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지쳐버린 표정 마치
나를 포기한 듯한 그 눈빛
내가 싫어졌을 수도 있지만
괜찮아요 괘념치 말고 안녕
케이는 실수 없이 자신의 파트를 끝마쳤다. 서도화는 안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조언했던 대로 자신감 있는 노래 소리, 정확한 음과 발음으로 실수 없이 잘 끝냈다.
화려한 테크닉은 없었지만 거슬림 없이 매끄럽게 넘어가는 노래, 이 정도면 아주 짧은 사이 케이가 크나큰 발전이 있었음을 충분히 보여준 거나 다름없다.
서도화는 심사위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서도화뿐만 아니라 한야, 주상현, 아덴 또한 안무를 이어나가며 심사위원들을 힐끔거렸다.
역시나 심사위원들도 케이의 성장을 눈치채곤 그 어느 때보다 케이에게 누그러진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많이 늘었네.”
“연습 많이 했나 보다.”
“그래, 이렇게 자신감 있게 해야지.”
되었구나. 심사위원들의 작은 목소리를 들은 케이는 한결 편안해진 채 몸을 계속 움직였다. 아직 협조 중인 일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 정도 반응이면 가장 큰 시련 하나는 넘김 셈이었다.
물론 저 상석에 앉아있는 네 명의 인간들은 언제나 예상을 벗어난 비난을 하는 이들이라 안심할 수는 없다만.
케이의 파트 이후론 곡의 모든 부분들이 안정적이었다.
처음엔 날카롭던 심사위원들의 눈빛도 곡이 끝날 때쯤엔 흐뭇함과 기특함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만큼 56번과 91번의 성장은 짧은 기간임에도 누구보다 드라마틱했다.
열심히 하는 연습생들을 심사위원들이 기특해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시종일관 그들을 뜯어보듯 인상을 쓰고 있던 지소희의 입가에도 겨우 미소가 맺혔다.
이번 3차 심사는 연습생 모두가 만족스러운 공연을 보였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케이의 성장이 무척 눈에 띄였다.
“네,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준비한 공연이 전부 끝나고 연습생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렬로 섰다. 비록 3일간의 연습 결과는 아직까지도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지금까지 어떤 날도 이렇게 단기간에 이 정도로 퀄리티를 끌어올린 적은 없었다.
모두 마지막이니만큼 조금이라도 자신의 그룹에게 많은 파트가 주어지길 바라며 열심히 한 덕분이었다.
도로시는 멤버들이 자세를 바로잡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진짜 많이 늘었다!”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연습생들이 뒤늦게 허리를 숙이며 힘차게 인사했다. 1차, 2차 심사를 진행하는 동안 칭찬다운 칭찬을 한 번도 받은 적 없기에 무척 놀랐다.
“안무는 완벽했어요. 합 맞춰 오라는 숙제를 하루 만에 아주 잘 해냈어.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경연 때쯤엔 충분히 높은 순위를 노려볼 법한 무대를 보여줄 거라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연습생들의 허리가 다시 숙어졌다. 그러나 극찬에 연습생들 사이 안도의 미소가 돌기도 전 도로시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고칠 점은 있어요. 아직까지는 와 정말 너무 잘했다! 이 정도는 아니야.”
도로시는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을 집어서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손지, 그룹에서 춤 제일 잘 추는 멤버가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 어떻게 해.”
“예?”
“상현이랑 같이 두니까 눈에 잘 안 보인다고 도화 앞으로 떨어트려놨더니 아직도 눈에 잘 안들어와. 춤은 잘 추는데 튀지를 않아.”
아이돌으로서 제일 뼈 아픈 지적이 손지에게 이어졌다.
“춤은 네가 더 잘 추는데 눈에 보이는 건 도화가 더 잘 보여.”
“……네.”
“이거 해결 못하면 이 많은 멤버들 사이에 존재 못 드러낸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잘 생각해.”
“네, 감사합니다.”
도로시의 다음 지적은 아덴에게로 이어졌다.
“아덴이는 1차, 2차에서도 지적했는데 왜 안 고쳐? 춤 힘 있게 추는 건 좋은데 디테일 잘 챙겨서 속도 제대로 맞추라고 했잖아.”
“네, 죄송합니다.”
