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짝꿍이었던 그룹을 제외하면 서로가 처음인 자리. 촬영을 리드하는 건 1번 그룹의 리더 최여운과 49번 그룹의 수장 소래담이었다.
“우선 우리 아직 서로 잘 모르는 사이니까 자기소개부터 해볼까요?”
“그럴까요? 그럼 앞번호 순으로 쭉 해보죠. 아, 나부터구나. 저부터 할게요.”
최여운이 흠흠 작게 목을 가다듬더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1번 그룹의 리더를 맡고 있는 올해 23살 최여운이라고 합니다.”
“아예 처음 보는 분들은 없는 것 같아요.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친해진 분들도 있고 또 원래 알던 동생도 있고.”
최여운이 서도화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서도화에게 아는 티를 내면서도 딱히 눈치를 주지 않았다.
그냥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동생을 대하듯 행동할 뿐이었다. 도로시와 비등할 정도로 서도화를 믿고 아꼈던 멤버이지만 도로시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래서 서도화는 더더욱 그와 눈을 맞추기가 힘이 들었다.
“함께 무대를 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고 기대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최여운이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고 그 다음을 1번과 짝꿍 그룹이었던 15번 그룹의 멤버 단이 반쯤 손을 들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15번 그룹, 단이라고 합니다.”
단은 집중해서 들어야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아직 이름만 말했는데 목덜미까지 빨개질 정도로 무척 부끄럼이 많은 듯했다.
“그으… 올해 21살이고요. 그룹의 메인댄서를 맡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
소래담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작게 손뼉을 쳤다. 반삭에 스크래치. 웃음기 하나 없는 매서운 무표정.
반항아 이미지겠거니 확신했는데 입을 여니 정반대의 캐릭터였다.
서둘러 자기소개를 마친 후에도 단은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입술을 잘근거리며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다음은…….”
최여운이 멤버들을 살피며 다음 순서를 찾았다. 그러자 ‘아!’ 소래담이 큰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저는 일어서서 자기소개하겠습니다!”
소래담의 큰 목소리에 연습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래담이 씨익 웃으며 알 수 없는 몸짓을 했다.
“소소한 매일의 담소! 줄여서 소래담입니다! 아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유명한 동영상 플랫폼에서 채널을 운영하고 있고요! 주로 랩을 하고 있습니다. 49번 그룹에서도 리더 겸 랩, 그리고 편곡을 담당하고 있어요. 아, 본명은 강현욱, 31살입니다. 하하! 아이돌 시작하기엔 나이가 좀 되나요? 하하하!”
소래담은 힘차게 소개를 끝내더니 갑자기 리듬을 타며 비트박스를 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러곤 또 갑자기 랩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랩엔 필터링 되지 않은 욕이 섞여 있었다.
그렇다. 사실 소래담은 단순 재미로 경연 프로그램에 참여할 만큼 노빠꾸 또라이 같은 성격이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 100만 구독자를 보유하게 된 이였다.
뜬금없는 상황에 연습생들도 제작진들도 당황하며 동요하는 찰나, 서도화가 ‘오’ 하는 탄성과 함께 리듬을 타며 소래담의 랩에 호응해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습생들의 눈동자가 더욱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극강의 천재 이미지. 기 전나 쎈 그룹의 멤버, 이중 제일 호응 안 할 것같이 생긴 서도화가 그럭저럭 뜬금없고 민망한 소래담의 랩을 즐기고 있었다.
그에 소래담은 신이 나서 더 열심히 랩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서도화는 이전 몸담았던 파티가 용사 파티이다 보니 이런 개성 있는 또라이를 상대하는 데에 몹시 익숙한 사람이었다.
또라이를 상대하는 법은 간단하다. 쟤를 고칠 생각 말고 내가 즐기면 된다.
소래담은 즐기는 서도화가 의외라는 듯 흥미로워하며 랩을 마무리했다.
이 강렬한 소개 뒤 자기소개를 이어나갈 연습생은 다름 아닌 서도화였다.
서도화는 소래담의 소개에 재밌어하던 것이 무색하게 본인의 소개는 무척 담백하게 끝을 냈다.
“안녕하세요. 56번 그룹의 메인보컬 서도화입니다. 올해 18살이고 메인보컬이지만 춤도 좀 춥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너무 평범해서 뭐라 할 말이 없는 자기소개였다. 하필 소래담의 바로 뒤라 좀 부담이 되었던 서도화는 자신도 서서 노래나 부를까 고민해보았지만 이내 관두기로 했다.
모두의 시선이 주목된 상황에 함부로 노래 불렀다가 다들 정화에 영향이라도 받으면 어떡하나.
대신 소래담이 그의 소개에 한 마디 덧붙여주었다.
“오, 그럼 우리 또화 씨가 이 팀 막내구나!”
“그래요?”
“어! 그렇네? 도화 씨가 가장 어리네요?”
“와 십대야. 좀 부럽다.”
“그냥 도화라고 불러도 돼요?”
“네, 얼마든지 불러주세요.”
서도화는 제 나이에 감탄하는 연습생들에게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연습생들의 나이를 몰라서 생각 못 했는데 서도화가 이 팀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였다.
멤버들이 이렇게 호응해주는 데 가만히 있자니 뭔가 성의가 없어 보여 그는 막내다운 말을 덧붙였다.
“제가 막내는 처음 해보는데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민망함에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습생들의 시선이 서도화에게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막내는 둘째치고 그들은 사실 서도화의 존재가 아직 낯설고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저 도화랑 처음 대화 나눠봐요.”
“어 저도요. 합숙 때 마주친 적이 거의 없어요. 약간 56번 그룹 멤버 분들 전부가 좀 신비주의 이미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그런 느낌이 있었죠. 합숙 때부터.”
