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케이는 제 영상 속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는 것에 충격받아 VCR 영상의 내용이 무엇이든 관심이 없어 보였고 아덴은 알아도 심드렁했다.
아마 조작된 내용을 흥미롭게 보고 있는 사람은 서도화와 주상현, 한야 그리고 91번 멤버들이었다.
91번 멤버들의 표정은 한층 우중충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초반 인터뷰 당시 자신들이 했던 말들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패기 좋게 말한 것에 비해 결과가 무척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서도화는 조작된 인터뷰를 보며 한 가지를 더 알아챌 수 있었다.
아직 편집이 완성되지 않은 짧은 영상이지만.
‘이미지도 잡혔는데?’
벌써 그룹별 이미지가 잡혀 있었다. 한 팀인 걸 강조하여 화기애애 또는 난감함 등등의 컨셉을 잡아 자막이 깔리고 효과음이 들어갔던 앞선 팀들의 인터뷰와는 달랐다.
56번과 91번의 영상에는 서로 상반된 분위기의 BGM과 자막이 깔려 두 그룹의 이미지가 극명히 다름을 강조하고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서도화가 느끼기에 영상 속 91번의 이미지는.
[56번 그룹이 되게 잘하거든요. 그러니까 한 파트라도 더 많이 가져와야겠다.]
[파트는… 되는대로 미리 가져와서 지켜내는 걸 목표로 해야겠다.]
본래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양 그룹 다 합숙 초반부터 서로 뺏겠다고 하하호호 웃으며 기 싸움을 했었고 91번의 멤버들은 그 마음을 인터뷰에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지한과 오현민의 인터뷰를 보충하듯 뒤이어 나온 선곡 회의 장면.
[도입부는 저희 현민이한테 한번 맡겨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 열심히 할게요.]
[다들 말씀 없으시면 현민이가 하는 것으로!]
[감사합니다!]
인터뷰 그대로 그들은 조금이라도 많은 파트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영상으로 보니 더 성급해 보이네.’
다시 봐도 역시 그대로 꼴값이었다. 그때 기분 나빠서 그렇게 느꼈던 게 아니었다.
91번은 이제야 자신들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보이는 듯 했다. 그들의 표정이 한층 굳어졌다. 효과음도 그렇고 생각보다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보였다.
그들의 막무가내 파트 나누기에 56번은.
[어음…….]
[엇…….]
어떻게 편집하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는 태도. 그러나 이번엔 귀여우면서도 세상 억울한 BGM과 함께 저들의 말에 당황하면서도 말도 못 하고 눈치를 보는 것처럼 편집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아덴이 서도화의 옷깃을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을 한 번 더 보여주고 [머엉….], [눈치 눈치], [(엄청 하고 싶음)] 등등 당시 하지 않았던 생각을 창조해낸 자막까지 집어넣어 나름 유순하면서도 독특한 팀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ㅠㅠㅠㅠ어케 말도 못 해 ㄱㅇㅇㅠㅠㅠ
-아니 세상 귀여운
-말 못 하겠다고 전부 리더 쳐다보는 거 개웃기넼ㅋㅋㅋㅋ
서도화가 웃음이 나오려는 입꼬리를 틀어막았다.
첫 번째 곤혹스러운 자신의 표정은 실제로 저 상황의 반응이었으나 뒤에 나오는 주상현의 ‘엇’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장면이다.
원래는 저 말이 나오자마자 한야가 분위기를 끊었던 것 같은데 영상으로 보면 56번은 한참이나 주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 서도화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도입부 저도 부르고 싶어요.]
그 말에 쎄한 효과음과 함께 91번의 굳은 얼굴이 연속으로 클로즈업되었다. 서도화는 그 장면을 보며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저 정도로 91번이 노려보지는 않았었는데.
[근데 도입부 저희 현민이가 정말 잘 살릴 수 있거든요.]
나름 좋은 분위기로 말해보겠다고 가식 오만상 떨며 했던 지한의 말은 쎄한 BGM과 함께 굉장히 공격적인 언사로 보였다.
서도화는 이때쯤 확신했다.
기 싸움. 악편의 희생자가 된 건 아덴과 케이가 있는 56번이 아니었다. 과한 욕심을 내비친 91번이었다.
그에 반해 유제이 그룹 56번이 꽤 실제와 다른 성격으로 편집이 되었다.
