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매니저 이병수가 서도화에게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그럼 도화 씨 멤버 누구한테 전화를 거실 건가요?”
“저는요. 아덴에게 걸겠습니다.”
서도화의 선택은 그의 오랜 동료. 아덴이었다.
멀리서 이병수가 창백해지며 도리질을 치는 모습이 보였지만 도화는 애써 모른 척했다.
“오, 아덴 씨!”
“그분 맞죠? 붉은 머리의.”
“어어, 맞을걸? 날렵하게 잘생긴 친구. 맞지?”
“…어우 저는 그분 좀 무서웠었는데.”
멤버들의 물음에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덴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붉은 머리를 한 잘생긴 연습생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91번의 송서에게는 조금 다른 기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서도화는 거침없이 전화를 걸었고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후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어어, 아덴, 난데.”
-아, 도화.
아마 아덴은 서도화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장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도화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어. 뭐야? 전화해도 되는 거냐?”
“아 뭐 물어볼 게 있어서.”
“오, 방송 중이라고 얘기 안 했어.”
소래담이 틈새를 노려 송서를 놀렸다.
굳이 방송 중임을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아덴은 아직 이 세계 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대신 아덴은 불만 어린 말투로 말했다.
-……뭐야. 어제 이후로 우리 안 싸웠어.
“뭐?”
-케이랑 나, 어제 네 전화 받고 화해했다고.
제길, 욕 대신 멤버끼리 싸운 걸 말하네. 서도화의 표정에 황당함이 서리자 이때를 놓치지 않고 멤버들이 중얼거리며 놀리기 시작했다.
“어유, 아덴 씨랑 케이 씨 어제 싸우셨나봐요?”
“그런가 봐요? 도화가 화해시켰나 봐요?”
서도화는 티끌만한 불화조차 잠식시키기 위해 아덴에게 한마디 했다.
“그래, 잘했어. 너네 좀 그만 싸워. 아주 그냥 일상이야.”
심각한 싸움이 아니었어요. 얘네 그냥 일상이 싸움이에요. 은근슬쩍 카메라에 어필했다.
그때 전화기 너머로 또 다른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 누구예요? 도화 형?
-그렇대. 도화라던데. 그렇지 아덴?
-예, 서도화. 저한테 물어볼 거 있대요.
-도화 형한테 너무너무 보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아니다. 혀엉! 보고 싶어요!
-조금 있다 나도 바꿔줘. 아덴.
-나도 해야 하는 거냐? …음유시인! 빠, 빨리 돌아와라!
“…….”
아, 우리 팀은 욕은 안 하는데 말은 좀 많구나.
조금씩 미소가 사라지는 서도화의 모습, 이를 보며 조용히 키득거리는 베네핏 팀 멤버들.
결국 서도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말 좀 하자. 잠깐만 딴 데로 가봐. 멤버들 없는 곳으로.”
-야 숙소에 멤버 없는 곳이 어디 있냐?
“…아.”
그건 그렇네. 좁아터진 숙소에 멤버 없는 곳은 없지. 하지만 잠시 후 한숨과 함께 전화기 너머로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이제. 화장실에 들어왔다. 뭐 심각한 거야?
드디어 게임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서도화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물었다.
“뜬금없지만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무슨 일 있냐?”
아덴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걱정스러운지 조용히 서도화를 놀리던 멤버들의 키득거림이 잦아들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한번 물어보는 거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그것만 말해주면 돼.”
아덴은 잠시 말이 없다 물었다.
“진지하게?”
“진지하게.”
그리고 곧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내 목숨보다 중요한 친구라고 생각하지. 그렇게 많이 겪고도 몰라?”
망설임도 없이 들려오는 대답에 잠시 사라졌던 미소가 되돌아왔다.
많이 겪어봤지. 많이 겪어봤으니까 아덴에게 전화한 거다.
이 녀석이 뭐라고 대답할지 알고 있었으니까.
자고로 용사란 ‘동료’를 말할 때 가장 진지하고 솔직해지는 법이다.
“오오, 이건 진짜 대박이다!”
전화에 방해되지 않도록 속닥이던 멤버들은 아덴이 대답을 마치자마자 목소리를 키워 감탄해댔다.
“크으, 목숨보다 중요한 친구!”
“이렇게 대답하는 친구가 진짜로 있다고? 둘이 미리 짠 거 아니야 이거?”
-뭐야. 뭔 소리야.
감탄사를 연발하는 멤버들에게 서도화는 쑥스러운 척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얘 원래 이런 낯간지러운 말 많이 해요.”
-……뭐야 갑자기. 방송 중이야?
당황한 아덴의 말에 멤버들은 더욱 크게 감탄하기 시작했다.
방송 중인 거 모르고 대답한 게 이 정도. 방송을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고민도 없이 나오다니.
서도화는 활짝 웃으며 아덴에게 말했다.
“어, 미안 촬영 중이었어. 미안.”
-아 뭐야.
또 전화기 너머로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형, 얘 방송 중에 전화한 거래요.
다시 아덴의 주위에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화 형! 제가 보낸 케이 형 사진 봤- 헉 방송 중이래요? 헉, 헉! 죄송합니다!
주상현의 말소리가 빠르게 다가오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화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전해줘.
-형, 얘 촬영 중이라.
-아 촬영 중이구나.
한야도 자신이 모르는 새 전달할 건 다 전달하고 사라졌다.
그 와중 촬영 중이라는 데도 눈치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
-싸우지 않고 있다. 하프 진짜 살 거냐? 음유시인.
