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아덴 형이랑 케이 형 둘만 붙어 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주상현의 말에 서도화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랬나?”
“처음은 아닌가? 아무튼 붙어서 대화 나누는 거 꽤 생소한 모습이지 않아요?”
“그건 그렇다.”
사실 서도화도 두 사람의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둘은 나란히 정상의 난간에 기댄 채 산 아래의 광경을 보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도화는 케이처럼 귀가 좋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하든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또 불안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비아냥거리긴 해도 이제 어지간해선 싸우지 않는다. 서도화와 약속했기 때문이다. 싸우지 않는 대신 붙으면 싸우기에 붙어 있는 일도 없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보이는 두 사람은 제법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게 아닌가. 다툼 없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의 말에 수긍하기도 했다.
서도화는 두 사람의 모습이 불안해 그들의 대화가 궁금했지만 굳이 다가가 끼어들지는 않았다. 끼어들어서 뭐 할 건데. 어차피 평온한 척 싸우고 있을 것인데.
“두 사람 역시 친하네요. 맨날 싸워도 다 우정이죠.”
“그렇지. 뭐.”
서도하는 그저 뭔가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한 주상현의 말에 맞장구쳐줄 뿐이었다.
잠시 후 아덴과 케이가 나란히 다가왔다.
‘싸웠냐?’
아덴은 서도화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무시한 채 곧이어 다가온 한야에게 물었다.
“저희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서도화도 주상현도 케이도 모두 한야를 바라보았다. 한야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강당에서 엔딩만 하고 바로 돌아갈 거야.”
그의 말에 서도화는 한결 편안해졌다. 3박 4일간 시한폭탄 같은 멤버들과 카메라 앞에서 그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드디어 모든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간다. 그것도 유제이의 대표 김유진이 듣는다면 무척 좋아할 엄청난 소식을 들고.
잠시 후 산행에 참가한 그룹 전원이 정상에 올라섰다. 꽤 가파른 길이지만 대부분의 연습생들은 시간이 얼마나 걸렸든 등반에 성공했다.
자신에게 돌아온 기회를 절대로 놓치기 싫은 연습생들의 집념이었다.
정상에 올라선 이들 전부가 엔딩요정권을 따내고 기뻐했다. 합숙의 마지막 일정은 무척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아 물론 촬영만 훈훈했다.
수련원의 주차장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인 연습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무척 표정이 안 좋은 91번 또한 주차장에서 매니저를 찾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좀 잘하지 그랬어? 너네 은근 파트 없는 걸 내 탓으로 돌린다?”
“아니 형 탓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 심사 때 형이 한번 말해줄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거잖아. 왜 가만히 있었냐고.”
“그 분위기에서 어떻게 말하라는 건데? 잘난 네가 말하지 새끼야. 지들이 실력 없어서 파트 뺏긴 걸 왜 나한테 지랄이야.”
“형…….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형도 파트 없잖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 그들이 카메라 앞에서도 남 탓 시전 정치질을 한 건 카메라 밖에서 그 행동이 습관처럼 묻어나왔기 때문이었다.
91번 그룹의 지한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손지의 시선을 피했다.
“카메라 앞에서는 존나 착한 척하더니.”
“하! 카메라 없는데 그럼 내가 지금도 착한 척하리?”
유치한 말다툼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발치로 길쭉한 다리가 쑥 들어왔다.
“으앗!”
지한과 손지는 다리에 걸려 동시에 엎어졌다. 두 사람의 뒤로 91번 그룹의 다른 멤버들이 있었지만 두 사람을 잡아주는 이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눈살을 찌푸린 채 다리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뭐냐?”
길쭉한 다리의 주인과 그의 동료는 씨익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 실수.”
여기, 91번만큼이나 카메라 앞에서 착한 척하던 멤버들이 있었다.
아덴은 91번 멤버들이 걸려 넘어졌던 제 다리를 툭툭 털곤 지켜보던 서도화와 함께 미안한 기색도 없이 웃었다. 그 모습이 동네 양아치 같기도 장난 좋아하는 악동 콤비 같기도 했다. 그러곤 한 마디 얹곤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러게 왜 우리가 서 있는데 걸어?”
