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우리가 2위였다.
예상치 못한 쾌거. 이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아덴이었다.
“됐다!”
아덴의 양손이 멤버들을 감쌌다. 그제야 멤버들은 결국 자신들이 해냈음을 알았다.
2위다. 실력이 있어도, 인기가 생겨도 못 올라갈 줄 알았던 2위였다.
‘어떻게 이게 되지?’
“우리 2위! 2위에요! 형들!”
서도화는 양쪽에서 아덴과 주상현이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게 되네. 우승을 향해 달리긴 했지만 현실적으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우승이 노려봄직한 현실로 다가왔다. 물론 91번과 함께 이룬 성과지만 저 화려한 슬롯에 56번이 새겨졌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멤버들의 말도, 서영의 진행도, 이 상황까지 모든 것이 기뻐서 오히려 머릿속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고 그저 얼떨떨했다.
그래서 케이가 당연하다는 듯 뿌듯하게 웃는 것도 한야의 표정이 여전히 굳어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사이 대망의 3라운드 1위가 발표되었다.
1위는 데스티니와 그들의 짝그룹이 차지했다.
이제 1위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데스티니와 감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의 짝그룹. 두 그룹의 상반된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이로서 3라운드는 모두 끝이 났습니다. 탈락한 10팀에게도 그간 고생 많았다고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정말 고생하셨고요. 다음 4라운드는 14팀. 총 28그룹이 참가해 경연을 치르게 됩니다.”
28그룹. 정말 수가 많이 줄었다. 처음 이 현장을 꽉꽉 채우던 연습생들이 순식간에 반의 반으로 줄었다. 초반만 해도 어떻게 저런 팀이 살아남았지? 싶었던 그룹은 이제 없다.
여기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말 말 그대로 살아남을 만한 그룹만 살아남았다.
이젠 한 팀 한 팀 넘기기가 무척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게 넘어서기 힘든 그룹들의 최정상에 56번이 있다. 3라운드 만에 버젓이 우승 후보가 되었다.
그 사실이 서도화는 무척 벅차올랐다.
서영은 뚫어져라 화면 속 자신의 번호를 보고 있는 서도화를 보았다. 이번 밀리언 아이돌에서 소래담, 주상현과 함께 천재라 일컬어지는 연습생.
하지만 천재라도 무대에 오를 수 있음을 순수하게 즐거워했고 빠르게 올라가는 순위에 숨김없이 기뻐했다.
아직 촬영분이 방영되지 않았음에도 엿보이는 저 모습에 많은 팬들이 이끌린 것이리라.
주상현은 프로젝트 그룹 출신, 소래담은 100만 너튜버, 데스티니 소속 1번 그룹은 밀리언 아이돌이 시작되기 전 이미 데스티니의 넥스트 아이돌로 발표가 났던 터라 이미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서도화는 아무런 배경 없이 방송에도 나오지 않은 단 3라운드 만에 연습생들 중 가장 언급률이 높은 연습생이 되었다.
오로지 실력, 그리고 그가 가진 매력 덕분이었다.
‘개인 참가였어도 잘 했겠는데?’
원래 데스티니 소속이었고 그 당시 연습생임에도 소수의 팬들이 있었다고 하던가? 스타성 있는 인물은 떡잎부터 발견되는 법.
서도화는 그룹 참가가 아닌 전 시즌처럼 개인 참가였어도 상당한 수혜를 받았을 거다.
서영은 유독 눈에 띄는 연습생에 대한 감상을 마치며 진행을 계속했다.
“여기서 베네핏이 빠질 수는 없겠죠?”
공개된 순위로 소란스럽던 연습생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반대로 이를 지켜보던 채팅창은 전보다 빠르게 넘어갔다. 주로 제작진에 대한 가벼운 협박이 많았다.
-이번엔 제발 베네핏다운 베네핏 좀 주길…
-저번처럼 있으나마나인 거면 하차합니다…너무 답답해요..ㅠ
-쓸모도 없는 베네핏은 왜 주는 거임?ㅋㅋㅋ그냥 저번처럼 1위부터 5위까지 데리고 펜션이나 가는 거 보여줭
베네핏에 대한 불만이 채팅창을 꽉 채웠다. 그럴만했다.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부실해지는 베네핏의 내용이 문제였다.
더구나 바로 직전의 베네핏이었던 짝그룹 지정이 합숙에 가서 별 쓸모없었다는 게 밝혀지자 더더욱 베네핏의 존재의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서영은 이를 예상한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3라운드의 베네핏 대상은요. 바로 합격자 전원입니다.”
이번에 나오는 베네핏은 1라운드의 오프닝 메인 스테이지 베네핏과 비등할 정도로 연습생들에게 이득이 될 것이었다.
합격자 전원에게 베네핏 지급이라는 말에 연습생들은 역으로 불안한 듯 웅성이기 시작했다.
‘또 뭘 하려고……?’
아무리 베네핏이라지만 팝넷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을 할 리가 없다. 시청자만큼이나 팝넷에 대한 신뢰가 없는 연습생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엔 베네핏이라기엔 뭣한, 하지만 지금의 연습생들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베네핏, 공개합니다.”
서영이 옆으로 비켜섰고 그녀가 가렸던 화면에 커다랗게 글자가 나타났다.
[그룹명 공개]
“어?”
“지, 진짜?”
연습생들 사이 실없는 되물음들이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베네핏, 아니 이걸 베네핏이라고 할 수 있나? 생각지도 못한 보상이었다.
