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부터 시작하는 아이돌 생활-56화 (56/270)

제56화

서도화는 테라스 밖 케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첫째 날 멤버들이 연습했던 곳에서 홀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이 벙긋거리는 걸 보면 작게나마 노래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딴엔 멤버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새벽에 몰래 나와 연습을 한 것 같은데 테라스에선 실내 방송이 잘 들리지 않는다.

기상 방송을 못 들어 멤버들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을 거다.

들어가서 도와줘야 하나? 아니면 남들 모르게라도 연습한 걸 기특하게 여겨 원하는 대로 모르는 척해줘야 하나.

통유리 창 하나를 두고 대놓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얼마나 연습에 집중하고 있는 건지 저 좋은 귀를 가지고도 서도화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좀 지켜보지 뭐.‘

열심히 하는데 굳이 들어가서 방해할 필요는 없지. 케이도 혼자서 연습하며 스스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볼 시간은 필요할 테니까.

서도화는 조금 떨어져 케이가 그를 볼 수 없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멀찍이서 그를 지켜보았다.

“와, 그새 꽤 늘었어.”

멤버들의 특훈과 케이의 연습은 다행히 매우 효과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였던 노래는 들리지 않았지만 안무만은 이제 지적할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노래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어제보다 발전했다면 정말 이번엔 파트 뺏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도화 형, 케이 형 여기 있- 어?”

서도화를 발견하고 달려오던 주상현이 우뚝 멈춰 섰다. 케이를 발견한 주상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케이 형 혼자 연습하는 거예요?”

“그렇던데? 새벽부터 연습했나 봐.”

“왜 혼자…. 나 깨우지.”

주상현이 케이에게로 향하려는 걸 서도화가 붙잡았다.

“왜요?”

“지금은 가지 마.”

지금 멤버가 저곳에 가면 케이는 창피함에 바로 연습을 멈춰버릴 거다. 서도화는 느긋하게 가까운 의자에 앉아 본격적으로 케이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제 옆을 손으로 두드려 주상현에게 앉으라 신호를 보냈다.

밥 먹을 때쯤 부르면 되겠지 뭐.

주상현은 케이와 여유로운 서도화를 번갈아 보다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케이 형 이제 안무는 손댈 곳이 없네요. 추가된 댄스 브레이크도 그렇고.”

“그래, 이제 지적받을 정도는 아니지.”

체력이 약하고 춤을 춰본 경험이 없어 다른 멤버들처럼 하루 만에 안무를 익히지는 못한다. 그러나 본인이 하고자 하면 짧은 시간 내에 무엇이든 최선의 결과물을 가져올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인간이었던 그는 마왕이 되었으니까.

주상현이 서도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케이 형이랑 친한 거 맞네요. 형.”

“어? 뭐라고?”

되묻는 서도화에게 주상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굳이 했던 말을 반복하면 서도화는 방금까지 케이를 보던 눈빛을 싹 지우고 아니라며 정색할 것이다.

적어도 주상현이 본 서도화의 눈빛은 케이를 무척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주상현이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 씁쓸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멤버들 간 진심 어린 배려와 흐뭇해하는 표정을 본 지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그룹 유니드가 활동을 끝낸 뒤로 그는 소속감과 멤버들 간 으쌰으쌰하며 함께 성장하는 동료애나 우정을 느낀 지 한참이 되었다.

처음 이 그룹이 결성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다시는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 없을 줄 알았다.

-아……. 우린 이제 연습 다 끝났는데? 미안한데 우리는 파트가 워낙 적어서 연습할 것도 없거든.

-너 혼자 연습하면 되겠네. 어차피 너 혼자 하는 그룹인데.

-연습실 비워줄 테니까 열심히 혼자 열심히 해봐.

-아 뭘 열심히 해봐야. 설렁설렁해도 돼. 넌 그렇게 해도 데뷔하잖아.

주상현이 유제이에 오기 전 정식 데뷔가 확정되고 그 많은 파트들이 공평하지 못하게 분배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주상현의 전 멤버였던, 이제는 91번 그룹으로 불리는 이들이 그렇게 말하며 연습실을 떠나갔다.