“……유치하게 이러실 거예요?”
뒤에서 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서도화와 아덴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저 멀리 이병수와 해맑게 대화 중인 주상현과 멤버들이 보였다.
예전부터 유치한 장난이든 피 튀기는 살육이든 동료가 당하면 똑같은 수법으로 돌려주던 용사파티 콤비였다.
두 사람은 상극의 성격을 가졌지만 이것만큼은 무척 잘맞았다.
* * *
숙소로 돌아온 서도화는 짐도 풀지 않은 채 침대로 직행했다.
“오늘도 연습해요? 하겠지 뭐.”
그는 자문자답하며 침대에 몸을 누였다. 조금 뒤 한야가 방에 들어오면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러면 안 된다고 부드럽게 잔소리하겠지만 그보다 피로감이 먼저였다.
합숙 내도록 아덴과 케이가 사고라도 칠까 봐, 케이가 파트를 뺏어오지 못할까 봐, 2라운드 종합순위 11위의 56번 그룹이 알고 보니 거품만 잔뜩 낀 그룹이라고 망신살 당하면 어떻게 할지, 제 정화 능력이 의심받지는 않을지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합숙 동안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고 자는 게 자는 게 아니었다.
물론 후반엔 케이가 무척 잘해줬고 일반인들에게 서서히 내성이 생긴다는 것도 알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긴 했지만 여러모로 피곤한 합숙이었다.
‘더구나 진짜 등산까지 했고.’
산길을 오르는 당시엔 별로 안 힘든 줄 알았더니 차타고 숙소로 오는 동안 정신놓고 잠이 들었더랬다.
“씻어야 되는데.”
곧 한야 형 오는데.
그러나 서도화는 한야가 아닌 매니저 이병수에 의해 일으켜 세워졌다.
시간은 아직 오후 3시. 서도화와 멤버들은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도로 숙소를 나와 회사로 향해야 했다.
“좀 쉬게 할 걸 그랬나?”
김유진이 멤버들의 모습을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멤버들이 합숙에서 돌아왔다길래 당연스럽게 회사로 불러들였던 김유진이었다.
그런데 멤버들의 몰골을 보니 하루쯤은 그냥 쉬게 내버려 둘 걸 그랬다.
‘어차피 경연까지 열흘은 남았는데.’
서도화와 케이, 그리고 주상현. 유제이 그룹 간판들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잔뜩 끼어있다. 그뿐인가? 꼬질꼬질한 몰골, 묘한 흙냄새, 잔뜩 지쳐선 기어코 소속사 대표에게마저 왜 이 타이밍에 부르냐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멤버들.
이들의 일정을 상세히 전해 듣지는 못했지만 3박 4일간 상당히 고생하고 온 게 티가 났다.
‘그 합숙이 좀 악명 높기는 하지.’
머쓱함에 의자에 앉으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 쉬라고 해야 하나 김유진이 고민하는 사이 멤버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그냥 의자에 앉아버렸다.
“대표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저희 안 그래도 조금만 쉬다가 연습 나오려고 했는데.”
한야의 말에 김유진이 과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무슨 연습이야! 이제 막 합숙소에서 돌아왔으면서! 합숙 생활 되게 힘들었지? 소문은 들었지만 많이 피곤해 보인다.”
“예?”
“오늘은 쉬어야지! 연습은 쉬어! 무조건 쉬어! 너희 대표는 합숙에서 돌아오자마자 연습시키고 그런 대표 아니다. 알지? 하하하!”
사실 연습 시키려고 했다. 미안하지만 쉬는 건 이번 라운드 끝나고 쉬자고 하려고 했다. 한 팀이더라도 무대에서 직접적으로 다른 그룹과 비교될 수 있는 경연이니만큼 피곤함보단 연습이 우선이지 않을까 하는.
