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부터 시작하는 아이돌 생활-75화 (75/270)

제75화

“이건 이제 빼도 되지 않아요?”

“뺄 건 빼고 정하시지…….”

“아니 또 조합해보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타악-. 터억-.

김유진은 멤버들에 의해 50대 부장의 회심의 아이디어들이 담긴 그룹명들이 가차없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우, 우리 애들이 좀 성격이 쎄기는 하네.”

부장이 민망하게 웃으며 쓰레기통에 박힌 제 서류를 보았다.

“요즘 말로 그걸 뭐라고 하지? 그, 요즘 우리 애들 보고 팬들이 하던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더듬거리는 부장에게 김유진이 툭 말했다.

“기 존나 쎔이요?”

“아, 예예. 그거……. 하하.”

부장의 웃음에 애환이 담긴 듯한 건 김유진의 착각일까.

“난 괜찮아요~”

애써 괜찮은 척하는 부장은 또 한 번 미련스레 쓰레기통에 박힌 제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가 바로 사사오입, 케이파이브를 생각해 제출한 장본인이었다.

서류엔 분명 제출자인 자신의 이름이 번듯하게 들어가 있었을 것인데.

이 회사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부장의 이름이 떡하니 들어가 있었을 것인데. 그걸 보고도 멤버들은 거침없이 제 의견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옛날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쿨하네…….”

나름 멤버들에 대한 애정으로 지은 이름들이었다.

케이파이브는 총처럼 강하고 빠르게 성장하라고, 사사오입은 케이와 다른 멤버들의 사이가 조금씩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한 명이라도 빠지면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촌스럽다는 건 알지만 원래 그룹 이름이라는 게 익숙해지면 촌스러운 것도 모르게 되니 정말 괜찮은 이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근 읽었던 베스트셀러 [요즘 것들과의 대화법]에선 이렇게 적혀있었다.

요즘 것들은 눈치를 보지 않고 의견을 말한다고, 그렇기에 수평적 조직에서 더더욱 능력을 발휘한다고.

눈치를 보게 하면 안 된다. 의견을 말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특히 이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엔터 업계에선 더더욱. 비록 자신이 깊게 생각했던 의견들이 빠르게 쓰레기통에 처박혔더라도-

“‘악동가도’라니 세상에.”

“그룹 이름이에요? 악동가도? 아니 와, 심하네…….”

주상현이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보며 말하자 서도화가 힐끔 서류 속 그룹명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이 또한 부장의 의견이었다.

이 악동들이 자신만의 가도를 걷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다.

부장은 괜히 코를 한번 훌쩍이곤 깨끗하게 마음을 비웠다. 괜찮다. 그룹명 짓는 센스는 없어도 영업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니까.

부장은 인맥도 넓고 영업도 잘한다고 이 회사에 스카우트된 인재였다.

그 모습을 본 한야가 슬그머니 쓰레기통에서 ‘악동가도’가 적힌 종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 배려가 오히려 부장의 서러움을 더했다.

김유진이 부장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한편 부장만큼 멤버들의 눈치를 보는 이가 또 있었다.

“나는…….”

케이가 멤버들을 힐끔거리며 은근슬쩍 케이파이브가 대충 휘갈겨진 종이를 내밀고 있었다.

이것 좀 보라고 위풍당당하게 말하고 싶은데 멤버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른 서류들을 살피고 있었다.

표정들이 얼마나 심각한지 큰 소리로 말해도 다들 제대로 듣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이 몸이 마왕인데 누가 나의 말을 무시할까!’

케이의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

그러다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슬그머니 열었던 입을 닫았다.

아무도 제 말을 무시할 수 없지만 왠지 멤버들은 무시할 것 같았다.

케이는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시무룩에 일가견 있는 주상현이 그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 형 왜 그러세요?”

케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어느새 멤버들이 서류 보기를 멈추고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

케이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역시 주상현. 가히 인간 주제에 마왕의 수하가 될 자격을 얻은 자 답도다.

그는 주상현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종이를 내밀었다. 동그랬던 주상현의 눈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다.

[케이파이브]

서도화가 케이를 달랠 겸 대충 휘갈겼던 글자가 다시 멤버들의 눈에 들어왔다.

“내 생각은 여전하다. 케이파이브만 한 이름은 없다.”

결국 정면으로 마주할 때가 왔나.

질질 끌며 케이를 달래는 수단으로 썼던 케이파이브.

그러나 지금 당장 그룹명을 정해야 하는 상황에 언제까지고 이에 대한 결정을 미룰 순 없었다.

김유진은 부장을 위로하던 손을 치웠다. 그러곤 서도화와 한야를 바라보았다.

‘얘들아.’

케이는 저 두 사람의 말에 가장 잘 설득되곤 했으니까.

무조건 케이파이브는 포기해야 한다.

케이에겐 미안하지만 평생 멤버들이 가져가야 하는 이름인 만큼 정에 이끌려 케이파이브로 섣불리 지을 수는 없었다.

서도화와 한야가 김유진의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도화는 작게 한숨을 쉬며 케이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보았다.

“네 의견 잘 알겠어.”