그때 소래담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저는 3라운드 본방 전에 대화 좀 해봤지요!”
그러나 소래담도 56번과 서도화가 다가가기 어려웠다는 건 부정하지 않았다.
1라운드부터 보컬 천재가 나타났다며 떠들썩하게 기사가 난 연습생이 서도화였다. 그 말을 증명하듯 1라운드, 2, 3라운드 모두 완벽한 무대를 보여주었고 그에 따라 밀리언 아이돌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습생이 되었다.
같은 연습생이지만 다가가기도 말 붙이기도 어려운 성과를 가진 연습생.
거기다 그런 천재 연습생은 리허설 때도 합숙 때도 오로지 자신의 멤버들이랑만 다녔다.
다른 연습생들처럼 친목을 쌓지도, 휴게실에서 여가를 보내며 분량을 뽑지도 않았다.
3라운드가 끝나고 4라운드를 치르기 직전이었지만 56번과 서도화는 여전히 연습생들 사이에선 베일에 싸여 있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같이 출연하는 연습생들에게도 그렇기에 서도화가 말하는 모습은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를 알 리 없는 서도화는 그저 여전히 자신에게 달라붙은 시선들에 부담을 느끼며 다음 타자 72번 그룹의 지우진을 쳐다보았다.
지우진은 그와 마주치자마자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서도화를 빤히 쳐다봤다는 걸 방금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72번 그룹의 지우진입니다! 22살이고 메인보컬을 맡고 있습니다. 어…….”
지우진은 차분히 이어가던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다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서도화와 눈이 마주쳤지만 이번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같은 메인보컬인 도화 씨와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같은 팀으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쁘네요.”
자신을 콕 집어 말할 줄은 몰랐는데.
지우진의 말에 서도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꾸벅 가볍게 숙였다.
91번에게 워낙 당한 게 많아 그 트라우마가 남아있었나 보다. 자꾸 쳐다보길래 견제하는 건가 했었는데 말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지우진은 정말로 서도화에게 상당히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우진 다음은 91번의 연습생. 91번 멤버들 중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동글동글한 성격을 가진 이였다.
“안녕하세요. 91번 그룹의 송서입니다. 저는 어, 올해 22살이고요. 잘하는 건 협조하기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3일간 잘 부탁드려요.”
서도화는 송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합숙 때도 91번 중에서도 송서만 꼬박꼬박 56번에게 인사해주었다.
듣자니 송서는 주상현이 회사를 나온 후 그룹에 합류한 멤버로 주상현 괴롭힘 사건과는 연관이 없는 멤버였다.
송서까지 자리에 앉자 제작진이 나서서 진행을 이어갔다.
“네, 여러분들의 자기소개 잘 들었고요. 여러분들이 왜 이곳에 모였는지 아시나요?”
리허설, 경연 등에서 들었던 것과는 다른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의 물음에 연습생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경연 최상위권, 밀리언 아이돌 우승 후보들의 목소리는 당당하고 힘찼다. 큰 목소리에 놀란 제작진은 소리 내어 웃고는 말했다.
“여러분들은 지난 라운드에서 베네핏을 받은 그룹을 대표하여 모인 멤버들이시죠. 베네핏에 따라 앞으로 이 여섯 명이서 또 다른 팀을 이뤄서 4라운드의 오프닝 무대를 준비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이 숙소로 들어오면서 합숙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실 텐데요.”
제작진의 말에 91번 그룹의 송서와 72번 그룹의 지우진이 움찔거리며 옅게 몸을 떨었다.
유난히 힘들었던 합숙. 짝꿍 그룹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이를 갈고 연습해도 좋지 못했던 결과들.
그렇게 제대로 된 파트 하나 받지 못했음에도 이들의 순위는 최상위권이었다.
이번 3라운드의 성과는 자신의 그룹보단 짝꿍 그룹의 덕으로 받은 순위라는 게 너무 분명했다. 그래서 경연이 끝난 후에도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무척 분했다.
그래서 이번 합숙도 사실 무척 걱정되었던 두 사람이었다.
베네핏이라고는 하지만 또 파트나 포지션을 멤버들끼리 정해야 한다면?
가뜩이나 실력 좋은 연습생들만 모인 이곳에서 또 고스란히 묻혀버리겠지.
그런 걱정을 알기라도 하듯 제작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번 3일간의 합숙은 다행히도 그때와는 매우 다릅니다.”
“네?”
“특별무대이니만큼 이번엔 경쟁이 아니고 서로 협력해서 완벽한 오프닝 무대를 만들길 바랍니다. 자, 먼저 이걸 보실까요?”
제작진이 멤버들에게 노트북을 건넸다.
“아, 네! 제가 받겠습니다.”
최여운이 노트북을 받아 가운데에 두었다. 화면에 뜬 영상엔 각 멤버들의 이름표를 맨 댄서들이 대형을 맞춰선 채 멈춰 있었다.
이어서 메인PD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지난 합숙 때처럼 파트, 포지션 걱정 안 하고 연습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 부분을 미리 정해두었어요.”
그의 말에 연습생들이 화색이 되었다. 서도화 또한 한결 마음을 내려놓고 PD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열심히 경쟁해서 얻은 베네핏 공연에서마저 다시 경쟁해야 했다면 참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 피디님! 영상 재생할까요?”
최여운은 자연스럽게 이곳에서도 리더다움을 뽐냈다. 그의 물음에 제작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최여운은 영상을 재생시켰다.
영상이 시작되고서야 제대로 보이는 각자의 이름표들. 첫 대형은 각 순위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서도화가 자신의 자리를 인식했을 때 곧바로 새로운 곡의 가이드 버전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