어떨 때는 대놓고 괴롭힐 때도 많았다. 비아냥과 따돌림이 손찌검에 이르기 직전이 되어서 결국 수천의 위약금을 물어내고 회사에서 도망친 주상현이었다.

그래서 이 개성 강하고 시도 때도 없이 싸우는 그룹은 더할 줄 알았다. 더구나 노래나 춤엔 흥미가 없는 멤버도 있었고 대형 기획사에서 쫓겨난 멤버도 있었고.

그래서, 오래 못 갈 그룹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건 주상현의 착각이었다.

56번의 멤버들은 적어도 함께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멤버의 성장을 흐뭇해할 줄 알았다.

주상현은 케이의 개인 연습과 이를 지켜보는 서도화의 모습이 무척 좋았다.

“형, 이번에는 우리 케이 형 꼭 파트 따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따내야지.”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따내야지 당연히. 지금까지 마왕 따위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케이만 아니었더라도 서도화의 다크서클이 반쯤 짧아졌을 것이다.

아니, 저놈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내가 제2세계로 불려가지도 않았을 텐데…. 저 개… 아니… 아니야. 정신 차리자 서도화.

이제 슬슬 아침 식사를 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 전에 케이의 보컬을 한 번 더 다듬어줄 생각이었다.

* * *

연습을 마친 세 멤버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앞엔 산책하고 온 아덴이 한야와 함께 줄 서 있었고 그는 서도화가 케이와 함께 돌아온 걸 발견하자 역시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다녀왔어?”

무슨 서도화가 용사 파티를 배신하고 마왕과 작당모의라도 하는 걸 본 듯한 얼굴이다.

서도화는 그의 표정을 못 본 척하며 대신 한야에게 말했다.

“형, 케이가 오늘 아침에 뭐 하고 있었는지 아세요?”

“뭐 하고 있었는데?”

“테라스에서 혼자 연습하고 있더라고요.”

그의 말에 한야와 아덴이 케이를 쳐다보았고 케이는 어쩐지 쑥스러워하며 힘차게 말했다.

“기본이다!”

“케이, 혼자서 연습했어? 몇 시부터 혼자 했어?”

한야는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고 케이는 기세등등했다.

“해가 뜨기 전 나왔습니다. 혼자 연습하니 집중이 잘 되더군요. 도화와 상현이가 와서 좀 봐주었는데 완벽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역시 저는 너무나 대단한 존재입니다.”

서도화는 이번만큼은 그의 과한 자화자찬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대신 맞장구 치며 칭찬을 계속했다.

“그럼 그럼, 너 정말 잘하더라. 보컬도 너무 안정적이라 더는 힘 안 줘도 되겠어.”

그리고 실제로도 칭찬할 만했다. 안무는 물론이고 보컬마저 상당히 늘어 깊고 정확한, 듣기 좋은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서도화를 많이 따라 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답이었다.

칭찬할 건 확실히 칭찬해야 다음에도 칭찬받고 싶어서 더 잘한다. 칭찬은 고래와 마왕도 춤추게 만드는 것이다.

서도화식 교육 방법이었다.

케이는 으쓱해져선 더욱 떠벌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할 수 있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역시 난 대단해!”

“그래. 맞아.”

“이제야 굴욕을 갚아줄 수 있겠군! 그래, 당하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법이지!”

“…누구한테 당했는데.”

자비로운 표정으로 칭찬을 이어가던 서도화가 점점 심드렁해졌다. 굳이 맞장구 안 쳐줘도 알아서 자신감 채우겠는데?

그만 칭찬하자.

“밥이나 먹자.”

서도화와 멤버들이 식판을 가지러 가기 위해 걸음을 계속했다. 그때 툭- 무언가에 서도화의 발이 걸렸다.

“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도화의 몸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도화 형!”

“도화.”

주상현이 놀라 소리쳤고 다행히도 서도화의 무릎이 바닥에 닿기 전에 아덴이 빠르게 붙잡아 넘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아아! 아야!”

