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부터 시작하는 아이돌 생활-88화 (88/270)

제88화

유제이 엔터테인먼트 회의실.

서도화가 오프닝 쇼를 위해 합숙하는 동안 4라운드 선곡이 확정되었다.

“정말 다행히도 아직 우리가 해본 적 없는 느낌의 곡이에요.”

김유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선곡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4라운드. 너무 무난하거나, 이미 해본 적 있거나, 혹은 다른 그룹과 겹칠 법한 곡이 확정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선곡은 모든 걱정을 빗겨나갔다.

유제이 스태프들도, 제작진들도, 멤버들도, 그리고 팬들도 역시나 본 적 없던 신선한 컨셉의 무대를 보고 싶은 마음은 같았다.

“곡은 익스트럼의 ‘저주’, 멤버 솔로곡이래.”

“아, 그 곡.”

서도화는 이 곡을 알고 있었다. 익스트럼 5주년 기념으로 나온 멤버별 솔로곡 중 하나로 그야말로 붉은 조명이 잘 어울리는 진득한 섹시 컨셉의 곡이다.

지금까지 전혀 해본 적 없는 느낌의 곡.

그러나 지금까지의 곡들과는 달리 확실하게 어필 포인트가 있는 경연에 쓰기 좋은 댄스곡이다.

“곡 들어본 적 없는 사람?”

김유진의 물음에 아덴과 케이가 손을 들었고 김유진은 노트북으로 곡의 라이브 영상을 틀어주었다.

“마침 곡 컨셉도 좋고, 잘 살릴 수만 있으면 너희 비주얼 이미지랑도 굉장히 잘 맞는 곡이거든? 그래도 무대 컨셉은 따로 생각해봐야 하는데 이거 어떨까?”

김유진은 멤버들에게 영화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엇, 저 이런 거 못 보는데 으으!”

주상현이 포스터를 보자마자 고개를 뒤로 빼며 눈을 가렸다.

서도화가 포스터를 빤히 살피며 말했다.

“공포 영화 포스터 아니에요?”

새카만 배경에 창백한 피부, 검은 입술, 흰자위 없이 검은 눈을 가진 남자가 검은 옷을 입은 채 정면을 보며 서 있는 서양 공포 영화 포스터였다.

“맞아. 딥다크라는 영화인데 무대 컨셉이 공포라는 건 아니고 기왕 하는 거 어둡고 무겁고 의미심장한 컨셉으로 가보자. 이런 뜻이지.”

1라운드는 패기 넘치는 게임곡, 2라운드는 정글이 된 아포칼립스 세상, 3라운드는 재즈.

김유진은 이번 선곡을 받고 팬들이 이 그룹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팬들이 원하는 건 다른 그룹이 선뜻 시도하거나 흉내 내지 못할 정도로 과격하고 사나운 컨셉.

귀엽고 발랄한 것보단 볼 때마다 압도되는 비주얼형 무대를 주로 선보이는 그룹이 바로 56번의 이미지였다.

김유진은 이번 라운드에서 이 독특한 컨셉을 좀 더 확고히 할 생각이다.

그런고로 이번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섹시하고 무겁고, 현실적이지 않아 사람에 따라선 무서운 검붉은색의 컨셉.

“어쩜 곡 이름도 ‘저주’야. 정말 만족스러운 선곡이다 하하! 아무튼 그런고로.”

현실적이지 않은 무대 컨셉도 확고히 하고, 잘난 비주얼도 살릴 겸.

김유진이 스태프들에게 말했다.

“다음 라운드엔 멤버들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줘보는 게 어떨까요?”

물 들어올 땐 배에 모터를 달아야 하는 법이다.

유입된 팬들이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지금이 비주얼적인 변화를 주기에 적기다.

“이 부분은 유리 씨가 비주얼 디렉터님, 스타일리스트 분들이랑 상의해서 스타일 정해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또 이안 씨한테 이번에도 편곡 부탁드리고. 또 뭐 의논해야 하는 거 있어요?”

김유진의 물음에 서도화가 손을 들었다.

“이번 곡 안무가 수정될 예정인가요?”

“음?”

김유진은 우나나와 한번 시선을 교환하곤 고개를 저었다.

“댄브나 중간중간 컨셉에 맞게 수정되는 부분은 있어도 기본적으론 원곡 안무를 품고 가는 식으로 할 거야.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거 없어.”

그러자 한야가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제 연습하러 가봐도 될까요? 안무 수정될 때까지 기존 안무 얼른 외워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차피 연습생들은 이 회의에 있어 봐야 할 일이 없다.

컨셉, 의상, 비주얼 등등 무대에 관한 것들은 직원들에게 맡기고 조금이라도 연습하는 게 나을 터.

특히 이번 곡은 대놓고 댄스를 위해 나온 곡이라 케이와 아덴뿐만 아니고 한야까지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만 했다.

김유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가봐. 우나나 선생님 회의 끝나실 때까지 상현이랑 도화가 연습 주도해서, 알지?”

“네.”

멤버들이 일어났다. 김유진은 멤버들에게 눈인사만 한 뒤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

“이제 진짜 1위도 한번 해봐야죠. 의상 분위기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연습생들과 회사는 라운드가 진행될수록 빠르게 호흡이 맞아갔다.

멤버들도 회사도 서로를 믿고 각자의 일에 몰두하며 경연 준비에 돌입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허억, 헉… 아, 아덴 형 이젠 뭐.”

주상현이 아덴을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형은 진짜 진즉에 댄스 배웠으면, …후우, 진짜 잘했을 거라니까요? 봐요. 벌써 완벽하잖아요.”

“그러냐? 고맙다.”

서도화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울을 통해 아덴을 바라보았다.

