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서도화는 안무를 하고 돌아서며 케이를 힐끔거렸다.
자기 딴에는 웃는다고 배운 대로 열심히 웃는데 어째 무대가 시작되기 전보다 많이 수척해졌다.
지쳐버린 표정 마치
나를 포기한 듯한 그 눈빛
무척 지쳐 보였다. 뭔가 눈빛이 허한 게 제 안의 무언가를 포기한 것 같았다.
내가 싫어졌을 수도 있지만
괜찮아요 괘념치 말고 안녕
밝게 부르고 있는데 핼쑥한 게 무대 위에서 진짜 안녕할까 봐 불안했다. 전부 서도화의 정화 능력에 두들겨 맞은 탓이었다.
그러나 케이는 무척 힘겨워도 웃었다.
힘들었을 텐데도 그 힘듦에 용케 적응하고 유쾌하게 이별을 노래했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정말 기특…,
‘기, ……기특하지 그래.’
서도화는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무대를 열심히 하려 애쓰는 그는 꽤 기특했다.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고 없는 마음도 만들어내고 그러나 보다.
물론 옆에서 나란히 뒤로 빠지는 아덴은 심드렁하게 핼쑥해진 케이를 비웃을 뿐이었다.
케이는 무사히 자신의 파트를 마무리했다.
서도화와 아덴에겐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던 그 얼굴도 사람들에겐 그저 미치도록 잘생기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언제까지 써재껴야 내 손가락이 만족할까…? 케이야 너 너무 잘생겼어♥
-우리 케이 웃으니까 더 예쁘다…♥
-ㅋㅋㅋㅋㅋ아니 왜 이 사람들 케이만 나오면 반응이 달라짐? 변태들앜ㅋㅋㅋㅋ
-파트 부족하다는 거 취소…확실히 이 얼굴 오래보면 위험하지… 사랑한다구♥
인기는 주상현, 서도화가 많으나 반쯤 개그와 더해 팬들의 애정이 대놓고 튀어나오는 이는 케이였다.
유일무이한 비주얼. 오로지 비주얼만으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아무튼 케이는 실수 없이 안정적인 노래를 선보이며 자신의 파트를 마무리했다.
이것으로 촬영분이 공개되어도 제대로 성장했다는 걸 미리 보여주었으니 욕은 덜 먹을 거다.
가장 큰 고비였던 케이의 파트가 끝나자 그때부터는 안전 가도를 달리듯 스무스하게 공연이 이루어졌다.
1절에 비해 2절은 심사위원들의 배려로 56번과 91번의 파트가 꽤 공평히 배분되었고 그 덕에 채팅창의 비아냥이나 조롱도 조금이나마 진정되었다.
멤버들은 능숙하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드디어 흥겨우면서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재즈 선율의 무대가 마무리될 때쯤.
서도화는 엔딩 포즈를 위해 자리를 잡고 선 아덴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서둘러 그의 귀를 막아주었다.
그 순간, 펑! 재즈풍 공연에 딱 맞는 금빛 폭죽이 터져 나왔다.
아덴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지만 서도화는 그가 크게 떨지 않는 걸 확인하고 빠르게 손을 치운 후 자세를 잡았다.
떨지 않으면 됐다.
공연이 끝이 났다. 커다란 환호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대신 관객석에서 지켜보는 연습생들의 박수와 함께 읽지 못할 정도로 올라오는 채팅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났다고 해서 다 끝난 게 아니다. 서도화는 입을 꽉 다문 채 거칠어진 숨을 애써 진정시키며 뒷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다른 멤버들도 각자의 옷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난리를 치며 산 정상에 오른 대가로 받은 엔딩요정권.
멤버들은 김유진의 조언들 받아 각자 적절한 준비를 해왔다.
무대 위로 올라온 카메라가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멤버들을 찍기 시작했다.
아이돌다운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에 인사하는 91번 멤버들 다음으로 아덴의 엔딩 포즈 차례.
아덴은 진지한 표정으로 준비한 종이를 제 얼굴 가까이 펼쳐 들었다.
이름 : 아덴(18세)
외국에서 왔지만 영어는 못합니다
김유진의 조언을 받아 멤버들이 준비한 것은 바로 시청자들이 읽기 쉽도록 짤막하게 자기소개를 적어둔 포스트잇이었다.
아덴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멤버들의 엔딩 포즈 겸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이름 : 케이(18세)
내 꿈은 세계정복
이름 : 서도화(18세)
별명은 음유시인, 아덴과 케이를 돌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한야는 돈 많은 리더, 주상현은 그룹 최고의 유명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동갑이면서 아덴 케이 보호자랰ㅋㅋㅋ미친 뒤지게 귀엽냨ㅋㅋㅋ
-아덴 어느 나라 출신인지 아시는 분?
