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그녀는 케이에게 어떤 평을 내릴까. 노력과 성장을 보아 몇몇 불안했던 다른 연습생의 파트를 넘겨줄까? 아니면 이번에도 유지에서 그칠까.
서도화는 케이가 이번에도 파트를 뺏길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뺏길 정도로 못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 비하면 무척 잘했다.
하지만 파트를 뺏을 수 있을 실력이냐고 물으면 글쎄. 몇몇 연습생들이 불안했던 파트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는 잘해서. 정말 지소희의 마음에 달려 있다.
긴장과 걱정 속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녀는 이내 이제 되었다는 듯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지적할 게 없네. 잘했어. 케이.”
그녀의 입가에 옅지만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감 있게 부르니까 목소리 참 좋네. 왜 지금까지 그 멋진 목소리를 숨기고 있었어?”
케이의 눈이 빛났다. 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이제 좀 노래 부르는 것 같다. 노력 많이 했네.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라고 해.
케이는 멍하니 지소희를 바라보다 한야의 조용한 신호를 받고서야 황급히 말했다.
“가, 감사하네! 니다!”
“뭐?”
지소희가 놀리듯 되묻다가 이내 깔깔 웃었다. 아마 자신의 칭찬에 너무 감격해서 버벅인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케이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아무튼 역시 실력 좋은 멤버들이라 초반에 크게 한마디 해놓으면 알아서 잘해올 줄 알고 있었어요.”
지소희는 연습생 전체에게 칭찬을 하면서도 단호히 말했다.
“다들 너무 잘했으니 개인별로 피드백할 건 없지만 자잘하게 불안한 파트들은 이번에도 교체가 있을 거야. 수정된 파트는 제작진 통해서 전달할게요.”
“감사합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로써 파트 뺏기의 마지막 심사까지 모두 끝이 났다. 멤버들은 드디어 모두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을 내려놓으며 힘차게 인사했다.
그리고 심사장을 나온 그들은 제작진에게 새로 배분된 파트 표를 받을 수 있었다.
56번은 56번끼리 91번은 91번끼리 나뉘어 바뀐 파트를 확인했다.
댄스 파트는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임팩트 없다는 평을 받은 손지에게 메인댄서로서 기회를 주듯 그의 댄스 파트가 조금 늘었다는 걸 제외하면 대부분 유지되었다.
그러나 보컬 파트의 수정점을 확인했을 때 56번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형!”
“케이야, 정말 잘했다.”
“고생했어.”
“내, 내가…….”
해냈어.
주상현이 제 몸을 붙들고 흔들어대도, 음유시인이 슬쩍 한 마디 얹어도 케이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한 채 가사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1절에 떡하니 표시된 자신의 파트. 지소희가 수정한 파트는 총 세 파트. 그중 두 파트는 파트가 너무 적어진 메인보컬 오현민을 배려해 그에게로 갔지만 나머지 한 파트는 케이의 것이었다.
아주 짧은 파트였지만 케이가 자신의 실력으로 결국 해낸 것이다.
“형 진짜 잘됐어요……. 진짜 형 새벽 일찍 일어나서 연습한 거 제가 봤는데……. 진짜 혀엉…….”
주상현은 기뻐 방방 뛰다 결국 울컥 그간의 노력들이 떠올랐는지 훌쩍였고 케이는 여전히 멍하게 가사지만 보고 있었다.
그런 이들의 소란에 다른 연습생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카메라 또한 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이들을 가까이에서 찍으며 감격의 순간을 담았다.
아덴은 별 표정 없이 댄스 파트지만 보고 있다가 카메라가 다가옴을 알아차리고 눈치껏 멤버들에게 붙었다.
“축하해.”
영혼 없이 한 마디 얹어서 카메라 앞에 사이좋은 우애를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화는 한야와 주상현 사이에 낑겨 케이의 등을 한번 토닥였다.
“잘했다. 고생했어.”
의도는 모르나 그가 협조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고 있다. 자존심을 굽히고 자신의 앞에서 춤추고 노래했으며 몰래 나와 연습까지 했다.
그래서 서도화는 생각했다.
‘아, 짜증 나네.’
최근 인지부조화가 무척 자주 와 곤란했다.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케이의 노고를 그만 기특하게 여겨버릴 것만 같았다. 안 되는데, 이런 마음 들면 안 되는데. 얘는 같은 멤버이고 협조 잘해주고 있긴 하지만 원수 새끼인데.
근데 같이 연습하며 3일간 나도 같이 고생했던 게 떠올라서 울컥하긴 하는데.
혼란스러운 마음을 느끼며 서도화가 기특함과 미움을 담아 케이의 등을 팍팍 때리고 있을 때였다.
“케이야 괜찮아?”
“형 울어요?”
