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부터 시작하는 아이돌 생활-60화 (60/270)

제60화

제작진의 조례 정도만 하고 끝나던 아침 집합에 서영의 등장이라니 마지막 날이니만큼 분명 큰 이벤트일 것이리라.

“여러분 합숙은 어떠신가요?”

서영은 짧은 사이 핼쑥해진 연습생 모두를 둘러보며 가볍게 웃었다. 역시 팝넷의 합숙답게 상당히 피곤한 일정을 돌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조금 미안하네. 피곤할 텐데.’

이 극한의 일정을 몸소 겪어봤던 서영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그러나 몹시 사무적인 말투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생들에게 말했다.

“드디어 길고 긴 3박 4일간의 일정이 마무리되려 하는데요. 그 전에, 이대로 끝나기는 조금 아쉽죠?”

서영의 말에 피곤에 찌든 연습생들이 그게 무슨 말씀이시냐 슬픈 눈으로 물으며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늘까지 열심히 연습한 여러분들에게 엄청난 보상을 건 특별 미션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션?”

“보상?”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연습생 모두 마음 한 구석 몹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진짜 등산인가? 다 끝난 마당에? 이렇게 피곤한데?

그리고 팝넷은 역시 그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합숙 마지막 이벤트 보상, 바로 ‘엔딩 요정권’을 건 미션. 바로 등산입니다.”

서도화가 탄식했다. 주변의 연습생들도 모두 그와 같은 반응이었다.

제길. 진짜 등산이네.

하필 미션을 걸어도 등산을 걸다니. 차라리 미니게임이나 피구가 나았을 것인데.

주상현과 한야는 예상한 듯 체념한 표정이었고 아덴은 눈을 반짝였다. 반면 서도화와 케이는 눈밑 다크서클이 더욱 내려왔다.

그 세계에서 질릴 정도로 오르던 산을 여기서도 오를 줄이야.

서도화는 원래 이곳으로 돌아오면 늙어 죽을 때까지 등산은 하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그걸 데뷔하기도 전에 어기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너무 슬펐다.

물론 이런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뜬금없이 등산을 끼워 넣은 제작진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들도 경험상 하루하루 경쟁으로 이루어진 합숙으로 연습생들이 연습, 심사, 또 연습, 심사만 반복하리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니 뭐라도 하며 분량을 뽑아야 했는데 여느 때와 같이 체육대회를 하자니 인원이 너무 많고, 그렇다고 자유시간을 주자니 이 많은 인원이 흩어져 노는 걸 찍기엔 편집점이 애매하다.

그러니 마침 수련회 건물 주변까지 사들인 김에 그 지형을 고스란히 이용하기로 한 것일 테다. 산과 인접한 수련원의 필수코스가 바로 등산 아니겠는가.

“등산은 약 1시간 30분 코스. 성공하기만 하면 그룹의 인원수와는 상관없이 성공한 모든 멤버의 엔딩 클로즈업을 시청자분들에게 선보일 수 있습니다. 아, 참가는 자유이니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요.”

서영의 말에 연습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딱 한 시간 반 동안의 연습만 포기하면 엔딩 클로즈업으로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할 수 있다.

어차피 촬영 중의 이벤트인데 이 정도 조건이면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아마 연습생 대부분이 등산에 참가할 것이다.

연습생들이 치열하게 파트 뺏기 경쟁을 펼쳤던 궁극적인 이유는 조금이라도 카메라에 얼굴을 비춰 시청자들에게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이니까.

주상현도 여느 연습생들과 마찬가지로 눈을 똘망똘망하게 반짝이며 말했다.

“저희도 할 거죠? 한야 형!”

“그럼 당연하지.”

한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우리는 빠지는 사람 없이 참가야. 아무리 피곤해도 등산 끝나고 죽는 거야.”

부드러운 미소와 그에 맞지 않는 냉혹한 대사. 한야는 서도화와 케이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서도화는 말없이 한야의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어깨를 주무르는 손에 무시무시한 악력이 깃든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하하, 엔딩요정 좋죠.”