-ㅋㅋㅋㅋㅋㅋ세계정복ㅋㅋㅋ초딩때 이후로 오랜만에 들어봄
-도화 별명 음유시인이래ㅜㅠㅜㅜㅜ딱 맞는 별명이자나ㅜㅜㅜ
-아름다운 음유시인님ㅠㅠㅠㅠㅠ
-ㅋㅋㅋㅋㅋ상현이 소갯말 절대로 본인이 적은 거 아니닼ㅋㅋㅋㅋㅋ어떤 멤버가 추천한거옄ㅋㅋㅋ
딱 한 줄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포스트잇이라 표어와 같은 짤막한 소개말이었지만 오히려 줄이고 줄여 간단히 써둔 것이 시청자들에게 어필이 되었다.
이를 본 멤버들의 입가에 사르륵 미소가 맺혔다.
56번과 91번 그룹의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그들의 무대가 끝날 때까지 멈춰있던 하트 아이콘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팀의 VCR이 재생되었고 이들은 숨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 * *
“하아…….”
서도화가 긴 숨을 내쉬었다. 이번 공연은 확실히 다섯일 때보단 크게 긴장되지 않았다.
물론 도중에 하트 아이콘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엔 무척 당황했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고선 이게 오히려 너무 많은 점수를 받아 생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아예 고장이 난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하트 아이콘은 네 번째 팀의 공연이 시작하자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 더워.”
서도화가 땀에 젖은 셔츠를 펄럭이며 대기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네 번째, 다섯 번째 팀이 공연을 치르고 내려갔다. 그리고 지금은 여섯 번째 팀의 VCR이 재생되는 중이었다.
서도화는 모니터로 상당히 화기애애한 그들의 VCR을 지켜보다 이병수에게 물었다.
“형 저희 반응 어땠어요?”
아까 전 엔딩요정 때를 제외하곤 채팅창은 56번에 대한 칭찬과 91번에 대한 조롱 등으로 혼란스러웠던지라 전체적인 반응이 어땠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서도화의 물음에 이병수는 획 그를 돌아보더니 활짝 웃었다. 무척 기뻐 보이는 미소였다.
“완전 최고였지! 내가 말했지? 너희 인기 쩐다고! 걱정할 것 하나 없어. 너희 내가 장담하는데 이번에 1위도 노려볼 만해!”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진짜라니, ……음.”
이병수는 확신하며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민망하게 웃었다.
“아무튼 너희 오늘 정말 너무 잘했어. 먹고 싶은 거 있어? 다 말해! 분명히 순위 확 오를 테니까. 뭐든지 사준다.”
“진짜요? 그럼 저 돼지국밥!”
“구수~하네!”
주상현이 해맑게 웃으며 이병수와 대화했다.
주상현도 한야도 서도화도 연습생 생활을 오래 한 이들은 이병수가 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는지 알고 있다.
1위는 아마 정해져 있으리라. 근처까지 가서 압도적으로 잘하지 않는 한 정해진 순위를 바꾸는 건 몹시 힘들겠지.
“돼지국밥이랑, 수육도 추가돼요?”
“아 당연하지! 근데 국밥으로 되겠어? 형은 소고기 이런 거 사주려고 했는데.”
“아, 소고기는 나중에 1위 해서 더 비싼 걸로 얻어먹으려고요.”
주상현과 이병수의 대화를 들으며 한야의 표정은 천천히 굳어갔다.
* * *
어느새 모든 팀의 공연이 끝났다.
최종 순위와 탈락자 발표만을 남겨두고 재정비 겸 주어진 휴식 시간, 서도화와 멤버들은 한결 여유롭게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고작 세 팀 봤다고 1위까지 노려볼 만하다며 야단법석을 떨던 이병수의 말은 옳았다.
객관적으로 하트 아이콘, 현장, 시청자 반응을 보았을 때 56번과 91번 팀은 좋은 순위를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초반 세 팀의 기세가 너무 강했던 터라 비교적 뒤의 그룹이 힘을 못 썼다.
오늘은 25팀의 공연밖에 없었음에도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시청자 수, 그리고 그와 함께 더는 경련하지 않고 안정을 되찾는 하트 아이콘.
솔직히 서도화가 보기에도 뒷 순서의 공연 중엔 첫 번째와 두 번째만큼 임팩트 있는 무대가 없었다. VCR까지 포함해서.
누가 봐도 VCR이 가장 재밌게 뽑힌 건 세 번째 팀, 서도화네 팀이었다.
그 외엔 다들 화기애애하게 싸우지 않고 경쟁을 한 데다 실력도 비등비등해서 뒤로 갈수록 영상이 지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주로 분량 뽑겠다고 휴게실에서 탁구나 하던 연습생들의 VCR이 그랬다.
당연하게도 경쟁상대와 경쟁은커녕 탁구 놀이만 하는데 뭐 재밌는 영상이 만들어질까.
그런 이유로 뒷 순서는 재미도 관심도 크게 끌지 못했다.
서도화네 팀은 안전하게 순위권인 팀이었다.
‘1위는 안 될 것 같다고 했고.’
