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보기만 해도 시원한 티셔츠에 반팔 재킷, 청바지, 그리고 손목 밴드, 화려하진 않지만 서도화에게 퍽 잘 어울리는 의상이었다.
‘여기서 보니 약간.’
천사와 악마 컨셉인가 싶기도 한 멤버들과의 상반된 컬러다.
그런 생각도 잠시, 이병수는 서도화에게 다가가 손짓했다.
“이제 슬슬 가자. 도화야.”
“아, 넵.”
멤버들의 시선이 서도화에게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멤버 모두가 서도화에게 모여들었다.
“도화야 잘하고 와. 형, 여기서 모니터로 보고 있을게.”
“네, 형, 다녀올게요.”
“형 기선제압 하고 오세요. 형이 제일 잘해야 해요. 알겠죠?”
“다녀와라. 도화.”
“다녀오…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하라.”
“다녀올게.”
참 언제봐도 우애 좋은 멤버들이다. 서도화는 제 손에 음료를 쥐여주고 손까지 흔들며 배웅하는 멤버들에게 손을 흔들곤 이병수를 따라 베네핏 팀이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서도화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곳 또한 어메스 대기실 못지않게 시끄러웠다.
“어, 도화 왔어?”
“……허얼! 또화야! 이게 무슨 일이야! 염색했네?”
“도화 나날이 잘생겨지네?”
주로 시끄러움의 원인은 소래담이다. 소래담의 손에는 휴대폰이 달린 셀카봉이 들려있었다. 아무래도 너튜브용 촬영 중인 모양이다.
서도화가 이병수를 바라보았다. 소래담의 촬영에 응해도 되냐는 의미였다. 이병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서도화는 싱긋 웃으며 멤버들의 곁으로 향했다.
“도화 혹시 촬영 가능해? 형 지금 너튜브 촬영 중인데 안 되면 요렇게 도화 쪽 피해서 촬영할게.”
“괜찮아요. 촬영.”
“도화 밥 먹었어? 빵 있는데 먹을래?”
“먹었어요. 빵 어디 있-”
서도화가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그의 손에 빵이 들렸다.
“염색 언제 했어?”
“아까 리허설 끝나고 얼른 다녀왔어요.”
들어오자마자 폭탄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무척 정신이 없었다.
서도화는 그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곤 빵을 뜯으며 소래담의 카메라에 손 흔들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서도화입니다.”
“와아! 여러분들이 그렇게나 좋아하시는 도화가 왔습니다!”
어느새 소래담의 텐션에 익숙해진 멤버들이 소래담의 진행에 맞춰 박수를 쳐 댔다.
“지인짜 오랜만이다. 그렇지 도화야?”
소래담의 말에 서도화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우리 아까 봤던 거 같은데. 너튜브에도 주작이 있는-”
“와아!”
사실 아까 숍에 들리기 전 리허설 하며 봤지 않던가.
소래담이 빠르게 도화의 말을 막았다. 아무래도 진행상 첫 토크 시작을 유연히 하려 처음 만난 것처럼 말한 모양이다.
소래담이 머쓱한 척하며 도로 자리에 앉아 멤버 모두를 화면에 담았다.
“그런데 얘들아. 우리 이제 한팀으로 무대에 올라가잖아?”
“네, 그렇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같이 합숙도 한 사이에 팀 이름이 없어.”
“……어?”
“그러네? 그러고 보니.”
이제야 깨달은 듯 멤버들 사이에 의아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왜 지금까지 팀 이름도 없다는 걸 몰랐을까?
오프닝 쇼는 하나의 팀을 보여준다기보단 각 우승 후보 그룹들의 대표를 보여준다는 느낌의 공연이기 때문에 그냥 각자의 이름이 자막으로 올라간다.
일단은 팝넷 측이 그러길 바랐다. 그러니 당연히 이 팀의 이름은 없었고 멤버들끼리 부를 때도 오프닝 팀 혹은 베네핏 팀이라고만 불렀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공연이 끝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시 모일 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촉박한 시간에 너튜브를 위한 토크를 이끌어 나가기는 이것만큼 좋은 소재가 없었다.