단체로 주상현이라도 된 것처럼, 한야를 제외하곤 수줍어서 말도 잘 못 하고 상당히 예의 바른 사람처럼, 제작진의 입맛대로 조각되어 있었다.
김유진의 무조건 양보하기가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아직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56번에게는 실제와는 조금 다른 이미지가 생길 듯했다.
그로 인해 모든 화살이 91번에게로 돌아갔다.
-ㅋㅋㅋㅋㅋ저 정도면 파트 강탈 아니냐…
-아니 순위도 낮은 주제에 왜 56번 이야기는 듣지도 않음?
-저렇게 욕심만 내서 본인들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을 텐데;;
-아닠ㅋㅋㅋㅋ어이없어
-아니 근데 님들 너무 일부만 보고 과하게 화내는 것 같음 좀 진정할 필요가 있음
완전히 상반되게 조작된 두 그룹의 이미지. 합숙에서 유일하게 기 싸움이 심했던 그룹이고 그 결과 또한 극단적이기에 참가 팀 중 누구보다 자극적으로 편집될 것이다.
VCR은 한참 뒤에 방영된 편집본의 일부였으므로 우리들의 모든 이야기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앞선 그룹이 그랬던 것처럼 첫 만남, 곡 선정과 컨셉 회의, 그리고 1차 심사만 짤막하게 보여주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기 싸움, 그리고 심사위원들에게 거의 말로 두들겨 맞는 멤버들이다.
특히 케이의 분량이 상당히 많았는데 케이 같은 경우 심사위원들의 지적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심사 중 미숙한 부분들이 대놓고 조명되었다.
서도화는 영상 속 지적당하는 케이를 보다 채팅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건 좀 심하긴 한데…
-요즘에도 비주얼만으로 들어오는 멤버가 있네
-아이고ㅠㅠ 우리 케이 잘 할 수 있어♥
-와 진짜 잘생겼네… 저 정도면 못해도 들어올 만하지
-노력으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닌데 저건…;;
‘어우 좀 올라오는 반응이 안 좋긴 한데?’
그러나 서도화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일단 케이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말보다 아직까지도 영상 속 초췌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신경 쓰느라 채팅엔 관심이 없는 듯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이제부터 공연을 해야 한다.
저 정도로 실력 없음을 보여줬으면 성장도 더 잘 보일 터.
이젠 잘하니 괜찮다.
VCR이 끝났다.
1차 심사의 파트 분배가 경연에 이르러서는 왜 이렇게 바뀌었는기 그 과정은 본방에서 보여줄 것이다.
미리 대형대로 서 있던 멤버들이 자세를 잡았다.
곡이 시작되기 전 아주 짧은 시간, 툭- 케이가 서도화의 등을 쳤다. 서도화가 눈만 움직여 그를 보자 케이가 작게 속삭였다.
“난 네 힘을 감당해볼 생각이다. 물론 늘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재차 당부하지. 날 신경 쓰지 말고 최선을 다해라.”
정화의 힘을 버텨보겠다는 말이었다. 서도화가 혼신의 힘을 다 하면 케이는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동안에도 자신으로 인해 서도화가 제힘을 맘껏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음유시인. 저자는 나에게 정이 들었으니까!’
오해였다. 그저 케이가 조금씩 정화 당하며 내성이 생겨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러나 정화에 내성이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케이는 이번만큼은 그들이 자신의 연습을 도와준 만큼 기꺼이 그 고통을 버텨볼 생각이었다.
이기기 위해선 음유시인의 정화스킬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 정도는 눈치로 알고 있었다.
서도화는 말없이 시선을 바로 했다.
“당연히 그렇게 할 거야.”
애초에 정화 스킬은 서도화 마음대로 쓰고 말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
그러나 서도화는 케이를 다시 힐끗거리며 흘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조금만 버텨봐.”
싫은 놈이지만 지금은 나의 팀. 잘하겠다고 태우는 불에 찬물 들이부을 정도로 서도화가 악독하진 않았다.
케이가 고개를 들어 서도화를 빤히 보았다.
‘그의 말은 나를 향한 것인가.’
……음유시인 그는 말소리에도 정화의 힘이 있는가.
그러나 케이는 더 생각할 수 없었다. 모든 공간의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곧 간드러지는 전주가 흘러나오며 한 멤버에게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졌다.