그러나 이들의 핼쑥해지고 거칠어진 모습들을 보니 차마 연습을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다.
“대표니임…….”
그걸 또 진짜로 믿은 주상현은 감격한 표정으로 양손을 모았다. 은혜롭다는 의미였다.
“저희 진짜 힘들었는데. 진짜 정말 역시 대표님밖에 없어요!”
“하하…….”
김유진이 더 어색하게 웃었다. 노력파 주상현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연습시켰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아무튼 내가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일단 합숙 때 상황도 대충 알아야할 것 같아서야. 대충 병수 씨한테 듣기는 했는데-”
김유진이 씨익 흐뭇하게 웃었다.
“너희 파트 엄청 뺏어 왔다며?”
그녀의 말에 멤버들도 씨익 웃었다.
“네!”
“중요한 파트 싹 다 가져왔어요!”
“특히 도화가 많이 활약했어요. 대표님.”
한야의 말에 서도화가 고개를 저었다.
“다들 잘해 줬어요.”
어쨌든 이게 결과였다. 합숙에서 얼마나 조바심을 냈든 어떤 과정을 거쳤든 큰 성과가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물론 멤버들은 김유진에게 91번과의 기 싸움, 엄청나게 혹평을 들었던 것, 팀화합이 합숙이 끝날 때까지 맞지 않았던 것 등은 말하지 않았다.
다 끝난 마당에 말했다가 대표의 심려만 더 늘어날 뿐이지 않겠는가. 물론 표정을 보아 이미 알고 있는 기색이었지만.
대신 이건 말했다.
“대표님 저희 엔딩요정권도 가져왔어요.”
“엔딩요정권?”
김유진의 되물음에 한야가 엔딩요정권을 가져오게 된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물론 저희만 가져온 건 아닙니다. 91번 멤버들도 전원 가져왔어요.”
“그래? ……꽤 좋은 기회네?”
“그렇죠?”
팝넷이 연습생들에게 어필할 기회를 준 것이다. 수많은 그룹들 사이 아무리 잘해도 대중들의 눈에 자신을 각인시키기는 몹시 힘들다.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사람이야 널리고 널렸다. 독보적으로 잘하지 않는 이상 얼굴을 외우게 할 수 있을까?
물론 팬들이 너튜브 쇼츠 등으로 그룹 홍보에 애써주고 있긴 하나 그마저도 쉽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엔딩요정은 그냥 엔딩 몇 초간 클로즈업을 받는 것뿐이지만 그 잠깐 사이 어필할 기회가 있다는 무척 큰 이점이 있다.
김유진이 화색이 되었다.
“진짜 좋은데?”
그녀의 머릿속에 3라운드 엔딩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방송이 방영되기 전 드디어 56번에게도 대중에게 그들의 정보를 알릴 방법이 생긴 것이다.
김유진의 입 꼬리는 피식피식 음흉한 웃음을 띠었다.
까놓고 말해서 솔직히 위에서 말한 홍보가 힘든 그룹 카테고리엔 56번은 들어가지 않는다.
56번은 2라운드까지 치르면서 충분히 시청자들에게 그룹을 어필했다.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사람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서도화와 주상현은 독보적으로 잘한다. 그러니 이미 너튜브 쇼츠의 유명인사들이다.
너튜브 켜면 두 사람 클립 영상은 ‘당신의 1분이 사라지는 경험 #56번_서도화’, ‘[밀리언/56번] #주상현 연예계 대표 메인댄서의 위엄’ 등의 제목으로 지겹도록 돌아다녔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케이는 비주얼로, 한야는 무대 뒤 비하인드, 스트리밍 중 간간이 보이는 자상함으로, 아덴은 무대 위의 피지컬로 대중들에게 제법 각인된 상태였다.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56번은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인기가도를 무섭게 달리는 그룹이었다.
이제 더 이상 주상현의 인기에 기대어 순위를 올리는 그룹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밀리언 아이돌 내에서 매우 주목받는 그들에게 엔딩요정의 의의가 존재 알리기뿐일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