“그렇지 도화야? 특히 도화랑 케이는 엔딩요정 꼭 했으면 좋겠어.”

“네에……. 그럼요.”

서도화의 미소가 씁쓸했다. 자유 참가라길래 잠시나마 희망을 걸었던 서도화였다.

서영은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진정시키며 마지막 설명을 이어나갔다.

“연습을 계속할 연습생들은 이곳에 남아 원하는 연습실에서 연습하면 됩니다. 엔딩요정권 등산 미션에 참가할 연습생들은 복장을 갖춘 뒤 제작진의 안내에 따라 뒷산으로 이동하시겠습니다.”

서영은 설명을 마친 뒤 바로 단상에서 내려왔고 서도화와 멤버들은 제작진이 나눠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뒷산으로 향했다.

* * *

등산을 시작한 지 30분째, 연습생들은 생각했다.

‘속았다.’

한 시간 반 코스라던 산은 말이 쉽지 생각보다 무척 빡셌다.

“역시, 허억… 보상 쉽게 받는 게, 헉, 아니네……후…….”

뒤에서 연습생 누군가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들다고 벌써 뒤처지는 연습생들이 있었지만 그건 서도화에겐 이해 못 할 일이었다.

묘하게 열받는 게, 막상 또 하니까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할 만했다.

“앞사람 잘 따라서 와야 해. 먼저 정상에 도착한다고 더 좋은 보상 있고 그런 거 아니니까 각자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서 따라와.”

“네!”

“도중에 나는 이제 못하겠다 싶은 연습생들은 가까운 곳의 제작진에게 말하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올라오는 내내 거듭 안전을 강조하는 제작진을 보는 서도화에게 아덴이 속삭였다.

“걱정할 만한 산길이긴 해.”

“뭐?”

“이렇게 나무로 시야가 가려진 곳은 거대한 야수가 사는 경우가 많거든. 아무리 선발대가 길을 닦아놓았다고 할지언정 안전한 건 아니지.”

“……그건 그렇겠네.“

서도화는 그냥 다 포기하고 그의 말에 대충 맞장구쳐주기로 했다. 평생을 위험한 세계에서 생존했던 아덴에게 이곳에서의 평화로움을 이해시키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근데 저렇게 안전을 강조할 정도면 안 가면 되는 거 아닌가? 하나같이 전투랑은 거리가 먼 사람들 뿐인데.”

“말이 저렇다는 거지 여기는 안전하니까.”

서도화는 아덴의 손이 쥐였다 펴지는 것을 보았다. 제 검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덴은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않은 안전은 잘 믿지 않는 성정이었기에, 서도화는 그의 걱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을 거야.”

“괜찮다고?”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 따라 쳐둔 안전줄 보이지? 여긴 민간인들이 다니라고 만들어둔 곳이야.”

개인별로 마이크를 달고 있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뒤에서 따라 올라오던 주상현이 힐끔힐끔 그들의 눈치를 보다 달려와 대화 중인 서도화와 아덴 사이에 끼어들었다.

“형들 또 게임 이야기해요?”

“어?”

“야수, 전투 이런 거 말하던 거 같던데 아니에요?”

“……맞아.”

서도화는 주상현이 해맑게 웃으며 이런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꺼낼 때마다 어쩐지 몸이 움찔거렸다. 비밀을 들키다 못해 때 묻지 않은 이가 이를 이해하려 억지로 노력하는 걸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왠지 모르게 몸이 오그라드는 서도화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주상현은 그저 살랑살랑 특유의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저도 형들이랑 같은 게임 하고 싶다. 진짜 형들 무슨 게임 해요? 가끔 들어보면 되게 재밌을 것 같아요.”

“뭐 이 게임도 하고 저 게임도 하고 하는 거지.”

서도화는 대충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하던 게임은 몇 년 전에 망했어.”