3라운드의 무대 <건반>이 시작되었다.
주상현은 막대기에 달린 콧수염을 제 입가에 가져다 대며 장난스럽고 익살맞게 움직였다.
마치 1인 무성 영화 속 코미디언처럼 가볍게 발을 굴리는 그 모습이 몹시 위트 있고 능숙했다.
-ㅠㅠㅠㅠㅠㅠ다 컸네…
-탭댄스ㅋㅋㅋㅋㅋㅋㅋ
-우리 막냉이 이런 거도 잘 해ㅠㅠㅠ
그새 또 춤이 늘었다. 아니, 원래 잘했는데 보여준 적 없는 걸까?
처음 보는 주상현의 모습에 프로젝트 그룹 유니드 시절부터 그를 봐왔던 팬들이 감격과 감탄을 그만둘 수 없었다.
-춤 하나는 연예계에서 제일 잘 추는 듯
-ㅇㅇ, 표정부터 좀 다르긴 함
유일하게 데뷔를 못 했다고, 회사와의 계약이 파기되고 듣보 소속사에 들어갔다고 조롱하는 이들도 그의 조롱하지 못하는 게 스펙트럼 넓은 댄스 실력이었다.
이미 완성에 가깝다고 생각한 실력이 못 본 새 더 늘었으니 이 얼마나 기특하고 뿌듯한가.
그의 팬들이 막둥이의 성장에 무척 기뻐하고 있을 때, 주상현이 쓰고 있던 중절모를 내리며 카메라를 향해 젠틀하게 인사해 보였다.
그러자 스포트라이트가 꺼지는 동시에 무대 전체에 조명이 들어오며 멤버 단체 군무가 이어졌다.
독특하게 구성된 트럼펫 소리에 맞춰 빠르게 굴려지는 발동작.
탁탁탁- 발소리에 맞춰 구둣발 소리가 한껏 흥을 돋웠다.
한결같이 생기 있는 표정이 한편의 서커스 같기도, 또는 뮤지컬 같기도 했다.
“원곡이랑 많이 달라졌죠?”
밀리언 아이돌을 기획한 장본인. 도성한 PD는 작가 이미소에게 흥미롭게 말했다. 그의 괴짜스러운 웃음이 한껏 깊어졌다.
이미소가 어깨를 으쓱였다.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저는 사실 합숙 때 원곡 처음 들어봤는데, 저는 이게 더 좋은데요?”
“원곡으론 이런 본격적인 댄스 못 하죠. 해봐야 율동이었지.”
이 곡에 아크로바틱까지 넣으려면 이 정도로 빡세게 편곡했어야 할 거다. 원곡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지금의 편곡은 무척 생소하게 들렸다.
그러면서도 뭔가 모르게 익숙했다.
도성한 PD는 단번에 이유를 알아차렸다.
“편곡이 이안이네.”
“이안이요?”
이미소의 물음에 도성한 PD는 씨익 웃었다.
“음악 방송 좀 하시다 보면 아시게 될 거예요.”
데뷔한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히트곡 제조기 역할을 톡톡히 하는 작곡가. 스튜디오 차렸다더니 유제이로 들어갔던 모양이다.
이번 곡의 편곡 스타일이 완전 이안 스타일이었다.
“이야.”
도성한이 감탄했다.
이 곡은 되겠네. 이안이 편곡했다면 아무리 독특한 편곡이라도 곡의 상품성 하나는 믿을 만했다.
“생각보다 유제이가 좀 하네요.”
데스티니에서 나와 회사 차렸다길래 어쩌려고 그러나 했더니 인재들을 상당히 많이 데리고 있다.
이안 뿐만 아니라 당장 저 무대 위의 멤버들.
오프닝 독무를 맡았던 주상현과 데스티니 대표 아들을 데려오며 함부로 못 건드리게 대기업 견제도 하고, 잘생기고 아크로바틱 잘하는 둘.
그리고 그 모두를 두고 봐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천재 하나.
신나게 울려 퍼지던 반주가 뚝 끊겼다.
그리고 들려오는 선명한 목소리.
서늘한 불꽃
화려한 성의 색색 Glass
어두운 달빛이 쏟아지는 밤
오색의 선율이 들려오네
서도화의 도입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