에서 춤을 췄다. 서도화의 얼굴은 다시 가사 적힌 종이로 가려졌다.
주상현이 상체를 굽혀 1층 침대 구석에 박힌 서도화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왜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 있어요?”
“어? 나, 난 여기가 편해…….”
“1층 침대가 편하긴 편하죠.”
그것보다 서도화는 그저 아덴과 케이, 두 사람의 코앞 춤사위와 멀어지고 싶었을 뿐이다. 주상현은 서도화를 빤히 바라보더니 침대 안으로 기어와 그의 옆에 앉았다.
“일단 그럼 저도 보는 역할 할게요. 한야 형 올 때까지 우리 여기서 연습해요. 길 엇갈리면 안 되니까.”
좁아도 둘이서 설렁설렁 안무와 노래를 맞춰보는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애초에 이 생쇼는 안무보단 케이의 보컬 실력을 늘려 노래 파트를 뺏어오기 위한 쇼니까. 안무야 건성으로 해도 상관없었다.
서도화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고 슬금슬금 구석에서 나왔다.
“좋아. 그럼 한야 형 올 때까지. 한번 해보자.”
멤버들이 들어옴으로 인해 케이에 대한 어색함이 사라진 서도화의 눈빛은 한층 진지해졌다.
“케이, 아까 말했지? 자신감 있게.”
“알겠다.”
파트를 뺏을 기회는 이제 단 한 번밖에 없다. 이젠 정말로 절박하게 한 파트라도 붙들고자 노력해야 할 때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했는데 끝까지 파트 하나 못 가져온다면 케이는 비주얼뿐인 멤버라고 욕은 욕대로 먹고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상하니까.
“좀 더 느낌 살려서. 너무 목이 굳었어.”
그래서 서도화는 케이를 위한 짧고 굵은 레슨을 시작했다. 어느새 케이의 파트 뺏기에 진심이 되어가는 케이와 서도화, 그리고 멤버들이었다.
* * *
한야는 한참 뒤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마땅히 빈 연습실도 없을뿐더러 편곡 회의가 오래 걸린 탓이었다.
“그래도 한 군데 맡아두긴 했어. 그런데 뭐 하고 있었어?”
한야가 상황을 보고하며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이 아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다른 연습생들과는 달리 이 좁은 방안에 멤버 모두가 모여선, 케이와 아덴이 나란히 서서 침대에 앉아 있는 도화와 상현이를 향해 두 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고 있었다.
마치 위협하는 레서판다 두 마리를 보는 듯했다.
뭐 하는 걸까? 또 싸우고 있는 걸까, 장난치고 있던 걸까. 아니면 장기자랑?
이들과 함께 산 지 꽤 되었지만 이건 또 처음 보는 꼴이었다.
케이의 인상이 한층 더 구겨졌다. 한야의 순수히 궁금해하는 모습에 어째 얼굴이 더 붉어진 것도 같았다.
서도화가 대답했다.
“연습하고 있었어요.”
“여기서? 안 좁았어?”
“보컬 위주로 연습해서 괜찮았어요, 다른 곳에서 하면 형이랑 엇갈릴까 봐.”
“그렇구나. 연습했다니 기특하네. 그럼 가자.”
서도화와 멤버들은 한야와 지한이 맡아두었다는 연습실로 향했다.
그리고 빈 연습실에서 늦게나마 91번과의 합동 연습을 했다.
“진짜로 약간씩 안무 디테일이 다른 것 같아요. 뭐가 다르지? 높이가 다른 건가?”
“높이랑 팔 드는 각도나 타이밍도 그룹별로 다른 것 같아요. 진즉에 같이 연습해야 했는데. 따로 연습한 티 진짜 엄청나게 나는구나.”
심사위원들의 지적을 신경 쓰며 연습하니 확실히 56번과 91번의 안무, 동선에 미미한 차이가 있었다. 그게 인원수가 많은 만큼 공연을 무척 어수선하고 허술하게 보이게 했다.
마지막 심사 전까지 이를 맞추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두 그룹은 휴식 시간도 없이 연습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어제 하루종일 연습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어수선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안무는 이제 완벽했다. 실수 하나 없었다.
아덴과 케이가 안무를 이렇게 빨리 외운 적이 있던가. 역시 용사와 마왕은 적 앞에서 가장 강해지는 법이다.
거기다 서도화의 짧은 레슨이 꽤 많이 도움이 되었던 건지 마왕의 유일한 노래 소절도 상당히 좋아졌다. 단 한 파트 뿐이지만 그 파트라도 이 정도면 무난함을 넘어 무척 잘 부르는 소절에 이르렀다.
한 파트 한정일 뿐이지만.
서도화가 부담스러움을 참고 가르치고 마왕이 자존심을 굽힌 보람이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한 파트 정도는 뺏어올 수 있을지도?‘
케이는 단 한 파트라도 빼앗긴 파트를 다시 뺏어 오고 싶어 했다. 제2세계에선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었던 마왕이 이제는 꽤나 절박해 보였다.
그저 한 파트에 불과했지만, 마왕에게 있어서 이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더이상 누구에게라도,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그러나 기가 팍 죽은 케이에게도 하나 희망은 있었다.
한 차례 연습이 끝나고 휴식 시간, 멤버들이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메마른 목을 축일 때 한야가 말했다.
“이제 댄스 브레이크 안무 익혀야 하는데, 도화야. 노트북 좀 가지고 와줄래?”
91번 그룹 멤버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갔다. 반면 서도화와 멤버들은 한층 여유로워졌다.
“네.”
서도화는 드물게 빠릿한 움직임으로 노트북을 가지고 왔다. 멤버들끼리 회의한 컨셉을 토대로 안무가들이 댄스브레이크 안무를 만들어 보내주었다.