그러곤 무심한 말투로 케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그룹명을 꼭 케이파이브로 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납득되면 그걸로 할게.”

서도화의 물음에 케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딱 보면 알잖는가! 케이파이브! 이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케이’ 파이브.

마왕이 이 그룹에 속해있음을 한눈에 알릴 수 있는 이름.

발음도 좋고 보기만 해도 벅차오를 정도로 영광스러운데 이것 외에 이유가 따로 뭐가 필요한가.

그러나 그는 서도화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설득을 열심히 떠올렸다.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을 위해 열심히 한 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엔 케이파이브를 쟁취하려 열심히 했지만 이후엔 이들에게 협조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려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케이파이브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멋있지 않은가!’

케이의 말에 가장 먼저 대답한 건 아덴이었다.

“하 참!”

아덴의 입에서 나온 건 어이없다는 비웃음이었다. 케이가 표정을 가라앉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덴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얼굴로 다다다 쏘아붙이듯 말했다.

“야 열심히 한 걸로 이름을 정하는 거면 케이파이브가 아니라 상현파이브로 하는 게 더 맞지.”

“……뭐?”

“…네?”

“내 말이 틀렸냐? 한야파이브, 도화파이브, 대표님파이브, 열심히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케이파이브는 좀 아니지?”

시종일관 민폐였던 주제에.

아덴이 케이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애초에 그는 케이가 얼마나 열심히 했던 그 노력을 참작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 정도 노력은 당분간 이곳에 살아야 하는 이상 당연한 것이고 사실 노력했던 시간보단 멤버들에게 민폐 끼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저쪽 세계에서는 세상을 멸망시키고 이곳에서는 제 동료를 고생시키는 원수를 왜 이해해주고 인정해줘야 하는가?

아덴과 케이는 지난 합숙, 등산이 끝난 후 정상에서 처음으로 단둘이 따로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계약을 했다.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사람은 케이였다.

-원래의 세상에 돌아가기까지 이 세계를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뭐?

-이 세상의 인간들은 그 세상의 인간들과는 달라. 나를 버리고 복수할 이도 이곳엔 없다. 지금은 힘도 없지. 그러니 난 돌아가는 날까지 인간처럼 살 것이다. 인간들에게 협조할 거다.

이 말을 꺼낼 때 케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척 씁쓸해 보였다.

-그러니 네 놈도 당분간 나를 위협하는 짓을 관두도록. 내가 이 그룹에서 사라진다면 이제 꽤 곤란해지지 않은가?

케이가 아덴을 보며 비소를 날렸다.

그는 자신이 없어진다면 이 그룹에 큰 타격이 온다는 걸 안다. 그래서 아덴에게 이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다.

모두가 잠든 밤마다 살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덴의 시선을 느꼈다.

마치 야수 앞의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언제 죽일까. 어떻게 찢어발길까.

아덴이 충분히 할 수 있었음에도 안 한 건 케이를 다치게 하는 행위 자체가 사회에서, 그리고 멤버들에게 용인될 수 없는 짓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아덴은 말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찢어 죽일 거다. 민폐만 부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그렇게 말했었는데.

아덴은 한숨을 쉬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또 눈치 없이 이번엔 그룹명을 가지고 민폐를 부리고 있다.

찢어발겨도 되는 부분인가?

“케, 케이파이브는……!”

당황하는 케이의 말을 끊고 아덴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다들 널 얼마나 도왔는데.”

“그, 그건!”

케이의 입이 꾹 다물렸다.

아덴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멤버들도 열심히 했겠지만 내가 제일 열심히 했다. 난 새벽까지도 나와서 했다. 라고 자신을 변호하기엔 멤버들이 오로지 저를 위해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이 더 컸다.

케이는 힘 빠진 얼굴로 망설이다 마지못해 말했다.

“……그렇다면 한야파이브가 좋다.”

“……뭐?”

어차피 뺏길 이름이면 짜증 나는 음유시인 말고, 자신의 수하가 될 예정인 주상현 말고 이 그룹의 수장의 이름을 올리는 게 그나마 나았다.

회의실을 잠식한 정적 속에서 서도화는 한야를 바라보았다.

한야파이브라니, 당연히 거절하겠지.

말이 되는 이름이어야지. 에이 이게 뭐야.

그러나 잠시 후, 한야는 잠시 망설이다가 화사하게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안, 받아들일게.”

“…어?”

“…아, 안 돼.”

“진짜요?”

서도화와 김유진, 주상현에게서 차례대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고마워 케이야.”

“별말씀을요. 소중히 여기십시오.”

한야는 무척 기쁜 듯 웃으며 케이에게 인사까지 했다. 저 미소에 샤방샤방 꽃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곧 한야는 싱글벙글 말했다.

“그래서 저희 그룹명 뭐할까요?”

“……그대여.”

케이의 얼굴에 절망이 들어찼다.

그렇지. 받아들인다고 했지 그 이름으로 한다고는 안 했다.

케이를 제외한 모두가 안도감에 스르르 표정이 풀렸다.

세상 부드러운 미소, 그와 달리 단호하기 그지없는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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