그 언저리까지는 가려나. 한 5위 안팎. 25팀 중 5위면 꽤 합리적이지 않나?
이번에도 탈락은 안전하게 면했음을 예상한 서도화가 태평하게 제 순위를 생각해보고 있을 때, 제작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3분 뒤, 스트리밍 재개합니다. 소속사 관계자분들은 화면 밖으로 나가주시고 연습생들은 제자리에 앉아 조용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역시나 일하러 온 사람들답게 연습생들은 떠들다가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제자리에 착석했다.
제작진들이 빠르게 인원 체크를 시작했고 무대 위로 서영이 올라왔다.
그리고 대기 구간 마지막 광고가 끝나며 스트리밍이 재개되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 서영이 멘트했다.
“팝넷 사상 최대 규모의 라이브 프로젝트.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밀리언 아이돌. 3라운드 순위 발표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자 과연 어떤 결과가 있을지!”
카메라에 비친 참가자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이렇게 순위가 예상되던 때가 있을까.
아니, 다른 그룹의 순위는 몰라도 상위 3위까지의 순위는 굳이 보지 않아도 모두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3라운드의 탈락자 10팀은 과연 누가 될지!”
이를 아는 듯 서영은 조금 더 시간을 끌며 긴장을 유도했다. 그리고 시청자들의 답답함이 극에 달했을 때, 드디어 그녀의 뒤 화면으로 순위 발표 슬롯이 나타났다.
서영이 호쾌하게 말했다.
“24위부터 15위까지 공개합니다!”
“와.”
“역시.”
그녀의 말에 연습생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탄식했다. 역시 조명받지 못할 탈락자들에겐 가차없다. 서영이 싱긋 웃으며 화면이 보이게끔 옆으로 비켜섰다.
띠링! 띠링!
코인 소리와 함께 빠르게 빈 슬롯이 뒤집히며 해당 순위의 그룹 번호를 공개했다.
탈락자들의 번호였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서영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거나 따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떤 코멘트도 없이 바로 진행이 이어졌다.
“14위부터 6위까지의 순위 공개합니다.”
서도화의 시선이 슬롯의 윗 칸으로 향했다. 탈락자 발표는 빠르게 끝이 났고 여기서부턴 56번과 91번 팀의 그룹 번호가 나올 수도 있었다.
‘5위 안이었으면 좋겠지만.’
또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서도화가 이 세계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영문도 모른 채 한 달이나 지난 시점이었던 것처럼.
데스티니에서 잘리고 간신히 들어온 소속사에 용사와 마왕이 있었던 것처럼.
어떤 것이든 기대하지 않고 최악의 순위를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서도화가 생각하는 최악의 순위는 6위였다. 그 이하는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이번 슬롯 안에 56번과 91번 팀은 없었다.
알게 모르게 굳어있던 멤버들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저 이제 여한이 없어요. 이제 돌아가도 돼요.”
주상현이 감격하며 말했다. 91번 또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5위. 5위부턴 서영이 한 팀, 한 팀 시간을 들여 소개해주었다.
다섯 개의 빈 슬롯이 아래에서부터 차례대로 채워졌다.
서도화의 시선은 거기서도 유독 화려하게 꾸며진 1, 2, 3위 세 슬롯으로 향해있었다.
저기까지 올라가면 참 좋겠는데.
이병수의 씁쓸한 표정을 보면 안 되겠지? 이미 정해진 자리일 수도 있고.
서도화가 주상현을 보았다. 주상현은 그냥 5위, 4위를 보고 있었다.
이미 겪어본 경험이 있어 아예 윗 순위까지는 생각지 않는 듯했다. 서도화의 희망이 한풀 더 꺾였다.
그는 한야의 표정을 살폈다.
한야는 아까 전부터 표정이 굳어있었다. 평소의 느긋한 미소는 순위 발표에 이르러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슬롯에 그룹의 번호가 채워졌다.
“어?”
주상현의 목소리에 서도화가 슬롯을 바라보았다.
“어?”
그리고 서도화도 주상현과 같은 목소리를 냈다.
5위와 4위에 56번과 91번 팀이 없었다.
더 위라고? 진짜로? 이게 가능해?
서도화가 주상현을 보았으나 주상현도 놀랐는지 슬롯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다시 들리는 서영의 목소리에 서도화가 시선을 바로했다.
“3위 공개합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3위 슬롯의 주인공이 공개되었다. 서도화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3위도 이들이 아니었다.
“2위 공개합니다.”
2위의 슬롯이 뒤집혔다. 그와 함께 서도화는 저도 모르게 양손을 들어 올려 박수를 칠 뻔했다.
56번과 91번 그룹, 그들의 번호가 은박으로 장식된 2위 슬롯에 떡하니 안착해 있었다.
“56번과 91번 그룹. 2위 축하드립니다! 두 그룹이 힘을 합쳐 <건반>을 아주 멋있게 소화해냈죠.”
두 그룹은 한동안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이 두 그룹이 화려한 슬롯을 차지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