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얼마없는 시간, 소래담의 틈새 인터뷰는 무대 뒤로 이동하라는 스태프의 말로 유야무야 마무리되었다.
소란스러운 무대 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멤버들 사이 이제야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쾌할하고 여유롭던 소래담조차 무대를 앞두고는 쉼 없이 움직이던 입을 멈추고 몸을 풀었다.
서도화는 목을 풀다 문득 무대 밖으로 들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전에 없던 목소리들이 들렸다. 작은 웅성거림이 한데 모여 거대한 소리들을 만들어냈다.
처음 들어보는 관객들의 목소리에 서도화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갔다.
심장 뛰는 게 느껴질 정도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서도화가 숨을 내쉬고 긴장을 풀기 위해 괜히 인이어를 만지작거릴 때.
“무대 위로 올라갈게요.”
제작진이 외쳤다. 멤버들은 지금껏 느낀 적 없는 부담을 등에 업고 제작진의 안내에 따라 어두컴컴한 무대 위로 향했다.
동시에 무대 위 대형 스크린을 통해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그 순간 관객들은 조명이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누군가 무대 위로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들어온 이들이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진행자 서영이 아닌, 의상을 입은 연습생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는 경연이 시작하기 전 무언가 공연이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와 내가…….”
이 개 같은 확률을 뚫고 이 현장에 오기는 했구나.
누군가가 많은 의미가 담긴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스트리밍으로만 보던 경연장의 풍경, 실제로 보는 무대는 훨씬 더 컸으며 실제로 보는 무대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도 컸다.
그런 와중 어떠한 소개도 없이 무대 위로 올라온 저 연습생들은 누굴까?
10, 9, 8-
관객들은 커다란 화면 속 카운트에 따라 숫자를 외치며 시선은 어두컴컴한 무대 위 댄서들과 함께 대형을 잡는 이들에게 두었다.
“삼, 이, 일!”
그리고 마침내 팬들의 외침과 함께 카운트가 모두 끝났을 때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로 커다란 함성이 쏟아졌다.
밀리언 아이돌을 관심 있게 봤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들.
지난 라운드 TOP3, 그리고 밀리언 아이돌의 우승 후보들의 합동 무대였다.
서도화는 인이어를 뚫고 들어오는 함성에 살풋 몸을 떨었다.
영웅 퍼레이드와는 정말 달랐다. 무대 위에 선 자신들을 향한 기대와 설렘을 담은 그 이상의 함성.
그토록 듣고 싶었던 꿈의 소리였다.
서도화가 감격에 미소 짓고 있을 때 무대 아래 직접 만든 56번 슬로건을 들고 있는 팬들은 난리가 났다.
“뮈친!!!!”
도화가. 서도화가.
“염색!!!!!”
을 했다. 그것도 백금발과 같은 새하얀 색으로.
그들은 그냥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 현장에 와서 처음 보는 무대가 서도화의 합동 무대인 것도 감격스러운에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서도화가 염색한 첫 모습을 보았다니.
어떻게 소리를 안 지를 수 있겠냔 말이다.
그때 서도화가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들을 힐끔 보곤 씨익 웃었다.
그러곤 바로 무대가 시작되었다.
* * *
곡명 ‘Rising’.
봄, 여름에 어울리는 무척 시원하고 상큼한 곡이었다.
관객들은 무대 위 마치 원래 한 그룹이었던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멤버 구성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역시나 다들 실력 또한 출중했다.
어려운 난이도의 안무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의 굴곡 없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동작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관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건 천재적인 보컬로 인기몰이를 했던 서도화였다.
스트리밍으로 지켜보는 사람들도 이를 느낄 수 있을까?
아마 저화질에,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방송이다보니 현장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온전히 느끼지는 못하리라.
우리는 떠올라
하늘 높이 따스함을 비추고
빛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시원하게 뻗어내는 노랫소리. 그 음절 하나하나의 힘찬 음색이 너무나 듣기 좋았다.
너무 듣기 좋아서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무대를 놓칠 정도로 생각이 멈췄다.
서도화의 음색이 좋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더했다. 이건 그냥 잘 부르는 수준이 아니었다.
과연 이 목소리를 실제로 듣고도 서도화의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취향의 스펙트럼조차도 벗어난 목소리였다.
거기다 이 또한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면 춤 실력이 수준급이다. 56번 그룹의 메인 댄서가 주상현이 아니었더라면, 메인보컬 포지션이 아니었더라면 틀림없이 메인댄서 포지션을 맡았을 정도로.
가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연습생이었다.
현장에서는 서도화의 보컬과 생각 이상의 댄스 실력에 감탄했다면 스트리밍으로 보는 시청자들은 그의 아이돌스러움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아니, 오열하는 중이었다.
-서도화 아이돌력 무슨 일이세요ㅠㅜㅠㅠㅠ
-앜ㅋㅋㅋㅋ우리 또화 오늘 좋은 일 있었나 겁나 기분 좋아 보인다ㅠㅠㅠ
-유제이는 앞으로 이런 귀여운 무대도 보여달라고ㅜㅜㅜㅜ퓨ㅠㅠㅠㅠ우리애 맨날 합동 무대에서만 물 만난 물고기마냥 생긋거리게 하지 말고……
지금의 서도화는 무척 마음이 여유롭고 편안했다. 경쟁이 아니었으므로 무대 한쪽의 하트 아이콘 화면은 작동하지 않았다.
