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15위까지의 그룹이 차례대로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고 무대를 떠나갔다.
서도화는 현장에 남은 관객들 사이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 탈락한 그룹의 팬일 것이다.
탈락한 그룹의 팬들은 일부 현장을 떠났고 일부는 남아있었지만 대신 분함에 눈물을 보이거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침울해진 분위기. 그러나 순위발표는 계속되었다.
“14위부터 11위까지의 그룹 공개합니다.”
띠링띠링!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코인 소리가 들리며 다섯 개의 슬롯이 공개되었다.
동시에 현장은 또다시 술렁였다.
순위별 그룹을 살피던 서도화의 시선이 13위에서 멈추었다. 13위는 15번 그룹. 오프닝 조의 메인댄서 단의 그룹이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큰 코멘트 없이 바로 화면이 바뀌어 또 다섯 개의 빈 슬롯이 나타났다.
“10위부터 6위까지의 그룹 공개합니다.”
곧바로 채워진 슬롯의 번호를 본 어메스 멤버들은 작게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도화가 한야와 시선을 교환했다.
공개된 슬롯 중 어메스의 번호는 보이지 않았다.
이는 정말 희소식인 것이 어메스가 굳이 다른 그룹과 협동하지 않아도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특별한 코멘트 없이 빠르게 빠르게 진행을 이어가던 서영의 목소리가 슬그머니 여유를 되찾았다.
“4라운드의 TOP 5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5위.”
5위가 공개되었다. 1라운드부터 TOP 10 내엔 무조건 들던 중소기업의 그룹으로 최근 조작 의심을 강하게 받고 있는 그룹이었다.
서영은 채팅창을 빠르게 살피고 간단한 소감만 요청한 뒤 서둘러 진행을 넘겨버렸다.
좀 더 토크를 끌어가기엔 채팅창의 반응이 몹시 안 좋았다. 더 끌어도 상관은 없지만 5위 그룹 당사자들이 무척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4위 공개합니다.”
4위가 공개되자마자 현장이 술렁였다. 서도화도 움찔했다.
4위 49번(채널 소래담)
4위는 소래담의 팀이었다. 눈에 띄는 상승도 하락도 없이 그럭저럭 순위를 유지했지만 1라운드 1위를 했던 걸 생각하면 부진하다고 보는 게 맞는 순위였다.
이에 소래담과 그의 멤버들은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크게 순위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4위는 49번 그룹이 차지하였는데요. 49번 그룹의 리더인 소래담 씨가 대표로 소감을 발표해 주실까요?”
“아, 네.”
마이크를 받아든 소래담이 멤버들을 이끌고 무대 앞으로 나왔다.
응?
그 순간 서도화는 현장의 분위기가 조금 묘해짐을 느꼈다. 관객들의 반응이 묘하다는 게 아니었다.
진행자 서영과 무대 뒤 제작진들의 분위기가 뭔가 묘하게… 긴장을 한 것 같았다.
합숙 때까지만 해도 활달하게 때로는 과하게 밝았던 소래담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소감을 말했다.
“4위,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 이번 무대는 멤버 모두가 최선을 다해 만든 무대였습니다. 그 노력을 저희 팬 여러분들이 인정해주시고 저희에게 소중한 표를 던져주시는 것만큼 기쁜 게 없습니다.”
서도화가 소래담을 빤히 쳐다보았다. 소래담은 무척 기뻐 보였지만 한편 지쳐 보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 소래담을 지켜보았던 그의 구독자들도 그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고 의아함 섞인 채팅을 연신 올려보냈다.
-형 왜 그래…? 불안하게
-ㅠㅠ많이 지쳤어? 괜춘?
-헐 래담이 저렇게 처진 거 첨 봄…
이 상황을 지켜보는데 왜 자꾸 숙소에서 비난 댓글을 보여 상처받은 얼굴을 하던 소래담의 모습이 생각나는지.
에이 설마 아니겠지? 기권은 아니겠지?
소래담 또한 채팅창을 확인했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잘근거리다 이내 조심스럽게 그러나 의연하게 말했다.
“저는 언젠가 가수로서, 래퍼로서 꼭 한번 무대에 서보고 싶었습니다. 예전 데뷔했으나 무대 한번 오르지 못했던 무명 래퍼로서 한번 피워올렸다 사그라든 오랜 꿈이 이런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무척 기쁩니다. 하지만-”
소래담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
“저희들은 이제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 참가했습니다만 그 목표는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경연의 마지막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이젠 물러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댓글들의 말이 맞았다.
보상을 원치도 않으면서, 받을 생각도 없으면서 간절한 연습생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선 안 된다.
처음엔 그게 왜 안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답답했지만 정말 꿈을 향해 달려가는 연습생들과 합숙을 하며 이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경연을 치르며 친해진 수많은 연습생들, 한 사람이라도 많은 연습생이 이 방송으로 기회를 얻길 바랐다. 좀 더 솔직하자면 더는 욕먹기도 싫었고.
그렇기에.
