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자, 그럼 어느 팀부터 술래를 할까요? 각 팀의 대표가 한 명씩 나와서 가위바위보로 정할까요?”
“넵!”
송서가 툭, 서도화를 쳤다.
“도화 네가 나갈래?”
서도화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저 운 엄청 안 좋은 편이에요.”
원래는 운이 좋은 축에 속했지만 용사 파티에 속하게 된 뒤 이상할 정도로 운이 나빠졌다.
아마도 그 세계의 주인공일 아덴과 함께 다니는 조연의 숙명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제2세계에 갑자기 끌려간 것부터가 불운의 시작일지도.
“그럼 단이가 나갈래?”
단은 조용히 얼굴을 붉히며 거절했다.
“형이……. 송서 형이…….”
생김새에 맞지 않는 수줍음이었다.
매섭게 생긴 얼굴과 단단한 근육을 가졌지만 그에 비해 수줍음이 많고 용기가 부족한 게 단의 특징이자 매력이었다.
송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나갈게. 나 가위바위보 잘해.”
그렇게 나간 송서는 소래담에게 한 방에 지고 돌아왔다.
“미안…….”
어째 한껏 움츠러든 채 사과하는 송서의 뒤로 소래담이 위풍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먼저 술래할게요!”
“네 그럼 이렇게 세분이 먼저 술래가 되시는 것으로.”
상대팀 세 명이 손수건과 안대를 겹쳐 눈을 가렸다.
그리고 멤버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멈춰서자 PD가 외쳤다.
“게임 시작!”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 * *
“자 이것으로 준비한 게임은 모두 끝났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잠깐 휴식 후 촬영 재개할게요.”
“수고하셨습니다!”
PD의 말에 조금 지친 대답이 돌아왔다.
“휴.”
서도화는 물을 찾아 마시며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예상은 했지만 미니게임에서 연습 때 사용할 체력을 다 쓴 느낌이다.
두 번째 게임이었던 술래잡기는 이번에도 역시 큰 예능적 활약을 펼친 소래담으로 인해 무척 난이도 높은 게임이 되었다.
얼마 전 등산할 땐 정상까지 올라도 아무렇지 않던 체력이 이거 고작 한 시간 움직였다고 땀에 젖어 숨이 가쁠 지경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이겼다.’
“하하……!”
서도화가 힘 빠진 소리로 웃었다.
지치긴 했지만 어쨌든 이겼다. 특히 술래잡기의 경우 아주 쉽게 이겼다.
용케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고, 또 눈을 가리고도 작은 발소리까지 빠르게 알아채는 모습에 제작진이 감탄하더라.
역시 아크로바틱 그룹 멤버는 다르다고 하던가.
사실 어메스 내에서 아크로바틱 담당 멤버도 아니고, 수년간의 도망으로 다져진 술래잡기 실력이었지만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상관없는 일이다.
이후 세 번째 게임인 넌센스 퀴즈에선 매우 부진했지만, 마지막 게임인 경연참가곡 랜덤 플레이 댄스에선 노래만 들으면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여 연습생들의 감탄과 함께 무려 누적 점수 16점을 쌓고 미니게임 우승자가 되었다.
“자, 이제 숨 좀 고르셨으면 다시 자리에 앉아주세요.”
제작진의 말에 각자 편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멤버들이 다시 연습실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촬영이 재개되었다.
“이제 미니게임을 통해 받은 점수가 어디에 쓰이는지 말씀드릴 건데요.”
“어?”
“아, 등수가 아니고 점수로 뭔가 받는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제작진의 말에 멤버들은 화색이 되었다. 거의 한 시간 반, 체력을 태워 가며 열심히 했는데 서도화가 너무 압도적인 우승을 하는 바람에 좀 슬플 뻔했다.
메인 PD는 결과에 만족한 서도화와 안도하는 멤버들을 보며 씨익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주 좋은 보상이긴 한데 이를 멤버들이 좋아할지 부담스러워할지는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감춘 채 메인 PD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보상은요. 예전 합숙의 보상으로도 등장했었던 보상이죠. 바로 오프닝 엔딩요정권입니다. 다만 보상 내용은 좀 다른데요.”
PD의 장난스러운 시선은 멤버 전체에게서 서도화에게로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서도화가 눈을 크게 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PD의 표정을 보니 몹시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PD는 서도화의 얼굴에 드리운 작은 의구심을 눈치채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받은 누적 점수는 모두 시간 단위인 초로 환산됩니다. 즉 여러분들이 엔딩요정으로서 클로즈업 받을 수 있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어라?”
서도화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곁에 있던 멤버들이 크게 폭소하기 시작했다.
“도화야! 잘 됐다!”
“축하해! 도화 점수 몇 점이더라?”
“16점? 16초씩이나 엔딩요정이 되는 거구나아! 이야!”
다들 자신을 축하하고 있는데 서도화만 웃지 못하고 애매하게 입꼬리만 올린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게 무슨?
그 와중에 메인PD는 재밌다는 듯 말했다.
“도화 씨, 16초 엔딩요정 기대하겠습니다.”
엔딩요정. 하면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길면 매우 괴로워지는 것이었다.
이미 데뷔한 프로 가수들도 엔딩요정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참 많은데 이제 막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연습생이 무려 16초 싱글샷이라니.