또한 경쟁이 아니니 무대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으며 멤버 모두가 실력이 좋으니 누군가 실수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무대에 집중하기 쉬웠다.
즐거운 곡, 좋아하는 공연,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 신나는 곡에는 당연히 즐겁게 웃어야지.
그런 생각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무대를 했다. 꼭 웃겠다고 의식하고 웃는 게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미소였다.
거기다 그간의 경험 무시하지 못한다고 카메라와의 시선을 맞춰가며 무대를 누비다 보니 서도화는 자신도 모르는 새 아이돌의 정석적인 무대 매너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런 게 타고났다고 하는 거지!”
무대 뒤에서 서도화의 무대를 모니터링하던 김유진이 감탄사를 터트리며 말했다.
평소 순진무구, 유하고 여린 얼굴과는 달리 데스티니에서 퇴출 이후 반년간 세상 풍파 다 맞은 것 같은 말투와 세상천지 관심 없어 보이는 무심한 표정의 서도화.
그와 모니터 속 인물은 정말 동일 인물이 맞는 것일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
늘 무대는 한결같이 잘했던 서도화지만 이 무대는 뭐라고 해야 할까? 실력 이상의 무언가를 잘 보여준 무대였다.
“카메라도 잘 찾고 웃기도 잘 웃고. 아유 참, 보는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지네! 이게 아이돌이지.”
“그러게요. 진짜로.”
흐뭇해하는 김유진의 곁에서 이병수도 감격스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원래 서도화는 실력이 좋은 멤버였지만 이렇게 보니 참 이 회사는 귀중한 보물 하나를 얻었다 싶었다.
표정이 얼마나 좋은지 얼굴만 봐도 재미가 있을 정도로 이 무대에서의 서도화 컨디션이 무척 좋았다.
이병수는 제 자식이라도 내보낸 표정으로 서도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문득 아!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리고 대표님, 이 무대는 밀리언 아이돌 너튜브 채널에 세로 직캠 솔로 영상으로 올라간다나 봐요.”
“……진짜요? 하. 진짜 내가. 욕 처먹으면서 데리고 온 보람이 있다니까!”
김유진과 이병수가 뿌듯해하며 서도화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을 때.
“…….”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무표정의 연습생이 있었다.
그는 인이어를 귀에 꽂았다 빼며 건들건들 두 사람을 보며 입을 삐죽였다.
그러다 힐끔 화면 속 서도화의 얼굴을 보며 조소를 날렸다.
1번 그룹의 연습생 장우진.
데스티니 시절 징그럽게도 연습한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서도화의 별명 연퀴벌레를 만든 당사자였다.
“우진이 뭐해? 이리 와.”
“아아, 어.”
장우진은 그룹 멤버들의 부름에 걸음을 옮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운 형 비위도 좋다. 서도화랑 같은 무대에서 웃고 마주 보고.”
“야!”
장우진의 말에 1번 멤버 일리가 기겁하며 그의 옆구리를 쳤다.
“여기서 무슨 소리야, 입조심 해.”
“조심하고 있어요. 아무도 안 듣고 있잖아요. 지금 무대 중이라.”
“아무튼 그런 말 좀 하지 마. 할 거면 우리끼리 있을 때나 하던가. 아무튼 여운 형은 걔한테 별 관심 없다고 했어. 이미 나간 애 신경 써서 뭐 하겠냐고.”
“……비위 좋은 거 맞다니까요. 착해빠져서 월평 바람맞힌 애한테.”
“그만 이야기하자. 우진아.”
아니, 착해 빠지진 않았나.
장우진은 일리의 안색이 창백해진 걸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속은 들끓고 있었다. 장우진은 이 기분 나쁜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서도화가 최고의 기대주 소리를 들으며 데스티니에 있을 때도, 밀리언 아이돌 최대 수혜자라는 이야기를 듣는 지금도.
같은 날 연습생이 되어 노력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
장우진은 이 비열한 마음을 굳이 합리화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게 뭐 어때서? 운이 좋아 쉽게 재능을 찾고 쉽게 앞으로 나아가는 놈을 질투하는 게 뭐 어때서.
때로는 질투와 열등감이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법이다. 그 덕분에 장우진은 데뷔조에 들었고 서도화를 넘어섰다는 희열을 느꼈다.
밀리언 아이돌에 출연하기 전까진.
‘아 짜증 나네.’
장우진이 다시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쳐다봤다.
무단결석한 주제에 개같이 다시 얼굴 들이밀고 또 수혜자 소리 듣고 앉은 새끼.
“흠.”
이미 소속사도 그룹도 달라진 거 이제 와서 이 짜증을 원래 그랬던 것처럼 서도화에게 직접 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장난은 칠 수 있지.’
“우진이 앞머리 다시 한번 정리해주세요!”
“네!”
장우진이 씨익 웃으며 다가오는 스타일리스트에게 고개를 숙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