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서도화가 눈을 찡그렸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묘하게 얼굴에 붙은 보석이 거슬렸다.
‘조금만 표정을 바꿔도 떨어질 것 같은데.’
아덴도 자신과 같은 생각인지 아까부터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고.
서도화가 저도 모르게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가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앞선 무대가 끝이 나고 제작진이 그의 등을 살짝 밀었다.
“무대로 올라갈게요.”
“감사합니다.”
암전 속 서도화와 멤버들이 천천히 무대로 향했다.
와아아아!
새카만 어둠 속임에도 이들이 56번임을 알아차린 팬들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생각 이상으로 큰 환호성에 주상현을 제외한 멤버들이 한번 멈칫하더니 조용히 고개 숙여 연거푸 인사하며 무대 가운데로 향했다.
서도화는 오프닝 때 한번 겪긴 했어도 재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한번 함성 속에 둘러싸인 것만으론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광경이었다.
멤버 모두가 무대 위 자신의 자리에 섰을 때 여느 라운드가 그랬듯 대형스크린으로 VCR이 재생되었다. 이번 VCR은 서도화가 합숙으로 자릴 비웠을 때 촬영했던 것으로 선곡 발표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서도화는 멤버들과 함께 관객들이 보기 좋도록 자세를 낮추곤 VCR을 감상했다. 그로서는 이 촬영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VCR의 내용이 어떤지 처음 알게 되는 것이다.
VCR은 연습실에 있는 멤버들의 모습이 연습실 이곳저곳에 CCTV처럼 배치된 카메라에 비치는 것부터 시작했다.
멤버들은 연습실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응?
서도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찍이서 보이는 모습이지만 어째 모여있는 멤버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침울했다.
‘무슨 일 있었나?’
생길 일이 있나? 있었다면 서도화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 전달받았을 것이고, 피곤해서 그렇다기엔 선곡이 정해지기 전이라 연습 외의 일정이 없어 충분히 쉬었을 텐데.
서도화의 의문은 영상 속 주상현의 침울한 말로 금방 해소되었다.
-도화 형…….
-도화…….
주상현과 아덴이 연달아 서도화의 이름을 말했다. 서도화의 표정이 애매하게 바뀌었다. 저들이 침울한 이유는 다름 아닌 서도화 때문이었다.
“왜 그래요?”
서도화가 한야에게 작게 묻자 한야가 소곤거리며 대답해주었다.
“상현이는 직전에 아덴이랑 케이가 싸워서.”
“아덴은요?”
“그냥 네가 걱정돼서.”
“아아. 그럼 케이는요?”
서도화의 시선이 영상 속 케이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은 그렇다 치고 케이는 왜 저렇게 안색이 안 좋은 걸까?
케이가 서도화를 보고 싶어 하거나 걱정할 리도 없을 텐데.
한야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촬영 전날 네가 전화로 하프를 산다고 했대.”
“……참 나.”
서도화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셋 다 별것도 아닌 걸로 침울해져 있는 거였다. 자세를 바르게 하려는 서도화에게 한야가 ‘아 참’ 탄성을 내며 서둘러 속삭였다.
“도화야 하프, 주문해뒀어.”
그러곤 바로 고개를 돌려 VCR에 집중했다.
“감사합니다.”
서도화 또한 작게 감사인사를 하곤 화면을 보았다. 서도화의 부재로 침울해진 연습실, 자막에도 [도화를 향한 그리움에 침울한 연습실 분위기]라며 한층 우중충한 분위기를 강조했다.
-한 명 없다고 이렇게 빈자리가 클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주상현의 말에 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상현이는 어제도 도화한테 전화했다며?
-네, 아니, 이 형들이 도화 형 없다고 자꾸 싸우잖아요. 이 형들이 싸우면 도화 형만 말릴 수 있어요. 어젠 한야 형도 회의하러 가고오…….
주상현이 억울하다는 듯이 울먹이는 척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스르륵 몸을 눕혀 아덴의 무릎에 머리를 댔다. 말과는 달리 전혀 억울해보 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막내가 리더에게 동갑내기 형들의 싸움을 가볍게 일러바치는 듯한 상황, 그 덕에 자막도, BGM도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것으로 들어가 있었다.
한야가 물었다.
-케이랑 아덴은 어제 왜 싸웠어?
아덴이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레 웃었다.
-어제는, 뭐 때문이더라.
-스트레칭 하는데 내 등을 눌렀지 않느… 니!
케이가 버럭 대답하자 아덴이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
그러자 주상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야에게 일러바쳤다.
-아니 형, 이 형들 그냥 숨 쉬듯이 싸워요! 진짜 와, 도화 형 없다고 이 정도로 싸울 줄은, 우리 도화 형 들어오기 전에도 이랬었던가?
주상현은 여전히 드러누운 채 조잘조잘 한야에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서도화는 알 수 있었다.
귀여운 BGM 속에서 애교가 일상인 주상현이 투덜거려서 심각해 보이지 않아 그렇지 영상 속 주상현의 억울함은 진심이었다.
저 당시 지친 주상현에게 직접 전화를 받았던 서도화라 알 수 있다. 아덴과 케이 이것들이 아주 보호자 없다고 고삐 풀린 듯이 싸워댔나 보다.
어쨌든 주상현이 몹시 억울한 상황을 아기자기하게 풀어나간 VCR.
-진짜 도화 형 보고 싶어요…….
-잠은 잘 자려나…….