지금까지 번호로만 불리던 연습생들, 그러나 그룹명이 공개되면 이젠 온전한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게 된다. 그럼 밀리언 아이돌에서 성과만 낸다면 번호가 아닌 그룹 이름 자체의 인지도가 월등히 올라간 채 데뷔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연습생들이 이해한 그대로가 맞다면 이는 정말로, 무척 좋은 베네핏이었다.
‘하긴 이제 번호로 불러야 할 만큼 그룹 수가 많지도 않으니.’
100그룹일 때면 몰라도 이미 그룹 대부분의 얼굴이 시청자들에게 각인된 상황에 28그룹 이름이 공개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서도화는 납득하면서도 난감한 듯 한야를 바라보았다.
‘…근데 우리 아직 그룹명 정하지 않았잖아.’
이런 베네핏이면 미리 알려주면 좋았을 텐데. 어쩌나.
“…케이파이브.”
안 돼! 뒤에서 케이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만은 안 돼. 지금 공개되는 거면 어쩌지. 서도화의 고민은 이어진 서영의 말에 의해 말끔히 사라졌다.
잠시 화색이 되었던 연습생들의 얼굴은 다시 우중충해졌다.
“3라운드까지 통과한 합격자들에게 드리는 베네핏, 이후 4라운드부터의 탈락자들은 무대 위에서 자신의 그룹명을 공개할 수 있습니다.”
말인즉슨 3라운드까지 살아남은 노고를 인정해서 탈락할 때 위로 삼아 그룹명 공개할 수 있게 해줄게. 였다.
즉, 탈락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베네핏.
결코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연습생들을 기만하는 베네핏이었다.
물론 탈락하면 이 베네핏이 무척 고마워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연습생들 모두 꽤 떨떠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번 라운드 3위까지의 그룹에게는 또 다른 베네핏이 주어지니 시청자 여러분! 4라운드를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베네핏?
서도화는 1위부터 5위까지의 그룹이 1라운드 이후 따로 펜션에서 촬영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 베네핏이면 좋을 텐데.’
경쟁한다고 정신없어 뽑지 못했던 합숙의 분량을 그런 곳에서 뽑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4라운드의 주제를 발표해야겠죠?”
서도화가 싱긋 웃는 서영을 보았다.
“4라운드부터는 여러분을 응원해주시고 계시는 팬 분들의 앞에서 경연을 치르게 됩니다. 처음으로 밀리언 팬 분들과 대면하는 자리이니만큼 그에 맞는 주제를 준비했습니다. 4라운드의 주제는 바로!”
서영의 뒤로 커다란 글씨가 나타났다.
[밀리언의 선곡]
“밀리언 팬 분들의 선곡입니다. 앞으로 3일간 팬 분들에게 여러분이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곡을 신청받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장 많은 신청을 받은 곡을 다음 무대에서 선보이게 될 겁니다.”
서영은 시청자들에게 곡을 신청할 수 있는 홈페이지 주소를 소개했다.
“시청자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상으로 3라운드 스트리밍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합격자 연습생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시청자 여러분, 저희는 다음 라운드로 찾아뵙겠습니다.”
서영의 말이 끝나고 현장에 우렁차게 엔딩 BGM이 울려 퍼졌다.
“하아.”
다 끝났다. 누군가의 깊은 한숨과 함께 56번과 91번은 벌떡 일어나 각자의 스태프에게로 향했다. 지금까지 같이 했는데 끝까지 남보다 못한 사이로 끝이 났다.
“수고했어. 진짜 고생했어.”
“형이 더 고생했지.”
“1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바로 뒤에서 함께한 그룹과 부둥켜안고 아쉬움을 달래는 소래담네 그룹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이병수를 기다리며 서도화가 멍하니 그들을 보고 있자 이를 눈치챈 소래담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찡긋 윙크했다.
다른 그룹 멤버를 부둥켜안은 채 날리는 몹시 부담스러운 미소와 윙크. 아까 전 멤버를 향해 보여주던 아쉬운 목소리와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상당히 즐거워보였다.
별로 안 아쉬운데 예의상 연기한 건가? 서도화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서도화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소래담은 한 번 더 윙크했다. 서도화는 이유를 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보았다.
“…….”
데스티니 소속 1번 그룹의 멤버가 뚫어지게 서도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코 그냥 쳐다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서도화는 그가 누군지 매우 잘 안다. 5년이나 지나 떠올리는 이름임에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었다.
장우진.
서도화가 무단결석하기 전부터, 그가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착실히 연습을 이어가던 때부터 서도화를 지금과 같이 매섭게 쳐다보던 이였다.
데스티니 시절 서도화를 비하하는 의미로 쓰이던 별명 연퀴벌레를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이곳에서 재회한 이후엔 56번 그룹을 없는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 장우진이 경연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서도화와 눈이 마주쳤다. 장우진의 곁에 있던 1번 그룹 멤버들 역시 못마땅한 얼굴로 이곳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순위. 부동의 1위 그룹 데스티니의 멤버들이 56번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어쩌라고.’
서도화가 그들을 빤히 보고 있자 장우진은 픽 그를 비웃더니 고개를 돌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톡톡 화면을 두드렸다.
“뭔데? 쟤.”
서도화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아덴이 물었다. 서도화는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겼다.
“얘들아, 방금 3위까지 베네핏 내용 듣고 왔거든? 잠시 논의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오늘은 숙소 말고 바로 회사로 갈게.”
“넵!”
이병수를 따라 현장을 벗어나며 서도화는 다시 장우진과 데스티니 멤버들을 쳐다보았다.
뭘까 이 쎄한 느낌. 장우진의 비웃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