“물론 공연에는 나오지 않겠지만 우리끼리라도 한번 정해볼까?”
“맞네요. 저희 맨날 베네핏 팀이라고 불렸잖아요.”
“팀 이름 뭐로 하지?”
“그냥 이름 한 글자씩 따가지고…는 별로네 하하.”
지우진이 소심하게 말하곤 머리를 긁적였다. 이후 많은 이름 후보들이 오갔다. 그러나 어디 이름 짓는 게 쉬운 일인가?
결국 어느 순간부터 이름짓기는 흐지부지되고 갑자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어버렸다.
“그런데 우리 지금은 다들 그룹 이름 대신 번호를 쓰고 있잖아?”
“아아, 맞아요.”
“난 솔직히 처음에 왜 번호로 불리지? 싶었거든? 뭐 이제는 그게 더 외우기 쉬우니까 그런 걸 알고 있지만.”
굉장히 거침없이 말하는 소래담에 말에 연습생들은 그저 미소 지었다. 소래담은 그런 연습생들을 슬쩍 보고 물었다.
“아마 다들 지금은 번호로 불리지만 나중엔 그룹 이름을 걸고 데뷔해서 활동하게 될 건데 다들 원래 그룹 이름은 정해져 있지?”
입담만큼이나 그 질문도 거침이 없었다. 소래담의 물음에 연습생들이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들의 매니저를 바라볼 정도였으니.
서도화 또한 이병수를 보았다. 이 질문 괜찮은 건가요? 그 무언의 물음에 이병수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생들의 망설임을 알기라도 하는 듯 소래담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편집할 생각인지 이번엔 방송용이 아닌 진짜 목소리와 말투로 정중히 말했다.
“아, 이거 허락받고 물어보는 거고 방송 끝나고 너희 그룹 이름 다 밝혀지면 업로드 될 영상이에요. 물론 진짜 그룹 이름 안 물어볼 거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시고. 하하하!”
소래담은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었지만 선을 넘는 사람은 아니었다. 즉석에서 꺼내는 질문 같아도 사전에 각 소속사 그리고 팝넷에게 허락을 받은 질문들이었다.
역시 베테랑 방송인이다.
팀 이름 정하려다가 자연스럽게 대화가 산으로 가며 나온 질문인 줄 알았는데 전부 생각하고 질문할 타이밍이 나오도록 대화를 유도한 것이었다.
소래담의 말까지 듣고서야 서도화는 마음 편히 그의 질문을 들을 수 있었다.
소래담이 진행을 계속했다.
“지금 당장 진짜 그룹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아이돌 그룹들은 그런 이야기 많잖아. 그룹 이름 정하는데 진짜 말도 안 되는 이름이 후보로 나와서 당황했다든가 하는.”
“아아! 그런 이야기 진짜 많죠.”
“예를 들어 실제로, 이건 방송에서도 많이 나온 건데 아이돌 ‘원넘버’ 분들의 원래 이름은 멤버가 여덟 명이라고 삼삼오오였다고 하잖아?”
데뷔 20년차 인기 아이돌 그룹 원넘버가 방송 중 그룹 이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꺼내는 일화로 무척 유명한 이야기였다.
“이런 식으로 너희들도 그룹 이름 지을 때 일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그룹은 이런 이름까지 지어봤다! 이런 거 있는 사람?”
소래담의 질문을 끝까지 듣는 순간 서도화의 눈이 빛났다. 이를 지켜보던 이병수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이름, 저희는 근데 처음부터 너무 멋진 이름이 나와 가지고. 첫 의견 나오자마자 바로 결정됐어요.”
송서가 자랑스레 말하며 갑자기 손으로 하트를 만들었다.
“과장님, 사랑합니다. 이름 너무 멋져요.”