넘어질 뻔한 건 서도화인데 앓는 소리는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왜 제 발을 걷어차고 그래요? 아파라. 하하, 저 춤 못 출 뻔했어요.”

아덴의 표정이 순식간에 안 좋아졌다. 91번 그룹의 메인댄서 손지였다. 손지는 농담처럼 말하며 제 멤버들이랑 키득거렸다.

서도화는 아릿한 제 발목, 멤버들의 표정, 키득거리는 91번을 차례대로 보더니 픽 웃었다. 그러자 손지의 미소가 살며시 굳었다. 서도화는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 네 죄송합니다.”

비록 지가 떡하니 테이블 밖으로 다리를 내놓아서 사고가 난 것이고, 꼭 아덴의 열받은 표정을 보지 않더라도 누가 봐도 일부러였지만, 아무튼 서도화가 미처 못 보고 지나쳤으면 죄송해야지 어쩌겠는가.

“제가 못 보고 걸려 넘어질 뻔했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주상현을 괴롭혀 결국 내보냈다고 하길래 뭐 얼마나 획기적으로 괴롭혔나 했는데 고작 카메라 사각지대에서 발 걸어 넘어트리는 수준인가?

용사 파티가 숱하게 박살 냈던 술집 건달들과 비슷한 수준인데?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지 잘못 걸렸다간 중요한 심사를 앞두고 다칠 뻔했다.

하지만 서도화는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쳤다.

아까 케이가 뭐라고 했던가?

당한 건 돌려줘야 한다고 했었다. 이하동문이다.

서도화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지자 굳은 얼굴로 그를 따르던 아덴도 곧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스멀스멀 악동과 같은 미소를 띄웠다.

* * *

저녁 7시, 연습생들의 마지막 심사가 시작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도화는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세 번째로 마주하는 심사위원들은 마지막쯤 되자 기대보다는 지루함이 더 커진 듯했다.

세 번의 피드백과 파트 변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연습생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따로 없으니 지칠 만도 했다.

지소희는 별 기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56번이랑 91번은 저번에 보컬 파트보단 안무 대형이 많이 바뀌었었죠?”

“네, 그렇습니다.”

“연습 많이 했어요?”

“네!”

멤버들의 힘찬 대답에도 지소희를 포함한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56번과 91번이 실력이 없는 팀은 절대 아니었다.

탈락 후보군엔 들어가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팀과 비교하면 높은 순위는 당연히 받을 만큼 실력도 구성도 나쁘지 않았다.

더구나 연습량은 압도적이다. 모두가 자고 있을 때 연습하고 새벽에 혼자라도 나와 연습하고 방에서도 연습하고.

분량은 알아서 뽑으라고 설치해 놓은 놀이 시설을 제작진들의 의도를 따라 쉬는 시간에 가지고 놀던 다른 팀과는 달리 이들은 정말 주구장창 연습만 했다.

물론 재밌는 장면은 다른 팀보다 적었지만 그만큼 경연에 진심이라는 태도는 충분히 돋보였던 나날이었다.

실력도 좋고 노력도 하고 순위도 틀림없이 좋을 것인데 그럼에도 심사위원들의 평이 대체로 혹독하고 냉정한 건 아쉽기 때문이었다.

더 잘 할 수 있는데 짧은 시간 내에 안무 숙지를 덜하고 온 게 무척 아쉬웠다. 몇몇 멤버들의 부족한 실력이 너무 거슬렸던 것도 크고.

안무 숙지를 완료하고 오자 이번에는 팀의 합이 안 맞는 게 특히 안타까웠다. 팀을 이룬 그룹들 중 가장 경쟁 구도를 갖춘 팀이라고 하던데 서로 견제하느라 합이 안 맞는 건 결코 멋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모처럼 드라마틱하게 살아남은 소형 기획사 연습생들인데, 아끼던 제자들이 있는 그룹인데 욕심껏 더 잘하라는 뜻에서 멤버들의 자신만만한 대답에도 심사위원들은 표정을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흠, 그럼 한번 볼까?”

도로시가 서류를 펼치며 말했다. 3차 심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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