아덴은 모든 심사에서 본인의 힘을 감당 못 해 강약조절이 안 되어 안무의 속도가 느리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합숙에 오기 전부터 멤버들과 우나나에게도 자주 지적받았던 문제점이었는데 곡 중 발을 빠르게 움직이는 안무가 많아 더욱 문제가 심각하게 눈에 드러났다.
센스만 좋았지 평생을 디테일 따위 챙긴 적 없는 놈이 디테일을 챙기려 하니 디테일은 안 챙겨지고 유일한 장점이던 속도마저 느려졌다.
이러니 가진 건 힘밖에 없는 놈이 되어버렸다.
물론 3일간 점차 나아지긴 했어도 3일로는 부족했을 거다.
“그리고 도화.”
“네?”
아덴의 심사평을 듣고 있던 서도화가 깜짝 놀라며 도로시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서도화는 제 실력에 객관화가 무척 잘 되어있었기에 이번엔 지적받을 거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로시는 긴장감을 조성하며 서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말했다.
“잘하네. 역시.”
그 순간 서도화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합숙 내도록 서도화에 대한 칭찬이 박하던 도로시였다. 모처럼의 칭찬에 서도화가 들뜨기도 잠시, 도로시의 이어지는 말에 그는 급격하게 부담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더 열심히 해야 해. 이번 공연에서 네 역할이 많이 중요한 거 알지?”
“……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생각해보니 그렇다. 지금까지 모든 신경이 파트 뺏기, 케이, 그리고 자신의 성장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잊었다.
도로시의 말을 듣고 보니 이번 공연에서 서도화의 분량이 의도치 않게 상당히 많아졌다.
보컬 파트는 말할 것도 없고 댄스 파트도. 대형 이동 때를 제외하곤 항상 카메라에 보일 위치에 서 있다.
아니, 그냥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확실히 말해서.
‘……나 이 팀 센터인데?’
정신 차리고 보니 자신이 이 팀의 센터가 되어있었다.
가져올 수 있는 파트는 죄다 뺏어오자 생각했더니 뺏기도 잘 뺏었고 방어도 너무 잘해버렸다. 서도화는 급격히 자신의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러나 서도화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용사파티에선 늘 뒷줄에 서던 음유시인이지만 사실 서도화는 공연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것에 더 익숙했다.
도로시 다음엔 아이돌 출신 솔로 가수 찬리의 심사평이 이어졌다.
“그런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찬리는 손을 들며 심사위원들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아니 영상으로 많이 보기도 했고 56번, 91번 전부 컨셉을 아크로바틱으로 잡았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네, 맞습니다.”
“또 이번에도 보면 중간 댄스 브레이크 부분에 아크로바틱을 넣었고요. 그런데 왜 아크로바틱은 56번만 해요?”
찬리를 보던 도로시의 고개가 91번 그룹에게로 돌아갔다. 91번은 당황한 듯 입술을 잘근거리거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어서 찬리는 파트지를 뒤적거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거 댄스 브레이크 56번, 91번 같이 짰을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근데 왜 91번은 안 해요? 아크로바틱 하시는 분들이. 일부러 안 한 거예요, 아니면 그냥 양보해버린 거예요? 어느 쪽이든 다 경연에서 해선 안 될 행동인 거 알죠?”
91번은 찬리의 날 선 지적에 어떠한 대답을 못 했다. 당연했다. 그들이 아크로바틱을 포기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56번과 비교 당할까 봐. 자존심 세우느라 성질에 못 이겨서 놔버린 것뿐이기 때문이다.
합숙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은 프로답지 못했다. 56번을 향한 비아냥과 경연임을 잊고 기분 나쁜 티를 내거나 댄스 브레이크를 포기해버린 것 모두.
찬리는 영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로서는 정말 이해 못 할 행동인데 혹시 싸웠어요?”
“아닙니다.”
“저는 이유가 궁금해요.”
찬리의 물음에 한참이나 주저하던 91번의 리더 지한이 말했다.
“그, 56번이 너무 잘하시니까 무대가 더 멋져 보였으면 해서…….”
“양보한 거예요? 하, 진짜 난 이해가 안 돼. 일단 뭐, 알겠습니다.”