살짝 뜬금없는 아부였음에도 소래담은 크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뒤에서 유난히 조용히 있던 최여운도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저희도, 저희는 윗분들이 다 정하시고 멤버들한테 전달되는 식이라 큰 에피소드가 없어요.”
“오, 그렇구나. 역시 대기업인가? 분명 수십 명 모여서 그 드라마에서나 보던 커다란 회의실에서 마이크 들고 그룹명 뭐로 할지 토론하고 그랬을 거야.”
소래담의 말도 안 되는 과장에 최여운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형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하하.”
“그런 거 아니야? 데스티니는 진짜로 그렇게 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어. 되게 큰 회사니까 그룹명 짓는 것도 작게 안 할 거 같아.”
소래담의 말에 최여운은 또 웃었지만 의외로 지우진, 단, 송서는 소래담의 말에 공감했다.
대한민국 연예계를 휘어잡고 있는 회사, 방송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엔 전부 데스티니의 손이 뻗쳐있다.
그런 거대한 회사에서 내는 아이돌은 분명 그룹 이름도 대대적인 회의를 통해 나오겠지. 커다란 회사에 걸맞은 대형 그룹으로 클 그룹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도 소래담이 말한 그 정도는 아니지만 데스티니는 세계관, 컨셉, 그룹 이미지 등등부터 정한 뒤 직원 공모를 통해 이에 맞는 이름을 정했다.
그러다 보니 회의에서 말도 안 되는 그룹 이름 후보가 나올 일도, 데뷔할 본인이 그룹 이름 후보를 알게 되는 일도 드물었다.
소래담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요즘엔 그런 이상한 이름 나오는 경우가 없구나?”
그때 단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저는 있습니다.”
“어 그래?”
큰 각오를 하고 말하는 건지 저 순박하면서도 무뚝뚝해 보이는 단의 귀가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저희는 두 개가 있는데요, 하나는 저희 멤버들이 보면 하나같이 몸이 좋잖아요?”
“어어 맞아! 너희 그룹 뭔가 운동 굉장히 열심히 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
보통 그룹 내에 다양한 이미지의 멤버들이 있는 다른 팀들과는 달리 단의 그룹은 모두가 단과 같은 이미지였다.
상당히 키가 크고 덩치가 좋고, 운동 잘할 것 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나온 이름이… 체육소년이었어요.”
“체육소년이 이름이야?”
소래담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다른 멤버들도 작게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는 게 그룹 이름이 우습긴 했지만 멤버들의 이미지를 빼다 박은 이름으로 지어놨다.
반응이 좋자 단은 기분이 좋았는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작게 덧붙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멤버들이 하나같이 표정이 없다고 생각을 알 수 없는 아이들이란 뜻으로, 선글라스.”
소래담의 웃음이 더 커졌다. 그가 진짜로 웃겨서 웃는 것인 줄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이돌 그룹의 이름이라기엔 영문을 알 수 없는 어이없는 이름들이긴 했다.
소래담은 한참이나 웃다가 멤버들에게 물었다.
“내가 보기엔 선글라스, 체육소년이 최고야. 혹시 이거 외에 난 더 엄청난 그룹명을 받았다! 하는 멤버? 누가 말 안 했지?”
소래담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서도화가 무덤덤하게 손을 들었다.
“저, 아직 말 안 했어요.”
“어! 도화. 근데 이 팀은 멤버들이 워낙 잘생겨서 생긴 이미지만으로 지어도 진짜 잘 지을 수 있을 것-”
“사사오입.”
“……어?”
“저희 그룹이요. 사사오입. 악동가도. 케이파… 아니 이건 됐고, 돌격청년, 트루바드…….”
서도화는 말을 멈추고 묘하게 정적이 흐르는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꺼낼 수 있는 이름들이 정말 많았다.
모두 사사오입 부장 덕분이었다.
서도화가 소래담의 흐물거리는 입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지도 못하고 서도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마디 내뱉었다.
“……진짜로?”
그의 물음을 듣고 서도화가 미소 지었다.
그래 역시. 혹시나 싶었지만 누가 들어도 구린 이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