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부터 시작하는 아이돌 생활-65화 (65/270)

제65화

뭐, 카메라도 없는 판국에 굳이 저들과 사이좋은 척 굴 필요는 없다.

다만 어른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그냥 적당히. 같이 무대를 해야 하니 협조하고 성공적으로 공연을 끝마치면 그걸로 서로 좋은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91번은 사이가 안 좋은 걸 꼭 티를 내야 하는가 보다. 그들은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56번을 무시하고 쌩하니 탈의실로 향했다.

인사는 하려고 주섬주섬 일어나던 서도화와 멤버들은 머쓱하게 도로 자리에 앉았다.

지네가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반면 91번의 매니저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내젓고는 이병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애들이 참 싸가지가 바가지죠? 죄송해요. 매니저 박재운입니다.”

“아, 못 봤을 수도 있죠. 나오면 인사하겠죠.”

이병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박재운과 명함을 교환했다. 이병수는 이미 멤버들을 통해 91번의 대책 없는 성격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매니저는 죄가 없었다. 주상현의 말에 따르면 죄가 있는 건 멤버들과 대표였다.

아무튼 곧 91번은 옷을 갈아입고 왔고 곧바로 연습이 시작되었다.

“안무는 다 외워왔을 테니까 바로 한번 맞춰보죠. 처음부터.”

한야가 말하자 지한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노래도 부릅니까?”

“원하시는 대로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늦게까지 연습해야 하는데 목 좀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한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곤 제 자리로 향했다. 뭐가 저렇게 기분이 안 좋아? 아직 아무 시비도 안 걸었는데.

의아하게 생각하던 서도화는 모두가 제 자리를 찾아 대형을 맞추고서야 91번이 뾰로통한 이유를 깨달았다.

거울로 보이는 각자의 자리. 명확히 56번이 중심에 서 있었다.

‘와 이거…….’

잘못하면 조작 소리 듣겠는데? 뺏어도 너무 잘 뺏었다. 유제이 멤버들끼리만 연습할 때는 몰랐는데 다 같이 서니 곡의 시작을 맡은 주상현을 중심으로 서도화, 그리고 손지. 아덴과 한야.

손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이드에 서 있었다.

유제이 멤버들은 그룹별 연습 때 대형을 잡아도 손지의 자리만 비워두고 서면 됐으니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91번은 중심을 전부 비워두고 모두 사이드에 선 채 곡을 시작했을 테니 연습하는 내내 묘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모두가 자리에 서고 곡이 재생되었다.

편곡과 안무가 완성된 뒤 하는 첫 연습.

매일같이 바뀌던 파트가 픽스되고 카메라가 없으니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으니 곡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제야 파악할 수 있었다.

확실한 건 이 언밸런스해진 파트 분배 덕분에 이 곡의 중심은 완전히 56번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서도화는 곡에 맞춰 안무를 이어가며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서도화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차린 손지가 매우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눈치 볼 것도 없는데.

‘생각보다 더…….’

우리가 돋보이겠는데? 서도화는 주상현에 이어 센터에 서며 생각했다. 정말 좋은 파트 뺏기 심사였다.

중요한 파트, 어필할 수 있는 파트는 죄다 56번에게.

보다 많은 명장면을 가져가는 것이 실력으로 파트를 뺏은 연습생들의 특권이었다.

더는 지킬 필요도 뺏을 필요도 없는 여유로운 연습. 마음이 편안하니 서도화의 표현력은 갈수록 좋아졌다.

서도화뿐만 아니라 주상현도 한야도 심지어 아덴과 케이도 압박에서 벗어나자 갑자기 실력이 일취월장해갔다.

역시 주목받길 좋아하는 아이돌 연습생들에게 메인, 센터라는 건 좋은 것이다. 자신들이 메인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하고-아니 그냥 기분이 무척 좋았다.

56번이 신나서 춤추는 동안 91번의 표정은 갈수록 안 좋아졌다.

‘이번 라운드도, 다음 라운드도 조졌네.’

지한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들과 연습을 하면 할수록 왜 56번이 빠르게 팬 유입이 이루어졌는지, 부족한 멤버가 많은데 천재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몸소 깨닫는 중이었다.

서도화의 음색에 비로소 익숙해졌다 했더니 이젠 그 특유의 표현력과 테크닉, 그리고 메인댄서 손지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만큼의 춤 실력과 존재감이 보였다.

56번의 센터에 서는 만큼 서도화의 존재감은 원래 독보적이었지만 이제 그 아래 탄탄한 실력까지 보이기 시작하니 인기 많은 주상현보다 이쪽이 오히려 넘어서기 힘든 벽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데스티니에서 유명하던 놈답게 확신의 센터였다.

서도화만 벽이겠는가.

합숙 때만 해도 서도화, 케이, 주상현이 너무 눈에 튀었던 터라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멤버가 있었다.

그냥 실력 평범하고 성격 좋은 리더라고 생각한 한야는 합숙이 끝나고 파트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니 크게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면 한야도 서도화와 같이 합숙 내내 굳건히 자신의 파트를 지키고 있던 멤버였다.

낮은 저음의 랩, 풍부한 감정 전달과 어른스러운 분위기.

제 파트와 메인 보컬, 댄서 파트 지키기에 신경 쓰느라 차마 랩 파트엔 신경 못 썼던 지한이었지만 이제 생각하면 91번의 랩 담당인 막내 플로우가 꽤나 마음고생 했을 법한 래퍼였다.