서도화는 어이없어서 그냥 잠시 듣고 있었다. 제작진도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고 이 정도 짧은 해프닝은 다른 그룹의 통화 중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서도화는 적당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멤버들한테 나 밥 먹었고 잘 있다고 전해줘. 대답 정말 고맙다.”
-어.
“끊을게.”
아무튼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아덴의 대답으로 1등은 떼놓은 당상이다.
-도화.
서도화가 전화를 끊기 직전, 다시 아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너 잠은 잘 잤냐?
촬영 중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걱정되어 물어볼 수밖에 없는게 있다.
아덴은 서도화의 불면 증세를 알고 있었다.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답변을 들을 때조차 싱글벙글이던 서도화의 표정이 조금 짙어졌다.
“뭐, 그럭저럭 잤어.”
-그럼 됐다. 끊어.
통화가 종료되었다. 서도화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맺혔고 그와 동시에 소래담이 손을 들며 매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한데 저 56번 그룹으로 이적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제작진들이 크게 웃었다.
소래담은 정말 억울해보였다.
“이것들, 챙겨줘 봐야 소용이 없어요!”
49번 그룹 멤버들은 부재중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콜백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든 게 분명했다.
“아니 어떻게 고민도 안 하고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바로 나오지? 너무 신기하다.”
“아덴은 제 소꿉친구예요.”
“아아!”
서도화의 말에 멤버들이 바로 납득했다. 소꿉친구라면 쉽지는 않겠지만 저런 진지하면서도 오그라드는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감동이네요.”
서도화가 뿌듯하게 말했다.
“자, 이제 여섯 멤버 모두의 순서가 끝났는데요.”
메인PD가 서도화를 보며 싱긋 웃었다.
“과연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말보다 더 큰 감동을 자아낸 멘트가 있을지. 팻말을 들고 계신 제작진 여러분들은 감동스러운 대답을 들은 멤버의 이름을 들어주세요.”
제작진들이 일제히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어올렸다.
“와 이럴 줄 알았어!”
멤버 누군가의 억하심정이 담긴 외침이 들려왔다. 결과야 당연히 대부분의 제작진이 서도화의 이름 팻말을 들었다.
간간이 최여운, 드물게 단, 그리고 누가 봐도 동정표인 소래담의 팻말도 하나 보였다.
소래담에게도 표가 생기자 당연히 권외인 두 사람이 들고 일어났다.
“에이, 에이! 이건 아니다!”
“어라? 좀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 왜?”
전화를 아예 받지 않은 소래담보다 표 수가 적은, 아니 한 표도 받지 못한 송서와 지우진이 소래담보다 더 억울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호소했다.
그러나 제작진들은 그냥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진짜! 이유라도 듣게 해주세요. 왜 소래담 형님을 뽑으신 거예요?”
지우진이 비리 현장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소래담 팻말을 든 제작진에게 물었다.
그러자 팻말을 든 채 뻘쭘하게 시시덕거리던 제작진이 당당히 말했다.
“아니, 그.”
사실은 재미로 든 거지만.
“같은 마음으로 전화를 받지 않은 일심동체의 마음이 감동스러워서?”
“……와아.”
그에 지우진과 송서는 할말을 잃었지만 1등한 서도화는 그저 즐겁게 상황을 즐기며 하하호호 웃었다.
송서가 서운하다는 듯 제작진을 흘기는 척하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멤버 이미지를 지키려고 노력한 저의 모습에 감동하신 분은 아무도 없단 말이에요?”
두 사람이 최선을 다해 억울함을 어필했지만 제작진은 즐거워하면서도 단호했다.
“아쉽지만 이번 심사는 제작진 주관적인 의견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1위 외에는 크게 반영되는 점수도 없어요.”
“엥? 1위 외에는 점수 못 받아요?”
송서와 지우진이 억울해할수록 좋아하던 소래담이 실망한 얼굴로 물었다.
PD는 능글능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첫 번째 게임은 1등을 한 도화 씨에게만 점수 1점!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 볼까요?”
“와 감사합니다!”
서도화가 주먹을 불끈 쥐며 기쁨을 표현했다. 이게 하다보니까 은근 몰입이 된다.
“두번째 게임은 눈 가리고 숨바꼭질입니다. 뭐, 이름만 들어도 무슨 게임인지 아시겠죠?”
“눈 가리고 술래잡기 하는 건가요?”
“네, 맞아요. 이번에는 팀을 나눠서 진행할 텐데 음, 간단히 서 있는 대로 나눌까요?”
PD가 멤버들의 가운데를 가리켜 손으로 갈랐다.
“요렇게 셋, 셋 팀 하면 되겠네요.”
서도화는 자신과 같은 팀이 된 멤버들을 확인했다. 단과 송서가 같은 팀이 되었다.
“자, 간단히 규칙 설명해드릴게요.”
PD가 설렁설렁 규칙을 알려주었다. 사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게임이다 보니 설렁설렁 설명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냥 술래 팀 세 멤버가 눈을 가리고 상대 팀을 붙잡으면 되는 게임이었다.
“한 명당 술래 모두에게 1점씩 부여됩니다. 한 명을 잡으면 1점, 세 명 모두를 붙잡으면 3점씩 부여되겠죠? 또한 끝까지 붙잡히지 않은 멤버가 있다? 그럼 그 멤버에게도 1점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호.
서도화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오늘 좀 유리한 게임이 많이 나오는데?’
놀라울 만큼 서도화와 상성이 좋은 게임만 나오고 있었다.
전직 힘(무력)없는 음유시인, 고로 도망이 특기인 자, 그 이름 서도화다.
숨 쉬듯 마법과 암석, 폭탄, 그리고 마족이 쏟아지던 전쟁터에서도 삶에 대한 집념 하나로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던 서도화가 술래잡기를 못 할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