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서도화의 걸음이 멈췄다. 최여운과 장우진이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괜찮다고 그때 그 사건을 두루뭉술하게 넘긴 최여운과는 달리, 장우진은 서도화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던 데스티니 시절에도 그를 대놓고 못마땅해하던 연습생이었다.
“어…….”
사과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장우진이랑 같이 있으면 말 걸기가 좀.
‘다음에 해야 하나.’
아니, 그러기엔 지금까지 경연을 치러본 경험상 지금처럼 다른 그룹과 카메라 없이 만나 대화할 기회 자체가 잘 없다.
그러나 아마 장우진이 곁에 있는 한 제대로 된 사과를 건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서도화가 빠르게 대화를 포기하고 돌아서려던 순간 최여운과 서도화, 장우진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
최여운이 서도화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에 서도화는 걸음을 다시 돌려 최여운에게 다가갔다.
“여운 형. 안녕하세요. 우진-”
“뭐야. 1위 자랑하러 온 거야?”
“…그런 거 아냐…….”
서도화의 말에 장우진이 눈썹을 까딱이며 낄낄거렸다.
이럴까 봐 망설인 거다. 서도화는 장우진의 시선을 피하며 최여운에게 말했다.
“형,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그러나 서도화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아니, 됐어.”
최여운이 자신을 피했다.
서도화가 굳었다. 그는 최여운의 이런 표정을 처음 보았다. 성가시다는 표정. 더이상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저 냉랭한 표정.
“촬영 중에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사과는 받을 테니까 이제 그만 말 걸어줬으면 좋겠어.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자.”
서도화가 당황하는 사이 최여운은 한숨을 쉬며 장우진에게 말했다.
“네가 뭘 하든 난 신경 안 쓸 거니까 마음대로 해. 나한테 들키지만 마.”
“어, 신경 안 쓰게 하겠습니다~.”
최여운은 서도화를 한번 노려보곤 자리에서 벗어났다. 장우진은 히죽이곤 최여운을 따라가며 굳어버린 서도화의 귓속에 속삭였다.
“1위 자랑하러 왔다가 개무시 당하네?”
저 멀리 떠나버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서도화가 어이없어 웃음을 지었다.
아 괜찮구나. 그럼 됐다.
그러곤 미련 없이 돌아섰다. 당황하긴 했어도 상처받진 않았다. 다만 좀 오해를 받게 된 것 같아 걱정되긴 했다.
합숙 땐 카메라가 없어도 그럭저럭 예전처럼 대해주던 최여운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미안해했던 서도화였다.
그래, 생각해보면 장우진 말처럼 기만하러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
타이밍 잘못 잡았나 보다.
서도화는 쯧, 혀를 차곤 다시 대기실로 향했다. 말 걸지 말라고 하니 의도치 않게 기만까지 한 미안함을 담아 그렇게 할 생각이다.
그때 자판기 앞에서 포도봉봉을 마시고 있던 케이가 서도화에게 따라붙었다.
“너 대기실 안 돌아갔냐?”
“돌아가는 길을 모른다. 안내해라.”
“어이없네.”
서도화는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케이를 데리고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말없이 서도화를 따라오던 케이가 그를 힐끔거렸다.
“음유시인.”
“왜.”
케이는 음료수 캔을 흔들며 말했다.
“최여운이란 사람 좋은 사람인가?”
“어? 글쎄. 난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는데.”
오늘은 좀 평소와 다르긴 했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바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군.”
케이는 한참 동안 조용히 서도화를 따라가다 말했다.
“음유시인, 그자들을 경계해라.”
“……뭐?”
케이는 서도화를 보지 않고 걸음을 계속했다.
“저 녀석들 질 나쁜 장난을 꾸미는 듯하군.”
“질 나쁜 장난?”
서도화가 되물었지만 케이는 말없이 앞서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다.
서도화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 * *
“그거 들었어요?”
유제이 엔터 회의룸. 5라운드 경연 선곡 회의를 위해 모인 직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었다.
“저번에 방영된 밀리언 아이돌 2화요. 우리 애들 아크로바틱 분석된 거.”
1화가 방영된 다음 날 공개된 2화에서 56번이 선보인 무대는 큰 화제가 되었다.
SNS 실시간 트렌드는 물론이고 너튜브 인기 동영상 2위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에 따라 56번의 공연을 두고 갖가지 리액션, 리뷰, 분석 영상도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이슈가 된 영상이 이들의 아크로바틱을 분석한 영상이었다.
[도움닫기 없이 이런 아크로바틱이 가능하다고?!]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는데 트릭킹 챔피언이 어메스가 공연 중 선보인 아크로바틱 동작들을 세세하게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30분가량 무대 영상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며 어메스의 아크로바틱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기술인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과적으로 도움닫기도 없이 저 높이, 저 자세로 뛰어오르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언가 장치를 사용했거나 인간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여러 전문가들과 함께 무대를 몇 번이나 돌려봐도 본인들의 근육을 쓴 게 확실하고 장치를 사용한 흔적이 없으니 그냥 저들은 인간이 아니다.란 결론을 내며 영상은 끝이 났다.
서도화는 그의 영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었다. 아덴과 케이 둘은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덕분에 56번은 차별화된 아크로바틱 아이돌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다.
아무튼 그 영상 덕분에 56번 공연의 동영상 조회수는 폭발적으로 급상승했다.
정말 감탄스러웠다. SNS, 너튜브, 거기다 4라운드 1위까지. 경연에 참가한 뒤로 56번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그들을 성공 가도를 향해 떠밀어주는 느낌이었다.
모든 게 너무나 순조롭게 잘 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제이의 직원들은 5라운드를 앞두고 이렇게 평온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구성할 수 있었다.