주상현의 실력이야 뼈아플 정도로 알고 있고 별거 없던 실력에 그냥 비주얼과 남들보다 잘하는 아크로바틱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아덴과 케이, 두 사람은 여전히 실력은 별거 없지만 아크로바틱이 컨셉인 이 그룹에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해냈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개개인별 파트 뺏기가 끝나고 나니 이들의 시너지가 보였다.

연습을 진행하며 지한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못 이긴다. 개개인의 실력만 보고 이 정도면 이기겠다고 동일한 컨셉을 잡아서는 안 됐다.

‘그냥 갑자기 나가버린 새끼 한 방 먹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주상현의 탈퇴로 그룹의 데뷔가 얼마나 미뤄졌던가. 존속의 위기에 밀리언 아이돌에 출연하게 되었고 마침 주상현이 참가했길래 가볍게 복수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서도화는 혀를 차는 지한을 힐끔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러면서 무슨 아이돌을 하겠다고 설치는지 모를 일이다.

결코 본인들이 억울한 건 없을 터인데. 질투 따위로 괴롭혔으니 주상현이 그룹을 나와 데뷔가 미뤄진 것이고 본인들의 실력이 부족하니 파트 경쟁에서 진 것이다.

끝까지 본인들이 했던 짓은 생각 못 하는 지한이었다.

원래 연습생들간 질투와 싸움, 견제는 무척 흔하지만 저 정도로 주제를 모르는 인간상은 드물다.

그렇게 1차 연습이 끝났다. 56번과 91번은 연습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분리되어 각 그룹끼리 떨어져 앉았다.

그들의 1차 연습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연습실을 나가기 시작하고 비로소 두 그룹만이 남았다.

“도화 오늘 열심히 하네.”

“맞아요. 형 진짜 무대 위에서 하는 것 같았어요. 제스처나 표정이나.”

아덴과 주상현의 말에 한야가 말했다.

“도화는 항상 열심히 했어.”

맞다. 서도화는 항상 열심히 했다. 언제나 무대에 선 것처럼 연습했다. 촬영 중엔 다른 목표가 있으니 섬세한 제스처나 표정까지는 신경 쓰지 못할 뿐이지.

“열심히 해야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서도화가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센터에 서는 일도 많고 파트도 불공평할 정도로 많이 받은 공연이 될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서도화는 오랜만에 제대로 부담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평소에도 열심히 했지만 이번엔 좀 더 실전처럼 연습했다.

가장 많은 비중을 가져간 사람이 미숙하면 공연 자체의 퀄리티가 떨어질 테니까.

아덴은 힘이 바짝 들어간 서도화를 보며 감탄했다. 이 세계로 넘어와서 가장 흥미로운 게 마나 없는 인간이 아닌 열정 있는 서도화였다.

오늘도 아덴은 사뭇 비장한 서도화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야 너 역시 거기서도 전장에 참여할 수 있으면서 안 한 거 아니냐? 되게 의심스럽다니까?”

아덴은 장난기 가득하게 웃으며 서도화를 놀리다 문득 뭔가 허전함이 느껴져 말을 멈췄다.

“뭐야.”

아덴이 고개를 돌려 주상현을 바라보았다.

원래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꺼낼 때마다 알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로 게임 이야기냐고 묻던 녀석이 이번엔 조용했다.

주상현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시무룩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괜찮던 애가 또 왜 이러나. 의아해하던 찰나 케이의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찮은 버러지들. 이곳에서도 여전하군.”

케이의 중얼거림에 아덴도 서도화도 한야도 케이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보았다.

91번이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속닥이고 있었다. 갑자기 시무룩해진 주상현과 귀 좋은 케이의 말.

‘또 저것들이.’

서도화가 한숨 쉬었다. 또 모르는 사이 주상현에게 뭔가 눈치라도 준 모양인데.

“도화.”

“어?”

케이가 살벌한 눈으로 서도화를 바라보며 조용히 한마디 내뱉었다.

“손가락 한번 그으면 다 끝난다.”

어느새 음유시인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는 그의 눈빛이 모처럼 짙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케이의 핵이 사라지고 마나의 양이 극한까지 줄어들었어도 그는 마왕. 손가락 한 번이면 저들은 죽을 것이다.

물론, 현대에서 듣기엔 상당히 과한 말이었다. 서도화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 심한 소리 했어?”

케이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심하진 않다. 탈퇴를 들먹이더군. 그런데 만날 때마다 저러니 성가시지 않은가. 내가 처리하지. 이것이 나의 협조-”

“아, 아니야. 그거는 안돼.”

돌았나. 미쳤나. 케이가 이곳에 온 뒤로 유일하게 주상현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 무슨 미친 소리인가.

서도화가 당황하며 케이를 뜯어말릴 때-

“거참. 깔 거면 앞에서 까던가. 추접하게 다 들리는 곳에서 쥐새끼처럼 쫑알거리지 말고.”

카메라도 없겠다, 어른들도 없겠다, 허락조차 구하지 않고 노빠꾸로 나간 건 용사 아덴이었다.

“……뭐라고 했어요?”

지한이 정색하며 일어났고 아덴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보며 피식거렸다.

그리고 서도화는 깊게 한숨 쉬며 일어나 익숙하게 싸움 말릴 준비를 했다.

어째 갈수록 마왕보다 용사의 성격이 더 더러워지냐.

서도화는 조금씩 날카로워지는 분위기를 느끼며 이 상황이 끝나면 케이의 사회화 교육보다 아덴의 성질머리 교육을 먼저 해야겠다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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