이 정도 길이는 그냥 가만히 아이컨택, 인사만 하고 있을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뭔가 시간을 채울만한 아이디어를 짜서 부딪쳐야 하는 길이지.
이걸 좋아해야 할지 부담스러워해야 할지, 어느 쪽이 방송에 좋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는 멤버들의 놀림을 받으며 저도 모르는 새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서도화를 위로하는지 놀리는지 모를 멤버들의 손이 그의 몸을 토닥이거나 흔들어댔다.
소란스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메인 PD가 외쳤다.
“이것으로 미니게임 촬영은 끝났습니다. 이제 멤버들은 연습 시작하세요.”
“네!”
멤버들이 힘차게 대답하며 여전히 멍한 서도화를 일으켜 세웠다.
“도화야 연습하자!”
“아니 이렇게나 충격 먹었단 말이야? 좋은 일이야. 좋은 일!”
“좋은… 일이죠.”
서도화가 힘겹게 대답하며 과장스러운 리액션을 하며 자신을 부축하려 드는 소래담의 손에서 벗어났다.
‘지금은 일단 연습하자.’
엔딩에 대해선 집으로 돌아간 뒤 멤버들, 김유진과 다 같이 상의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서도화가 멤버들을 따라 대형 속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최여운이 자리에 선 멤버들을 보며 노트북으로 향했다.
“몸풀기는 게임으로 했으니까 바로 연습 들어갈게. 오늘 4시에 트레이너 선생님 오신다고 하셨으니까 그전까지 우리 수정된 부분 완성해둡시다.”
“네!”
그 이후 연습만 계속되었다.
* * *
“어으!”
늦은 밤. 침대에 몸을 누이며 서도화는 다시 한번 이 그룹의 조합이 무척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연습은 무척 힘들다. 게임을 진행한 이후 시작한 연습이라 체력이 쭉쭉 닳았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연습으로 인해 스트레스받을 만한 일이 이 펜션에 온 이후부턴 하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어제 단 몇 시간 만에 안무 숙지가 끝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급하게 수정된 안무와 파트에 헤매지 않고 금방 적응해 나갔다.
수정된 공연이 완성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완벽한 그룹이라고 했던가. 후에 들어온 트레이너들은 지적은커녕 칭찬만 한가득 늘어놓고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게 조금 아쉽다는 말까지 남겼다.
트레이너들과 함께 송서가 급하게 만들었던 안무를 좀 더 다듬고 파트 분배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어떠한 시련도 없이 연습이 끝이 났다.
트레이너들의 말마따나 과장 조금 보태서 지금 당장 무대에 서도 되는 정도 수준의 모양이 갖춰졌다.
잘하는 사람들만, 그것도 포지션 조합을 맞춰서 모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서도화는 깨달았다.
‘그리고 밤이네.’
스트레스는 오히려 지금이 더했다.
‘오늘은 또 어떻게 밤을 보내야 하나.’
미니게임에 휴식 없는 연습까지. 오늘의 일정은 무척 하드해서 분명 연습이 끝날 때쯤에 슬슬 피로와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을 터인데.
씻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졸음이 싹 달아났다. 침대에 누우니 더욱 말똥해졌다.
잠 빚이라는 말이 있듯 피곤함은 누적되는 것인데. 오늘도 어제처럼 뜬눈으로 보냈다간 내일 죽어날 텐데.
“아아.”
막막함에 서도화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낼 때였다.
똑똑-
“도화야.”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서도화가 상체를 들어 올렸다.
“네?”
“우리 들어간다.”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좁은 문틈 사이로 멤버들의 얼굴이 우르르 들어왔다.
“어?”
넷이나 왔네?
최여운을 제외한 멤버 모두가 이곳에 와있었다.
서도화가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자 멤버들이 씨익 웃으며 방안으로 완전히 몸을 들였다.
“왜, 다들…….”
왜 왔냐 물으려던 서도화는 소래담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발견했다. 소래담의 너튜브용 개인 카메라인가? 했지만 그건 아니고 카메라 측면에 밀리언 아이돌 로고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밀리언 아이돌 촬영용 카메라였다.
소래담이 말했다.
“별 건 아니고, 도화 지금 잘 거야?”
“예? 아뇨.”
잠이 안 옵니다……. 솔직한 심정은 속에 담아두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지우진이 물었다.
“오늘도 혼자서는 잠 못 자겠지?”
서도화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이들에게 말했었구나. 혼자 잠 못 잔다고.
그 말을 기억하고 단체로 이 밤에 와준 모양이다.
소래담이 카메라 앵글을 자신의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여러분 코너 속의 코너. 막내 재우기 컨텐츠. 아니 사실 그냥 마지막 밤인데 좀 놀고 싶어서 왔어요. 여기서 좀 놀다 가겠습니다. 방 주인님 괜찮나요?”
“졸리면 돌아갈게.”
멤버들의 물음에 서도화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 졸려요. 형들은 안 졸리세요?”
“전혀? 여기 1층에 보드게임 있더라? 가져왔으.”
“여운이 형은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자겠대.”
멤버들은 거침없이 침대에 모여앉아 보드게임판을 펼쳤다.
이날 밤, 그들은 새벽 세 시까지 서도화의 방에 머물다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