“엥? 진짜요?”

주상현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냥 추억팔이 하는 거야. 그래서 같이할 수가 없네.”

오랫동안 제2세계에서 생활하다 보니 거짓말만 늘었다. 주상현은 무척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마왕, 용사, 음유시인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은 검색해도 안 나오더라고요.”

“……그걸 검색해봤어?”

“네! 얼마나 재밌길래 현실에서도 그렇게 부르나 궁금하잖아요? 음유시인까지는 좀 나오는데 마왕으로 플레이하는 온라인 게임은 없더라고요?”

그걸 또 검색해보다니. 이게 바로 어울리고 말겠다는 인싸들의 집념인가? 주상현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아쉽다. 저도 형들이 불러주는 별명 하나 만들고 싶었거든요.”

“별명?”

“네, 음유시인, 마왕, 용사 이런 거.”

“……아아.”

딱히 별명은 아니었는데. 생각해보니 별명으로 치기로 했었다.

“그거 어제 마이크 달면서 작가님한테 들어보니까 별명이었다면서요? 저는 그냥 게임 직업을 그대로 부르는 건 줄 알았는데.”

주상현은 두 사람의 생각을 전혀 모른 채 수줍게 말했다.

“그런데 작가님이 저보고 저는 별명 따로 없냐고 묻더라고요.”

“별명?”

“네. 근데 제가 딱히 별명이 없어서요.”

“아, 그렇구나.”

그래서 별명을 만들고 싶다는 거구나. 근데 별명으로 음유시인, 용사, 마왕 같은 걸 쓸 바엔 그냥 없는 게 낫지 않을까?

별생각 없이 대답하며 생각하던 서도화는 주상현의 눈빛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 상당히 바라는 게 있어 보인다.

“그런데?”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아덴이 물음에 주상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저 별명 뭐가 좋을까요? 형들이 지어주시면 안 돼요? 아니 뭐, 제 별명 제가 짓는 것도 이상하니까.”

서도화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기대감에 가득 찬 17살의 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모르겠다고 하면 또 시무룩해질 것 같다.

‘별명…….’

서도화라면 음유시인 같은 별명보단 그냥 이름으로 불리길 바랐을 텐데. 어차피 별명이라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친밀감의 표현일 뿐이니 그냥 ‘상현이’나 ‘막내’ 정도면 되는 거 아닌가?

보아하니 팬들도 주상현을 막내, 막둥이로 자주 부르는 듯하고.

원래 별명은 음유시인, 용사, 마왕과 같이 거창할수록 촌스러워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서도화는 별 고민 없이 툭 내뱉었다.

“막내?”

그러자 주상현의 입꼬리가 쭉 내려가며 시무룩해졌다.

“아니 뭐 도화 형한텐 크게 기대 안 하긴 했는데… 막내가 별명이에요?”

“…아닌가?”

전혀 원하던 대답이 아닌가 보다. 주상현은 서도화에게 고개를 젓곤 아예 시선을 아덴에게로 틀어버렸다. 아덴은 별명 짓기에 실패한 서도화를 보며 피식 비웃곤 주상현에게 물었다.

“뭐 우리랑 비슷하게 가고 싶은 거냐?”

“아이 뭐. 비슷하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좀 창피할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도 슬쩍 눈치를 살피는 걸 보니 비슷하게 짓길 바라는 모양이다. 아덴은 서도화보다 훨씬 눈치 빠르게 원하는 바를 알아차리며 물었다.

“네가 제일 잘하는 게 뭔데?”

“예? 저요? 당연히 춤이죠?”

“흠, 그럼.”

아덴이 진지하게 고민하자 주상현의 눈이 다시 초롱초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덴은 눈치는 빨랐으나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춤 잘 추면 그거다. 광대.”

“…광대?”

깜빡이 없이 튀어나온 광대에 서도화가 경악하는 동안 주상현의 얼굴은 시무룩을 넘어 황당함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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