“저희 49번은 이번 라운드를 마지막으로 기권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무대를 준비할 때의 마음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소래담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현장은 그야말로 뒤집어졌다. 순위 높은 그룹이 자진해서 기권을 하다니. 온갖 일이 다 일어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도 역대급 사건이었다.
이 상황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
-??뭐임? 진짜?
-ㅋㅋㅋㅋㅋ악플러들이 또…
-아니 왜 기권을…
채팅창은 혼란에 휩싸였으며 관객들도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연습생들 대부분은 어메스 멤버들과 같이 벙찐 채 굳어 있었고 일부 소래담 그룹과 인연이 있는, 이를테면 함께 오프닝무대를 준비한 단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1번 그룹의 연습생 장우진은 고개를 팍 숙인 채 몰래 웃었다. 이를 보지 못한 같은 그룹의 리더 최여운은 몹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소래담을 보고 있었다.
이들 중 벙찐 서도화, 울먹이는 단, 놀란 최여운 세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현장의 사이드 스크린과 스트리밍 화면을 통해 비쳤다.
……이거 진짜인가?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서도화는 서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영은 무척 침착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팝넷 측도 알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소래담의 말은 진짜 폭탄 발언이 아니고, 미리 상의하고 이루어진 발표였다.
서영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네, 49번 그룹, 4라운드를 마지막으로 기권하겠다 의사를 밝히셨는데요. ……여러분, 이 상황은 49번의 돌발적인 발표가 아니며 미리 저희 밀리언 아이돌 측과 상의를 한 부분입니다.”
서영은 현장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하, 이래서 그냥 기사로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일반인 참가자들을 데리고 하는 경연도 아니고 연습생이 도중에 대놓고 기권하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소래담의 경우 연습생이 아니긴 하지만.
서영은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서둘러 진행을 이어갔다.
“늘 좋은 무대, 본적 없던 독특한 무대를 보여주시며 승승장구하던 그룹인 터라 더더욱 기권이 무척 아쉽습니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이런 저희 49번을 따뜻하게 대해준 연습생분들, 그리고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까지. 꼭 여러분들이 원하는 좋은 결과가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소래담이 연습생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았다. 그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던 이들 모두가 소래담과 시선을 마주했다.
서도화 또한 소래담의 다정한 눈빛을 마주했다. 소래담은 그와 눈이 마주친 서도화에게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팬 여러분, 구독자 여러분, 그리고 함께해준 우리 멤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소래담이 씨익 웃으며 마이크를 내렸다. 기권하는 주제에 뻔뻔하게 참 말도 많이 했다. 그러나 고마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등과 어깨에 49번 멤버들의 손이 달라붙어 왔다. 여기서 끝내게 된 것에 대한 위로, 그리고 서로를 위한 다독임이었다.
“네, 49번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다음 순위 공개하도록 할까요?”
서영이 이들의 기권 사태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얼른 진행을 이었다.
혼란을 진정시킬 수 있는 건 다음 순위를 발표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3위! 공개해주세요.”
3위가 발표되었다. 소래담의 기권으로 여전히 벙찐 채 있던 서도화와 어메스 멤버들은 3위가 공개되자마자 퍼득 정신을 차리며 놀란 숨을 들이켰다.
“우, 우리…….”
“나, 나와 너희들이…….”
주상현과 케이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어메스가 3위가 아니었다.
남은 슬롯은 1위와 2위. 남은 그룹은 1번과 56번.
어메스는 적어도 2위는 확정이라는 소리였다.
3위를 차지한 그룹이 앞으로 나아가 소감을 말하는 동안 어메스는 조용히 난리가 났다.
-진짜인가?
-나와 너희들이 1위를 할 수도 있는 것인가?
주상현을 비롯한 모든 멤버가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와중 케이는 서도화의 머릿속으로 자꾸 물어왔다.
뭐야, 이 미친놈 이거 마법 쓰는 건가? 하지만 그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서도화도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1위 아니면 2위. 정말 높이도 올라왔다. 원래 이름만 궁금하게 하자던 목표보다 훨씬 높다.
그래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마나 놀라고 긴장했는지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고 마침내 3위의 소감이 끝나고 그 어느 때보다 힘찬 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영광의 1위, 그리고 2위가 발표되는 순간입니다.”
양 사이드 화면이 전환되었다. 한쪽 화면엔 어메스가, 다른 한쪽은 1번 그룹이 비치고 있었다.
“1번과 56번, 과연 1위는 어느 쪽이 차지하게 될지! 동시에 공개합니다!”
그리고 순위가 공개되었다. 현장에 큰 환호성이 쏟아졌다.
1위 56번(유제이 엔터테인먼트)
2위 1번(데스티니 엔터테인먼트)
절대로 바뀌리라 생각지 않았던, 부동의 순위가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
1위……. 1위다.
서도화는 멍하니 가장 화려한 슬롯에 새겨진 숫자를 보며 손을 뻗어 아덴의 귀를 막아주었다.
퍼엉!
큰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지고, 서영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합니다! 4라운드의 1위는 56번! 이번이 첫 1위가 되겠네요!”
어메스가, 1위를 따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