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어떻게 이 작은 회사에 이런 인재들이….’
김유진은 새삼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주고 있는 이 오합지졸들에게 감격하며 최고로 다정하게 말했다.
“얘들아, 너희들의 엔딩요정 목표는 얼굴 알리기가 아니야.”
“그럼요?”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이런 말 하지 말고 너희의 목표는 바로 자기소개야.”
연습생들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해졌다. 그거나 그거나 같은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과 그것은 같은 게 아니다.
이미 팬들이 실컷 홍보해준 얼굴은 이제 질릴 정도로 봤을 거고, 이쯤 되면 시청자들이 궁금해할 때가 되었다.
도대체 이 천재 집단들이 어떤 녀석들인지. 이들의 정보를 알고 싶어질 때가 되었다.
이미 인기를 얻은 56번은 살짝 정보 흘려 팬 화력에 기름 붓기 정도가 엔딩요정의 의의가 되어야 했다.
김유진은 다시 한번 감격했다.
“난 너희가 정말 너무 자랑스럽다. 어떻게 이런…….”
기반은 있었으나 인재가 없었다. 그런 김유진이 리스크를 불사하고 데려온 멤버들. 그동안 불안했던 만큼 기특했다.
조금씩 진짜 아이돌이 되어가는 이들의 성장이 매우 기뻤다.
다른 그룹과 직접 경쟁을 했는데 파트를 죄다 뺏어오다니. 케이와 아덴이 제 파트를 지키다니. 이 얼마나 든든한 멤버들인가.
이제 어딜 가든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처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무척 기뻐하는 김유진을 보며 한야, 서도화, 주상현이 조용히 생각했다.
‘방송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텐데.’
물론 이들도 방송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른다. 그냥 성실히 연습한 노력파 정도로 나오면 참 좋겠는데 실제론 그렇게 깔끔하게 합숙을 보낸 게 아니라서.
아마 방송에 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나가게 된다면 김유진은 91번과의 기 싸움에 한번, 기 싸움 한 주제에 발려버린 케이에게 두 번, 합숙까지 가서 뽑으라는 분량은 안 뽑고 줄기차게 연습만 하는 멤버들의 모습에 세 번 낙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것도 굳이 입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김유진이 실상을 알 때까진 그냥 칭찬만 받고 싶었다.
“어쨌든 들어보니 너희 고생 많이 했겠네.”
이를 알 리 없는 김유진은 그저 흐뭇하게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꼬질꼬질해질 정도로 이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다들 수고했어. 오늘은 정말로 연습하지 말고 숙소로 돌아가. 엔딩요정은 자기소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너희들끼리 고민 좀 해보고 다음 회의 때 말해줘. 꼭 웃기거나 그럴 필요 없고 우리 사실 이런 사람들이에요! 하는 정도의 귀여운 어필만 해도 되니까.”
이들은 이미 너튜브 등에서의 영향력은 순위에 비해 최고이므로 눈에 띄겠다고 잘 어울리지도 않는 걸 해서 흑역사 남기는 것보단 귀엽게 정보를 흘리는 게 적절했다.
“네!”
“얼른 가봐! 아참 그리고 편곡은 도 PD님 아시는 스튜디오에서 완성 단계라고 하니까 곧 완성된 곡으로 연습할 수 있을 거야.”
“91번 그룹이랑 합동 연습은 언제부터 다시 시작하나요?”
한야의 물음에 김유진이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이제부터 전화해 봐야지. 편곡, 안무 완성되고 난 뒤에 잡을 거니까 그전까진 부족한 점 보강하면서 우리끼리 연습하자.”
“넵!”
“그래, 들어가 쉬어.”
멤버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곤 숙소로 향했다. 평소라면 경연을 앞두고 휴식이 웬 말이냐며 회사까지 온 김에 연습할 멤버들이었지만 촬영의 피로감은 열정보다 강했다.
* * *
대낮의 숙소. 자그마한 창문 안으로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고 그것만으로도 방안은 무척 밝았다.
달달 돌아가는 선풍기, 각자의 침대에 누워있는 멤버들은 말이 없었다.
이 숙소는 무척 좁았지만 이것도 이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 해 들어올 때 숙소에 있는 건 처음 아니에요?”
방 밖 거실의 침대에 누워있는 주상현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방안 침대에 누운 서도화의 바로 가까이 있는 것처럼 또렷이 들려왔다.
“그러네? 이 시간엔 한참 연습하거나, 상현이는 학교 가 있을 시간이고.”
한야의 말에 주상현이 끙끙 앓았다.
“아, 내일부터 다시 등교해야 하네.”
정말 태평한 오후였다. 이런 태평함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따스하고 포근한 숙소 안 모두가 조용히 침대에 누워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주상현이 툭 말했다.
“형들 합숙할 때요.”
그의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주상현도 대답을 원하고 꺼낸 말은 아닌지라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냥 다 고마워요.”
많은 걸 생략하고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서도화도 멤버들도 주상현이 무엇을 고마워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지지 않았던 것, 늘 다투던 이들이 다투지 않고 협력해주었던 것, 그리고 91번의 비아냥에서 주상현을 지켜준 것.
