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예의 좀 지키-”
“예의도 정도껏 해야 지키지. 합숙 때부터 남의 멤버한테 왜 자꾸 눈치를 줘?”
그래, 아덴 성격에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고 했다. 본인 두들겨 맞는 건 참아도 제 울타리 내의 사람이 모욕당하는 건 못 참는 그의 성격상 91번 그룹과의 신경전이 계속되면 언젠가 터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도화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덴이 이 세계에서 지내는 이상 이런 공격적인 성격을 당연히 고쳐야겠지만 뭐 이번엔 어쩌겠는가. 이미 터져버렸는데.
“우리가 언제 그쪽 멤버한테 눈치를 줬는데요.”
“어어? 이거 봐라? 그냥 솔직하게 사과하고 끝내면 쉬운 걸 잡아떼네?”
결국 아덴이 몸을 일으켜 91번 그룹에게로 향했고 그 뒤에서 케이가 조용히 손가락을 허공에 긋는 연습을 했다.
……통쾌하긴 하지만 그래도 말리기는 해야겠지?
서도화가 아덴을 쫓아갔고 한야는 표정을 굳힌 채 말없이 케이의 손을 눌러 내렸다.
“아덴 뭐 하는 거야? 돌아가 앉아.”
“야 너는 자존심도 없냐? 상현이 기죽은 거 봐라. 비겁하게 몰래 눈치나 주고. 탈퇴가 뭐. 쟤가 탈퇴한 게 뭐가 그렇게 분한데? 너희가 쫓아내 놓고.”
아덴은 지한의 앞에 떡하니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지한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 사이의 키 차이가 꽤 컸다. 큰 키와 매서운 인상, 그리고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거친 분위기에 지한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아이돌 연습생이면서… 표정을 보면 사람 한 대 충분히 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인가? 진짜 쳐본 적 있는 사람의 눈빛 같기도 했다.
지한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우, 우리가 뭘 쫓아내요? 지가 못 견뎌서 나간 건데. 그거 때문에 데뷔가 얼마나 미뤄졌는지 아냐? 그래놓고 뻔뻔하게 같은 팀을 하겠다고-”
“너네가 얼마나 괴롭혔으면 저 순한 애가 못견뎌서 나가겠냐. 아 진짜 새끼 혀가 기네?”
갈수록 상황이 심각해졌다. 아덴이 픽 웃으며 주먹을 쥐었을 때 그의 상체가 획 뒤로 젖혀졌다.
“아!”
서도화가 말없이 아덴의 옷을 강하게 잡아 멤버들이 있는 곳으로 끌어당겼다.
“그만하라니까?”
아덴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이런 때는 이상할 정도로 힘이 넘쳐나는 서도화다.
“미쳤냐?”
화가 난 듯한 서도화의 목소리에 아덴은 짜증스레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도화의 표정이 무척 단호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야의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았다.
“앉아.”
웃음기 하나 없이 말하는 한야의 목소리는 매우 무거웠다. 아덴은 그제야 스르르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아덴이 무슨 일을 하든 시종일관 귀엽게 보던 한야가 저런 표정을 보일 정도면 정말 하면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입 다물고 앉아야만 했다.
앉지 않으면 곧 무시무시한 위력의 발차기가 날아올 것이다.
한야는 아덴을 진정시킨 후 여전히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91번 그룹을 바라보았다.
“여러분들도 일하러 왔으면 일만 하세요.”
괜한 감정 내세워서 쓸데없이 괴롭히려 들지 말고 연습이나 잘하라는 뜻이었다.
“아니, 시비는 그쪽에서 먼저 걸었잖아요.”
“노려보고 비아냥거린 건 형들이면서…….”
주상현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주상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손지의 날 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서도화는 그 시선을 막은 채 저들에게 말했다.
“그냥 연습이나 계속하죠. 공연 준비하러 온 거지 싸우러 온 건 아니니. 지금 저희랑 기싸움 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실 텐데요?”
아덴의 시비에도 한야의 말에도 거세게 할 말 하던 지한과 91번 멤버들이 서도화의 말에는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사실 초반에는 주상현에 대한 분노 때문에 56번이 싫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싫은 이유가 좀 달라졌다.
이제는 현실을 알고 있기에 56번이 싫었다.
그들은 잘했다. 아무리 91번 멤버들끼리 합리화하고 저들을 미워해도 결국 무대 위에서 자신들보다 주목받는 건 56번이었다.
“어이없네. 그룹이 망한 게 왜 상현이 탓이야. 지들 실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쉿.”
91번 그룹은 조용히 투덜거리는 아덴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현민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실력이 부족해서 망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걸 남의 입으로 들으니 심장이 후벼파지는 기분이었다.
급격히 기세가 꺾이는 91번 멤버들을 보며 서도화와 멤버들은 일어났다.
“너 이거 병수 형이 봤으면 분명 혼났을 거야.”
“지금도 혼나고 있는데. 뭐. 이걸 참으라고? 우리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무시당하고 있는 거잖아. 별것도 없는 것들이 건달 행세하고 있어.”
“너 좀 있다 나 좀 보자.”
“어? ……흠.”