-하프…….
-도화 아마 잘 있을 건, 데…… 너희 도화 많이 보고 싶구나.
멤버들이 자막 그대로 [도화 로스]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연습실 문을 두드리곤 문 앞에 선곡카드를 두고 갔다.
그 이후론 서도화가 익히 아는 상황이 이어졌다.
선곡으로 ‘저주’가 뽑혔다는 것을 보여주고 스태프들과 함께 어떤 컨셉으로 할 건지 대략적인 틀을 짜는 장면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모처럼 팬분들께서 우리를 위해 선택해주신 곡이니까. 도화랑 같이 최선을 다해서 좋은 무대 보여드리도록 하자.
-네!
한야와 멤버들의 각오를 다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VCR이 끝났다.
서도화는 피식 웃곤 자세를 바로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주상현의 억울한 일러바침이 습관적 애교로 무마되었다는 것, 멤버들의 시답지 않은 싸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그리고 출연도 하지 않은 자신의 이름이 가장 많이 불리고 있었다는 것 정도?
선곡에 대한 회의 내용보다 그게 더 기억에 남았다.
여러모로 어이없는 내용의 웃긴 VCR이었다.
그러나 곧 서도화의 미소는 잦아들었다. 조명은 다시 어두워지고 잠시 후 붉은 조명이 무대를 가득 메웠다.
저주라는 곡의 상징과도 같은 색이다.
무대 위 멤버들의 모습이 드러나자 압도될 정도의 함성이 들려왔다. 서도화가 그에 옅게 미소 짓는 순간 곡이 시작되었다.
바이올린 선율로 시작되는 도입부.
무대의 가운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주상현이 클래식한 멜로디에 맞춰 독무를 췄다. 꽤 길게 이어지는 독무 도중 어느 순간 아덴이 슬그머니 스포트라이트 안으로 들어와 그와 같은 안무를 따라 추기 시작했다.
아덴의 의상이 너무 어두워서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주상현과 그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덴의 등장과 함께 바이올린으로만 이어지던 연주에 실로폰 소리가 추가되었다.
그렇게 멤버 한 명, 한 명이 안무에 참가할 때마다 조금씩 쌓이는 악기들이 서서히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원곡에는 없던 듣기 불편한 화음에 어둑한 무대 분위기. 알 수 없는 공포감. 조용하게 펼쳐지는 무대가 오히려 몰입감을 끌어당겼다.
관객들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불안스레 무대만 보고 있었다.
그때 멤버들과 함께 춤을 추던 서도화가 뚝 춤을 멈추더니 춤추는 멤버들 사이로 들어와 허공에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놓듯 탁- 손을 펼쳤다. 그 순간 귀가 아플 정도의 불협화음과 멤버들, 그리고 댄서들의 움직임이 뚝 멎어 들었다.
멤버와 댄서들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대 위로 널브러졌고 그들의 가운데 혼자만 서 있던 서도화가 무표정으로 카메라를 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어두운 밤
You came to me
어두워도 괜찮아
서로를 알지 못한 채
나누는 대화가 좋아
무대 뒤에서 어메스의 무대를 지켜보던 김유진이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첫 파트부터 서도화의 클로즈업이다. 조금 과할 정도로 이것저것 꾸며놓은 보람이 있을 만큼 클로즈업이 무척 잘 나왔다.
아까 전 싱글벙글 웃으며 노래 부르던 스포티 아이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서도화가 시작부터 상당히 분위기를 잘 잡고 있었다.
채팅창이 아닌 현장의 관객들의 반응으로만 알 수 있는 세일링 포인트들이 있었다.
어떤 장면에서 관객들이 크게 몰입하며 좋아하는가. 채팅창은 몰입될 만큼 멋진 장면이 나올수록 오히려 올라오는 채팅 수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현장의 관객들만큼 직설적인 반응이 없었다.
그런 의미로 이번 서도화의 도입부는 무척 성공적이었다.
그의 클로즈업이 무대 양 사이드 화면을 통해 송출되는 순간, 서도화의 말도 안 되게 좋은 목소리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관객석에선 대놓고 ‘헉’ 숨 들이켜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바로 앞에 무대 뒤 제작진이 감탄할 정도로 엄청난 댄스 퍼포먼스가 있었는데 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환호성도 없이 조용하게 노래를 듣는 사람들.
전주의 댄스부터 서도화의 도입부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이 상당히 몰입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파트는 아덴.
“와하!”
김유진이 인상까지 찌푸려가며 감탄사를 날려댔다.
언제부터 아덴의 실력이 이렇게 늘었을까. 아덴은 이제 분위기를 깨지 않고 노래 부르는 법을 알았다. 특유의 건들거리듯 툭툭 내뱉는 노랫소리와 매서운 눈매가 상당히 위협적으로 들렸지만 곡 자체의 분위기와는 딱 맞았다.
김유진은 무대 아래 숨죽인 채 심각하게 공연을 관람하는 56번의 팬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실력 키우기엔 실전만큼 좋은 게 없어요. 그렇죠? 병수 씨.”
오합지졸이었던 아이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노력이 없고서야 이렇게 빠르게 실력이 클 수 없었을 터인데.
김유진은 예전 참가 지원용 영상을 찍던 그 날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부족한 실력을 숨기기 위해 온갖 잔머리를 굴리던 유제이와 멤버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이렇게 실물을 보이고서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실력이 되었다.
참 벅차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