특히 91번이 주상현에게 눈치를 줄라고 하면 어느새 멤버들이 다가와 대신 그들의 비아냥과 시선을 받아주었다.
자신 대신 케이가 시비 걸리고, 서도화가 넘어질 뻔했으며 멤버들이 대신 싸워주었다.
그냥 전부 다 고마웠다.
“고마울 것도 많다.”
아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한 것도 없는데 뭐가 고마운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91번의 시선이 날을 세운 채 스칠 때마다 제 뒤로, 멤버들의 뒤로 숨기에 멤버들이 나서서 보호해준 것이고 아직 어리고 나약한 제 동료에게 날을 세우길래 그 수준에 맞춰 놀려먹은 것뿐이다.
그런 사소한 일은 아덴에게 당연하고 별것 아닌 일이었다.
사실 놀려먹은 것도 없이 가장 정신적으로 몰아세운 건 실력으로 파트를 뺏어온 서도화와 주상현 본인이지만.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해야지.”
한야가 말했다.
“멤버들 연습 제일 많이 도와준 게 상현이잖아. 상현이 아니었으면 우리 지금 같은 성과 못 냈을 거야.”
“에이……. 한야 형이 잘 이끌어준 거죠. 저는 그냥 제일 잘하는 거 했을 뿐이에요.”
한야는 도 PD와 메신저를 나누며 웃었다. 보고 있진 않지만 쑥스러워하는 주상현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멤버들이 주상현에게 고마워하는 건 비단 안무 연습을 도와주었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91번 그룹과 그렇게 껄끄러운 일이 있었는데도 멤버들의 의견을 따라 그들과 짝그룹이 된 것.
그들과 함께 있으면 저도 모르게 뒤로 숨을 정도로 싫어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제 실력을 보여주고 멤버들이 힘낼 수 있도록 북돋워 준 것.
가장 어리광 많은 막내이면서도 참 생각이 깊었다.
그러자 마왕도 주저하다 황급히 말했다.
“나, 나도! 그대에게는 고맙다.”
마왕의 말에 주상현은 씨익 웃었다.
“형은 도화 형한테 제일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 뭣?”
케이가 당황하며 주상현을 쳐다보았다. 서도화는 심드렁하게 눈을 꿈뻑이며 잘 준비를 했다. 이곳에서는 케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굳이 보고 싶지도 않았다.
목소리를 보아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마 무척 기분 나쁜 티를 내고 있을 것이다.
곧 말하겠지.
‘음유시인 따위에게 고마운 것은 없다! 그는 나에게 협조한 것뿐이다!’ 정도?
잠이나 자자.
“……그럴지도 모르지.”
서도화가 눈을 감았다가 부릅떴다. 뭔, 방금 누구 목소리?
설마 케이의 목소리인가? 서도화가 놀란 얼굴로 한야를 쳐다보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침대맡의 책을 가져오던 한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도화의 눈이 조용히 더 커졌다.
방금 케이가 서도화의 노고를 인정했다고?
그러나 방안 서도화의 혼란을 모르는 케이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마 부정할 수 없군. 도화가 그곳에서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이 순간 서도화는 생각했다.
마왕에게 과연 춤과 노래란 뭘까.
그게 자신의 적에게 감사를 전할 정도로 대단한 것일까?
“밤낮으로 가장 가까이에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남에게 가르침을 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러나 케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도움을 주었으니 나도 당분간은 너희들과 같은 목표의 길을 걸을 것이다. 용사와도 약조했나니. 영광으로 알라.”
“……이, 이번에는 진짜 좀 오그라들었어요. 형.”
차마 주상현마저 받아주지 못할 말이 케이의 입에서 술술 나왔다.
서도화는 인상을 구긴 채 이전 산 정상에서 나란히 무언가 대화를 나누던 아덴과 케이를 떠올렸다.
그때 했던 대화가 대충 저런 약조였나보다.
어쨌든 말 잘 듣겠다는 소리네.
살아생전 마왕에게 저런 말을 다 들어보네.
서도화는 예상치 못한 자극에 심신을 다스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체력을 아끼자. 정신 건강도 아끼자.
벌써 큰 숙제를 끝낸 것처럼 말하는 멤버들이었지만 이들은 아직 산봉우리를 넘지 않았다. 내일부터 다시 연습을 시작할 거고 곧 91번 그룹과의 합동 연습도 재개될 것이다.
합숙 때와는 달리 카메라 없이 이루어지는 연습. 본 모습을 알고 있는 그룹끼리 상당히 껄끄러운 환경에서 연습을 이어나가야 할 거다.
아마도 촬영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기 싸움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벌써부터 마왕의 감사 인사 따위에 타격받지 말지어다.
* * *
그리고 며칠 뒤 편곡과 안무가 모두 완성되었다.
“너희 인사 안 하냐?”
“이건 좀 아니다. 인사는 하자. 너희.”
어른들의 재촉에 마지못한 인사들이 오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건조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목소리들이었다.
56과 91번은 상당히 싫은 얼굴로 다시 서로를 마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