찬리는 떨떠름하게 인상을 쓴 채 지한의 말을 끊고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도화와 멤버들은 알고 있었다. 방송에 아크로바틱 분량 정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결코 양보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아마 방송에 나올 것이다.
-저희 아크로바틱 안 할게요.
-……네? 갑자기요?
-아 뭐, 56번 분들이 이건 더 잘하시니까. 저희는 그 정도가 아니라서. 그러길 바라시는 것 같아서.
56번에게는 정말 뚱딴지 같은 말이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건지 진짜로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아크로바틱 짜는 동안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는 건 들었다. 대략 ‘너무한다’, ‘우리 팀 상황은 생각도 안 한다’, ‘56번만 눈에 띄겠다’ 등등의 말들을 케이가 엿들었다고 했다.
완전 자신들을 56번의 파트 뺏기에 힘없이 당하는 피해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 댄스 브레이크는 서도화와 멤버들이 눈에 띄려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파트 뺏기에 자비가 없었던 건 맞다.
특히 서도화와 주상현 둘이서 중요한 파트는 싹 다 뺏어오고 있었으니 억울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경연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물론 아이돌이 될 연습생들이니 이미지를 생각해서 적당히 좋은 분위기로 이끌어가야 하는 건 맞지만 엄연히 뺏으라고 모아둔 합숙인데 최선을 다해서 가져올 건 가져와야지.
쳐내야 할 사람이 몇 명인데 팀 밸런스 생각해서 심사를 못 봐서 경쟁 그룹에 파트를 넘겨주는 기만을 하고 자빠졌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배배 꼬여서는 안 합니다~ 따위의 짓을 시전하니 어이가 없어서라도 서도화와 멤버들도 ‘어쩔 수 없죠 뭐.’ 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합숙팀 중 가장 안 친한 팀이라는데 기 싸움도 장난 아니었으니 자극적인 거 좋아하는 팝넷이 이를 방송에 안 내보낼 리가 없었다.
어느 그룹이 욕을 먹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지소희의 심사평이 시작되었다.
지소희는 처음으로 이들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는 가장 먼저 서도화를 칭찬했다.
“도화. 오늘은 좀 힘을 빼고 불렀나? 지금처럼 부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살짝 힘을 빼니까 감정이나 테크니컬한 면면이 드러나서 나는 좀 더 흥미롭게 들었어.”
“감사합니다!”
함께 연습한 연습생들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씩 사람들에게 보컬에 대한 내성이 생기고 있었다. 서도화의 노래에 감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고 실력을 조금씩 파악할 수 있게 된 지소희는 무척 감탄했다.
그냥 음색만 좋은 게 아니었다. 감정표현, 음색, 테크닉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아주 귀한 연습생이다.
무작정 잘하는 게 아니라, 그룹에 조화롭게 잘한다.
그리고 결코 타고나기만 해선 이렇게 잘할 수 없다.
아마 이렇게 좋은 실력을 가지기 위해 무던히 애썼을 거다.
왜 데스티니가 서도화를 기대주로 삼아 그를 중심으로 데뷔조를 짜려 했는지, 또 왜 서도화를 내보내고도 아무 데도 보내지 않으려 강 실장을 구워삶았는지 알 것 같았다.
대충 정신 차리게 한 뒤 복귀시키려던 생각이었겠지. 그러다 아끼는 후배인 김유진에게 넘겨진 거고.
‘딱히 싸가지 없어 보이지는 않는데.’
칭찬 한번 받았다고 기뻐하는 저 모습을 보라. 데스티니 트레이너 도로시도 꽤 자랑스러워하는 눈치고.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던 걸까?
지소희는 의문을 뒤로 한 채 다른 연습생들의 심사를 이어나갔다.
“한야랑 아덴이도 오늘 좋았어. 상현이는 좀 흔들리긴 했어도 그건 춤 때문이니까. 경연 때는 보다 안정적으로 부르도록 노력하고.”
“네!”
“한야는 랩도 잘하는데 보컬에 조금 더 욕심내도 되겠다. 아덴이는 연습생들 중에 가장 노래가 안정적이었어요. 흔들림이 없어. 잘 들었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케이는-”
지소희가 말을 멈추고 케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소희는 케이를 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도로시가 서도화를 말없이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는 케이를 보며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로 인한 정적이 자연스럽게 공간의 긴장감을 유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