다크서클 가득 매단 채 혹여나 멤버들이 사고라도 칠까 무대에서 실수라도 할까 불안해하던 초반과는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분위기였다.
“하하, 진짜 조회 수 잘 나온다고 하니 너무 좋네요. 자, 그런데 이제 슬슬 5라운드 곡을 정해야 할 것 같거든요?”
김유진이 적당히 화제를 마무리하고 직원들을 집중시켰다.
쏟아져나오는 56번에 대한 소식에 즐거워하는 건 좋지만 이제 집중할 때다.
아무리 기뻐도 이를 즐기다 중요한 5라운드 경연을 나태하게 치를 순 없으니.
“주제가 자유곡이다보니 그래도 좀 선곡 범위가 넓어지겠네요.”
“댄스곡 중에 어메스가 안 해본 컨셉이 뭐가 있을까요?”
“안 해본 컨셉, 흠.”
어메스의 아크로바틱 기술은 상당히 뛰어나지만 그것도 몇 번 보다 보면 결국엔 질려버린다.
그렇기에 일부러 다른 그룹보다 훨씬 다양하고 극단적인 컨셉의 무대를 내세워 아크로바틱에 대한 관심도를 조금씩 줄이는 작업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경연에서 어메스의 그룹 이미지를 지키며 해볼 만한 컨셉은 웬만한 건 다 해봤다.
아크로바틱 피로도를 줄일수 있는 극단적인 컨셉이면서 어메스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컨셉의 곡이 뭐가 있을까.
직원들이 고민하던 차 한야가 손을 들었다.
“저희 생각해보면 해볼 건 다 해봤는데 오히려 서정적인 컨셉은 안 해본 것 같아요.”
“……그러네?”
김유진이 짝 손뼉을 쳤다. 게임, 아포칼립스, 심지어 딥다크까지 건드렸건만 되려 아이돌들이 제일 많이 한다는 서정적인 곡은 써본 적이 없었다.
한야가 말을 이었다.
“제 취향이기도 하고, 저는 경연 끝나기 전에 한 번쯤은 서정적인 곡으로 무대에 서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은 생각인데 그럼 어떤 곡을-”
그때 직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저기, 제가 요즘 좀 빠져있는 노래가 있는데요. 항상 들으면서 우리 애들이 불러봐도 좋겠다 생각했거든요?”
“뭔데요?”
“투머치의 ‘유니버스’라는 곡이에요.”
직원이 제 휴대폰을 켜 곡을 재생시켰다.
“이 가수가 뭐라고 해야하지? 약간 컨셉의 끝에 있는 가수라고 해야 하나? 발라드이긴 한데 굉장히 신비롭고 몽환적인 곡을 많이 내시거든요? 그중에서도 이건 비교적 빠른 곡이고.”
직원은 이 가수를 무척 좋아하는지 곡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늘어놓았다.
서도화는 곡의 도입부를 듣자마자 바로 말했다.
“저는 좋습니다.”
이 곡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보라색 안개 같은 노래였다. 몽환 그 자체. 취기 가득한 꿈 속에 있는 것처럼 몽롱하고 신비로운 느낌의 곡이었다.
거기다 편곡하면 얼마든지 어메스 스타일의 경연곡으로 만들 수 있을 법한 포인트도 많았다.
아덴도 바로 말했다.
“그럼 저도 좋아요.”
“나도 좋습니다.”
케이가 말했다. 주상현도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발레? 현대 무용 같은 안무가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저희 스타일은 가져가되 살짝 도전적인 것도 들어가게.”
“어, 알겠어. 이 곡으로 확정되면 그렇게 만들어주실 수 있는 안무가분들로 섭외해볼게.”
우리 1위 그룹에게 뭔들 못해주리오. 김유진이 싱글벙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수첩에 메모했다.
한야가 부드럽게 웃었다.
“곡을 좀 많이 건드려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저도 좋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직원들은 당연히 동의했다. 멤버들의 곡 정하는 센스는 믿을 만했고, 무엇보다 이들이라면 어떤 곡이든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무대와 성과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직원들의 반응을 본 김유진이 말했다.
“그럼 곡은 유니버스로 하고 스튜디오는 한야랑 제가 의논해보고 전달할게요. 다들 기존에 하시던 대로, 이번 라운드도 파이팅합시다!”
“네!”
노력하는 것 이상의 성과가 돌아오는 요즘, 복덩이들을 품은 직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대답했다.
* * *
그날 저녁 서도화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켰다. 오늘 선곡 회의에서 56번 반응이 좋다며 싱글벙글하던 직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소 너튜브 등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아까 전 직원이 대박이라며 추천해준 56번 관련 영상들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냥 너튜브에 밀리언 56번 치면 맨 위에 떠 있어. 그 외에도 너희 칭찬하는 영상 되게 많은데, 그래도 좀 가려서 보긴 해야 할 거야. 괜찮으면 내가 링크 보내주고.’
직원의 말에 의하면 그냥 밀리언 56번으로 검색하면 나온다고 한다.
서도화는 너튜브에 그대로 검색하고 별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려보았다.
“허.”
아까 전 직원들이 말하던 아크로바틱 분석 글부터, 심지어 기권한 소래담의 [스포 없는 밀리언 아이돌 참가 후기], 56번 아크로바틱 모음(스트리밍, 스포O) 등등 진짜 별의별 영상이 다 나왔다.
생각보다 정말 많았다.
SNS 말고 너튜브를 먼저 찾아봤어야 했나?
설렁설렁 생각하며 조금 더 스크롤을 내리던 서도화는 어느 한 채널의 영상 제목에 굳어버렸다.
[밀리언)서도화 과거 대형기획사에서 쫓겨난 이유… 재능에 감춰진 심각한 인성]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