힘들어 죽으려고 하는 멤버들,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케이와는 달리 숨 한번 고르지 않은 아덴이 음악 없이 몸을 움직여 안무를 춰보며 말했다.

검술 수련 대신 춤 연습에 열중하며 또 그걸 완벽히 소화해내는 아덴.

서도화는 처음으로 그의 재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댄스에 재능이 있는지도.’

처음엔 그냥 남들보다 몸 쓰는 걸 잘해서 춤도 그럭저럭 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누가 봐도 그냥 춤 잘 추는 연습생이다. 예전처럼 겨우 따라간다는 느낌도 아니고 춤선, 느낌도 살릴 줄 알고 예전보다 외우는 게 빠르다.

‘아니, 외우는 건 원래 빨랐나?’

외우는 것보단 따라 하고 그걸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타고난 재능이 있던 녀석이었다.

그 재능과 노력으로 마왕까지 쳐부순 불량소년. 오히려 지금까지 춤을 외우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는 왜 그랬던 거지?’

갑자기 따라 하는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았었다. 사실 지금도 익숙해져서 춤을 빨리 외웠다고 보는 게 맞지, 그 기술을 사용한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나 원래 뭐든지 익히는 게 빨라. 춤도 남들보다 빨리 외울 수 있어. 물론 상현만큼 잘하지는 못하겠지만.”

“에이 아니에요. 오히려 실력 느는 건 저보다 빠른 거 같은데?”

“원본보다 잘하는 일은 있을 수 없어.”

“…원본이요?”

서도화가 뿌듯하게 웃으며 자기 자랑 중인 아덴을 빤히 쳐다보았다.

경연으로 여유가 없어 신경 쓰지 못했지만 이에 대해 한 번쯤 물어보는 게 좋겠다.

혹시 힘을 사용하는 데에 어려움이 생겼는지.

이곳에서는 그 힘이 크게 필요하지 않겠지만 훗날 하이넬 일행이 이곳의 좌표를 찾아 아덴이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면 아직까지는 필요할 힘일 테니까.

‘아직 마왕도 살아있고.’

거의 죽어가고 있긴 한데. 서도화가 창백한 얼굴로 드러누워서 한야에게 안마받고 있는 케이를 바라보았다.

“흐윽, 크으흑-!”

“좀만 참아. 케이야.”

팔팔한 용사 아덴에 비해 마왕 케이는 이거 조금 연습했다고 다리에 쥐가 났단다.

마왕이 쥐가 났단다. 미치고 돌아버릴 일이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얘들아 연습은 잘 돼가?”

“대표니임!”

김유진이 손에 든 봉지를 들어 보이며 멤버들에게 다가왔다. 이병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봉지를 받아들었다.

“어, 아이스크림이네요?”

이병수의 말에 멤버들이 화색이 되었다. 이전 소고기 회식 이후로 식단 관리를 하느라 군것질거리는 손에도 못 대던 그들이었다.

김유진이 미소 지었다.

“우리 어메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냥 오기 뭣해서요.”

김유진은 그렇게 말하곤 연습실을 둘러보더니 멤버들에게 손짓했다.

“가자. 얘들아.”

그녀의 말에 멤버들은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을 때보다 더 화색, 아니 설렘과 긴장이 섞인 얼굴을 하며 연습실 밖으로 향했다.

오늘은 밀리언 아이돌 첫 방송이 있는 날.

아무리 연습으로 정신없어도 이건 봐야 한다.

“근데 이번 방송 진짜 어떻게 나올까요?”

주상현이 아이스크림 껍질을 뜯으며 말했다.

“그러게. 기존 방송이랑 플롯이 달라서 시작을 어떻게 할지 감이 안 잡히네.”

지금까지는 개인 연습생들이 입장해서 준비한 무대를 보이고 심사위원들이 심사하고 1차 순위가 정해지는 식으로 일정하게 정해진 플롯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심사위원도 없고 가타부타 말없이 처음부터 대형무대에서 공연부터 했으니 첫 방송을 제작진이 어떻게 풀어갈지 짐작할 수 없다.

크게 방송에 쓰일만한 스토리가 없을 텐데. 그렇다고 방송 시간 내내 공연하는 모습만 보여줄 수도 없을 테고.

그때 한야가 흘리듯 말했다.

“1라운드 전에 몇몇 소속사 연습생들끼리 미션지 받는 씬 촬영했다는 거 소문이 아니고 사실이래.”

한야의 말에 주상현이 예상했다는 듯 뾰로통해졌다.

“그럼 그게 오늘 방송으로 나오겠네요.”

1화는 미리 촬영해뒀던 촬영분 위주로 돌아갈 게 뻔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분량은 콩알만 하겠네!’

주상현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원래 이런 게 부조리함이 만연하는 게 경연 방송이지만 당할 때마다 괜히 속상하고 서운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유진 또한 1화엔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는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기대는 하지 마. 분량이 적을 거야. 아예 없을 수도 있고.”

지금이야 막강한 팬 화력을 가진 우승 후보들이지만 1라운드 전까진 주상현 외엔 볼 게 없는 그룹이었다.

아마 1라운드 촬영분에서의 56번 그룹 분량은 애써 긁어모아도 극단적으로 적을 것이다.

“뭐, 제작진들도 지금은 좀 아쉽긴 할 거야. 1라운드부터 우리 애들 이렇게 잘 될 줄 알았으면 많이 찍어둘 걸 하고.”

그러나 팝넷의 기술은 김유진, 그리고 멤버들의 생각보다 대단했다.

밀어줄 놈들은 확실히 밀어줘서 본전 뽑는 그들답게 분량을 긁어모으기 이상으로 56번의 분량을 늘릴 방법이 있다는 걸 그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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