서도화가 짜증스럽게 말하고서야 겨우 아덴이 진정되었다. 56번 멤버들은 어느새 연습 대형을 맞추고 있었다.
주로 가운데에 모여 있는 56번의 초반 대형은 91번이 없어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습할 때마다 56번의 존재감을 느껴야만 했던 91번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대형이다.
그들은 말없이 연습을 시작했고 91번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다 일어났다.
“일어나. 우리도 연습해.”
비웃을 때가 아니었다. 본인들이 비웃음당하기 싫다면 56번을 신경 쓰기보다 연습을 더 해야 한다. 그들은 제 코가 석 자임을 새삼 또 자각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덧 3라운드 경연의 날.
역대급으로 스트레스 받는 준비 기간을 견뎌낸 56번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형, 모니터로 보니까 장난 아니에요. 우리 발동작 딱딱 맞아떨어지던데요?”
뿌듯해하는 주상현의 말에 서도화가 미소 지었다.
“상현이가 고생한 덕분이지.”
안무를 연습하는 내내 칼각에 집착하던 주상현 덕분에 서도화부터 케이, 91번 그룹까지 모두가 한 몸처럼 그 빠른 발안무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주상현이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근 며칠 사이 91번 눈치를 보며 때때로 기가 죽던 주상현은 매우 안정을 되찾았다.
91번에게 몸소 시비를 건 건 아덴이었지만 주상현의 내면을 케어해준 건 한야와 서도화였다. 서도화는 이곳에서도 힐러 역할을 자처하는 중이었다.
주상현은 이제 91번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고 91번도 드디어 56번에게 신경을 끄고 연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케이는 여전하고 아덴은 최근 서도화에게 공격성 자제 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덕분에 완성도 올랐으니 됐어.’
서도화는 괜스레 피로해지는 눈을 꾹 누르며 한참 세트가 설치되고 있는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참…긴 시간이었어.’
천년을 산 신선처럼 생각하던 그는 아덴을 툭 치며 무대 세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아덴, 저거 봐.”
“어?”
공격성 자제 훈련을 받고 보다 –서도화에게만- 온순해진 아덴이 서도화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원통 모양의 기계가 무대 양 사이드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도화가 말했다.
“아까 스태프분이 설명해주긴 했는데 너 이해 못 한 것 같아서 말한다. 우리 오늘 곡 끝날 때쯤 저기서 펑! 하면서 금박들이 터져 나올 거야.”
“폭탄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런 기계 장치인데.”
서도화의 말에 아덴의 표정이 어쩐지 껄끄러워졌다. 서도화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말했다.
“소리만 크지 위험한 건 아니야. 그런데 놀랄 수는 있어.”
“많이 커?”
“아마? 그래서 내가 때에 맞춰서 네 귀를 막아줄 거야.”
서도화의 말에 아덴이 그를 바라보았다. 주상현의 멘탈 케어, 공격성 자제 훈련, 케이의 사회화 교육.
서도화의 일명 ‘힐러 짓’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아덴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서도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부탁해.”
귀를 막아줄 테니 뒤에서 제 귀로 향하는 손을 경계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아덴은 대충 말하고 언제 대화를 했냐는 듯 획 고개를 돌려버리는 서도화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 세계든 저 세계든 서도화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세상이 멸망하기 전 아덴의 고향엔 대규모 폭발이 있었다. 아덴의 나이 고작 다섯 살 남짓일 때의 일이었다.
그로 인해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고 생명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드높은 하늘 위 마계에서 떨어지는 폭격, 그에 아덴의 집과 그의 누나가 희생당했다.
그 이후 아덴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 갑작스럽게 듣는 폭발음에 약했다. 무엇이든 겁내지 않는 아덴이 이것만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덜덜 떨었다.
그걸 서도화는 잘 알고 큰 소리가 나는 타이밍엔 늘 귀를 막아주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파티원은 아덴뿐만이 아니었다. 뭔가 하나씩 트라우마가 있던 일행들은 늘 서도화에게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다.
그렇기에 서도화는 늘 힐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짐짝 취급을 당하면서도 멤버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도 자신의 그룹 멤버들에게 그때와 같이 한야와 함께 정신적인 의지가 되어 주고 있었다.
깨닫고 보면 아덴도 케이도 주상현도 서도화에게 케어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리더 한야 또한 서도화를 가장 신뢰했다.
평범한 인간이 참 특이한 능력을 가졌다 생각했다.
아덴의 깊은 생각을 알 리 없는 서도화는 다시 획 고개를 돌려 현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리허설 이후 자리를 비웠던 연습생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진행자 서영이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내 감독과 대화를 나눴다.
사방에 배치된 모니터엔 방송 시작까지 30분 남았다는 카운트다운과 함께 지난 2라운드까지의 진행상황을 짧게 보여주는 VCR이 반복재생 되고 있었고 오늘도 역시 벌써부터 활발하게 채팅이 올라왔다.
-연습생들은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수 씨, 연습생 인원 체크해주세요.
감독의 무기력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이젠 익숙해진 이 광경.
유독 길게 느껴졌던 3라운드 준비가 모두 끝나고 30분 후 드디어 경연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