한야와 주상현의 말에 서도화의 손이 멈췄다. 뭐? 마왕이 운다고? 핵을 빼앗기고 죽기 직전까지 눈물 한번 흘리지 않던 놈이 고작 이걸로?
서도화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내리고 케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진짜네?”
진짜로 케이는 울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사지를 쥔 채 고개를 팍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무척 기이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서도화가 놀라서 가만히 케이의 얼굴과 가사지에 떨어지는 눈물을 번갈아 보고 있을 때 아덴도 주섬주섬 멤버들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케이의 얼굴을 조용히 구경했다.
“진짜 우네?”
“정말 우네?”
서도화와 아덴이 쌍둥이처럼 동시에 번갈아 말하자 케이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이건……. 안 울어…….”
막혀오는 목구멍으로 애써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이 또한 물기 어렸다. 케이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혀엉……진짜 너무 고생했죠…….”
누가 인간 최초 수하 후보 아니랄까 봐 본인보다 더 통곡하는 주상현, 말없이 등을 토닥이는 한야.
“진짜야? 눈물 흘러?”
“그렇다니까?”
“침 아니고?”
“아니야. 눈에서 흘러.”
믿을 수 없다는 듯 무슨 신기한 동물 보듯 지들끼리 속닥이고 있는 용사와 음유시인 이 빌어먹을 놈들.
자기들 딴에는 몰래 속닥인다고 하는데 귀 좋은 케이에게는 또렷하게 너무나 잘 들렸다.
누구든 멤버 모두 하나같이 짜증 나는 족속들이고 제발 꺼져줬으면 했다. 고작 이딴 걸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이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를 일이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왜 멤버들의 노력에 자신이 부담을 느꼈는지 모를 일이다. 왜 인간처럼 그간의 노고가 떠오르며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음유시인의 정화에 결국 한 겹씩 정화당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낄 리 없을 테니.
“해냈어요. 우리가. 형!”
정말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 * *
그날 밤 서도화는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심사가 끝나고 나니 아무튼 어떻게든 잘 마무리되었다.
합숙과 동시에 멤버들의 모난 성격이 탄로 날까 봐 마음 졸였더니 짝그룹인 91번이 오히려 이미지 관리를 못 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괜찮은 이미지를 챙길 수 있었다.
자신은 무사히 이 팀에서도 메인보컬 자리를 차지했고 멤버들도 그럭저럭 만족할 만큼의 파트를 가져올 수 있었다.
거기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압도적인 아크로바틱 실력을 선보이는 데에 성공했고 덩달아 케이의 성장까지 카메라 앞에서 보여줄 수 있었다.
참 소란 많은 그룹이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합숙이 아니었나 싶었다.
‘물론 연습만 한 건 좀 아쉽지만.’
하도 경쟁에만 치우친 탓에 다른 그룹들이 휴식과 놀이를 하며 분량을 뽑는 동안 56번은 온종일 연습만 했다.
아마 방송에서 많은 분량은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해봐야 91번과의 기 싸움이나 방영되려나.
‘지금은 오히려 분량이 없는 게 나으려나.’
하도 개성이 뚜렷한 멤버들이니 오히려 연습에 매진했던 게 다행일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아덴과 케이가 행동을 무척 조심했었으니 조금은 노는 모습을 보였어도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직 서도화는 모르고 있었다.
합숙에서 56번 그룹이 얼마나 많은 예상 분량을 차지했는지. 생각보다 그들의 많은 부분들이 카메라와 마이크에 담겼음을.
아무것도 모른 채 서도화와 멤버들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도화의 분량 걱정은 아침이 되자마자 곧바로 사라졌다.
-기상 시간입니다. 참가 그룹 전원은 즉시 기상 후 강당으로 집합 바랍니다. 아침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으니 얼른 강당으로 집합 바랍니다.
기상 방송이 울리고 서도화와 멤버들이 하나둘씩 좀비처럼 몸을 일으켰다. 졸음에 정신 못 차리는 멤버들이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꾸벅이자 아덴과 한야가 익숙하게 시선 교환을 하곤 멤버들을 들쳐메다시피 들어선 화장실에 넣어버렸다.
멤버들이 겨우 준비를 끝마치고 강당에 도착했을 때 연습생들 사이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우리 등산한다던데……?”
“……진짜? 연습해야 하는데? 저녁에 심사해야 하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서도화가 제 귀를 후볐다.
차라리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다.
그러나 잠시 후 서도화를 포함한 연습생들의 얼굴이 불안함으로 가득해졌다. 단상 위로 무려 서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심사도 끝났겠다. 이대로 밥 먹고 집에 보내주는 줄 알았더니. 역시 팝넷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집에 보내줄 리 없었다.
‘뭐 하려고 서영 선배님까지 등장시키지?’
서도화가 고개를 돌려 제작진들을 바라보았다. 설마 진짜 등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