마침내 나온 댄스브레이크, 56번과 91번의 컨셉인 아크로바틱과 격렬한 댄스가 적절히 섞인 매우 난이도 있는 안무였다.
이걸 지금부터 멤버들끼리 연습하며 조금씩 적절하게 수정하고 배분하며 익혀가야 한다.
안무를 보던 서도화의 인상이 오랜만에 펴졌다. 전부 백텀블링으로 대체된 아크로바틱이 꽤 분량이 많았다.
또한 무척 비중 높게 다뤄지고 있었다.
서도화가 씨익 웃었다. 안무 영상 속 백텀블링을 하는 저 댄서들이 전부 아덴과 케이로 보였다. 상대적으로 적었던 아덴과 케이의 분량을 여기서 모조리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혹여나 91번에게 뺏길 걱정 따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하늘을 거의 날아다니면서 치열하게 싸웠던 두 사람을 공중묘기로 이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서커스 단원쯤 되면 또 몰라.’
“안무 괜찮게 뽑혔네요.”
한야는 그렇게 말하며 91번의 리더와 빠르게 파트 배분 상의를 했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빠르게 나누고 나머지는 3차 심사에서 조정되는 편이 나았다.
“아크로바틱 하실 수 있으신 분?”
한야의 물음에 91번 그룹 멤버 중 손지를 포함한 세 명이 손을 들었다. 56번 그룹은 한야를 제외한 모두가 손을 들었다.
역시 처음부터 수준급의 아크로바틱을 들고온 56번다운 참여 수였다.
“그럼 아크로바틱 하는 부분은 이 멤버들로 채우고 메인 댄서인 상현이랑 손지 씨 중심으로 대형을 분담하죠.”
“좋습니다. 그럼 일단 안무부터 뜰까요? 이것도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래요.”
주상현과 손지가 주도하여 멤버들은 댄스브레이크 안무를 외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안무 숙지에 애를 먹던 아덴과 케이는 반대로 댄스 브레이크는 능숙하게 외울 수 있었다.
심지어 꽤 잘한다. 느낌을 무척 잘 살린다.
엇박이 많고 느낌을 중시하는 재즈풍 안무보다 정박으로 들어간 댄스브레이크, 아크로바틱이 잔뜩 들어간 안무가 평소 이들이 유제이에서 연습하던 스타일과 딱 맞았기 때문이다.
댄스 브레이크가 이들에게 익숙한 방향으로 제작된 건 전부 한야가 회의에서 사람들을 구슬린 덕분이었다.
“한 바퀴 돌고 따다다! 여기서 아크로바틱!”
손지가 아덴과 케이를 가리켰다.
“일단 여기선 가장 사이드에 있는 두 분이 먼저 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덴이 물었다.
“얼마나 뛰어요?”
“얼마나요?”
손지는 무슨 질문이 그렇냐는 듯 그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말했다.
“최대한 임팩트 있어야 하니까 최대한 높이, 그리고 세게 뛰어야 할걸요? 이거 물어보시는 거 맞죠?”
“세게, 높이.”
“기분전환 겸 가볍게.”
손지의 말을 되뇌는 아덴의 말 뒤로 서도화의 말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기분전환?’
이건 또 뭔 뚱딴지같고 재수 없는 소리인가. 91번 멤버들이 인상을 구기며 서도화를 쳐다보았지만 서도화는 굴하지 않고 아덴을 보았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내 말 뭔 말인지 알지?’
서도화가 눈빛으로 말하자 아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말해주지 않으면 저 녀석 때마침 꺾을 적도 있겠다 진짜 말도 안 되는 묘기를 보여줄 것이므로.
“체력 분배도 해야 하니까 텐션 띄울 정도로 뛸게요.”
“네, 그럼 뛰시고-”
아덴이 가볍게 뛰어올랐다. 손지와 멤버들의 고개가 그의 몸짓을 따라 들렸다. ……좀 많이 올라간다?
‘원래도 높이 뛴다고 생각했지만.’
손지가 이 높은 천장을 찍고 돌아올 기세로 높이 올라간 아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실제로 보니 무지막지했다.
그에 반해 서도화의 눈은 아덴이 높이 올라갈수록 짜게 식었다.
‘아 저놈 저거 또 잘난 척이네.’
용사는 자신의 먼치킨스러움을 자랑하기 좋아한다. 가볍게 뛰라니까 지랄하고 앉았다.
그러자 반대쪽 끝에서 아덴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케이도 말했다.
“비슷하게 뛰면 되는가요?”
아덴의 묘기에 놀란 멤버들은 그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케이는 대답 따위 상관없다는 듯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곤 뛰어올랐다.
“뛰지요.”
입이 떡 벌어진 채 아덴을 보던 멤버들의 시선이 케이에게로 획 돌아갔다.
“이, 이게…….”
그러자 주상현이 뿌듯하게 웃으며 깍쟁이처럼 91번을 흘기고 먼저 땅에 착지한 아덴에게 달라붙었다.
“형! 오늘도 진짜 멋졌어요!”
“별거 아니야.”
그 사이 한야가 지한에게 흐뭇하게 말했다.
“저희 그룹의 자랑들이죠.”
저들은 분명히 어느 면에선 실력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그룹의 멤버이자, 자신 있게 이 경연에 데리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장점이 있는 이들이었다.
결코, 91번이 함부로 무시하고 업신여길 이들은 아니었다.
도대체 이게 뭐야. 이게 말이 돼?
벙찐 91번 그룹과 촬영하던 제작진들, 그들을 향해 서도화가 서둘러 말했다.
“그 해외에서 파쿠르, 그리고 서커스, 아니 뭐, 이것저것 많이 했대요. 정말 잘하죠? 하하하!”
재주는 두 녀석이 부리고 해명은 서도화가 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