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현을 뜯는 아름다운 선율이 연습실 한가득 울려퍼졌다.
김유진과 멤버를 포함한 직원 모두가 하프의 음색과 서도화의 모습에 넋이 나갔다.
‘어째서.’
어째서 이 광경이 이토록 아름다운가.
악기란 힘은 이리도 대단한 것인가.
이걸 공짜로 봐도 되나?
쟤는 저런 것도 할 줄 아나.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젠 서도화 특유의 음색에 어느정도 적응했나 했더니 수준급의 하프 연주 실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하프만 따로 들어도 이 정도인데 여기 노래까지 한다면?’
김유진이 오소소 몸을 떨었다. 이 정도라면 경연에서 서도화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기는커녕 며칠간 연주하며 노래 부르는 서도화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을 것이다.
“……비싼 값 하네.”
한야와 멤버들은 서도화의 모습에 몰입한 나머지 저 구석에서 거의 눈을 뒤집어 까며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비주얼 담당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한 건 하프 켜던 서도화였다.
‘아이고, 예상은 했지만…….’
면목 없고 또 조급해져서 하프라는 치트키를 꺼내 들기는 했지만 그러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노래만 부를 땐 그럭저럭 버티던 케이가 서도화의 연주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저것도 참 문제다. 얼마나 타락했으면 대놓고 능력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고작 이 패시브 스킬에 저렇게까지 영향을 받는지.
모두가 서도화의 연주를 들으며 감탄하는 이 순간에도 마왕은 한 꺼풀씩 정화당하고 있는 중일 테다.
“으, 으, 음유시인…….”
서도화는 케이가 진짜로 기절하기 전에 연주를 멈췄다.
“이 정도 쳐요.”
“도화야……. 넌 진짜 복덩어리야!”
“너 앞으로 절대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왜 하프 켤 줄 아는 걸 이제 말했니!”
서도화는 직원들의 극찬에 민망스레 고개를 꾸벅이고 서둘러 케이를 가리켰다.
“케이가 이상해요.”
“어?”
“……케, 케이야!”
멤버 그리고 직원들은 이제야 맛탱이가 간 케이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서도화는 그 모습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어떡하지?
케이와 활동을 계속해나가려면 저걸 어떻게든 고칠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 같은데.
“흠.”
서도화가 침음을 흘렸다.
‘……구마…의식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 그런 걸 하면 케이 자체가 구마될지도.
마왕과 악마가 같은 과던가?
이럴 때 제2세계에선 어떻게 해결했더라.
보통 이런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주던 하이넬과 상태창이 없으니 영 해결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서도화가 고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덴이 용케도 그의 고민을 알아차리고 퉁명스레 말했다.
“그냥 내성 생기면 되는 거 아니야?”
“뭐?”
“쟤 무대에서도 저렇게 괴로워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 눈 딱 감고 백 번만 들으라 그래.”
“……으음.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게 하면 나도 케이도 죽지 않을까?”
“백 번 기절하고 깨는 게 뭐가 어려워? 너도 걍 하프치면서 노래만 부르면 되잖아. 수련한다 생각해.”
용사는 역시 수련광이긴 했다.
서도화는 그냥 말을 말기로 했다.
“싫어. 하프 치다 손 불어 터지는 것도 싫고 목 나가는 것도 싫고 눈앞에서 괴로워하다 기절하는 거 맨정신으로 보기도 싫어.”
손끝이 다 불어 터지도록 하프 켜는 건 전장에서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 케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비틀비틀 다가왔다.
“나 또한 내성 수련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알아. 나도 싫다니까?”
“대신…… 방법은 있을 것 같군.”
케이가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 * *
“서도화의 하프 실력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합니다.”
“뭔…….”
“그의 하프 연주를 들어보았지요? 그의 노래 실력을 아시지요? 이건 제대로 형식을 갖추고 홀로 무대에 서는 것이 옳습니다.”
케이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동안 주상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도화에게 귓속말했다.
“왜 저러시는 거예요?”
서도화는 주상현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저 자식, 말은 많은데 설득력은 떨어진다.
뭔 좋은 수가 있다고 그렇게 폼을 잡나 했더니 고작 서도화가 하프 칠 때는 무대에 혼자 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고 있다.
저걸 굳이 왜 저렇게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장대하게 말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저놈치고는 괜찮은 생각이긴 하네.’
서도화가 무대 위에서 하프를 켜는 동안 케이는 귀를 막고 있으면 될 테니.
백 번 듣고 내성을 기르자는 아덴의 의견보다는 훨씬 좋다.
“그래서 케이야.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케이의 장황한 설명을 결국 이해하지 못한 직원에게 서도화가 대신 말했다.
“제가 도입부에 혼자 하프 연주하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안무를 추기 시작하면 중간에 하프 켜는 타이밍도 애매하니 도입부에 임팩트 주는 용도로 사용하고 말자는 거다.
“하프 연주로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도입부 파트 이어보는 게 어떨까 하고. 아까 전에 케이, 아덴이랑 이야기해봤는데.”
서도화의 말을 들은 우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프 연주를 넣을 거면 시작이나 마지막에 넣는 게 맞지. 격렬하게 춤추다가 갑자기 띵땅거리는 것도 좀 웃기니까.”
“아예 시작과 마지막를 전부 하프로 해버리죠?”
“오 그거 괜찮네요. 하프가 공연을 열고닫는다는 느낌으로.”
김유진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도화의 연주가 생각보다 훨씬 임팩트 있어서 크게 강조할 수 있는 세트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예 중앙 스테이지를 도화 연주장으로 만들어버리죠. 그리고 마지막엔 도화 연주에 맞춰서 상현이가 독무를 추고-”
김유진의 말을 듣던 서도화가 머쓱하게 고개를 기웃거렸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하프 연주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어쩌다보니 케이의 아이디어로부터 이 공연의 중심이자 시그니처가 하프가 되어가고 있었다.
‘역시 연주에 발동되는 정화가 강하기는 강하네.’
그러나 서도화는 알지 못했다. 직원들이 이렇게나 하프에 집착하는 이유는 서도화의 정화 스킬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저 하프를 켜는 서도화의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을 강하게 붙들어놓을 정도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라는 걸.
서도화가 하프 켜는 모습이 카메라를 통해 나간다면 또 상당한 팬 유입이 이루어질 것이 뻔했다.
단 한 번 꺼낼 수 있는 카드인데 제대로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 * *
편곡도, 안무도, 연습도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서도화가 연습실 구석에 앉으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악플과 비난이 괴로워서 기권까지 한 소래담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이대로 무대에 서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로 현재 서도화는 많은 공격을 받았다.
하나의 사실과 다수의 거짓이 섞인 폭로 글은 어느새 진짜인 것처럼 생각되기 시작했고 사실무근이라는 소속사의 입장은 팬들만 믿었다.
그리고 이런 나날이 계속될수록 서도화는 슬픈…게 아니라 점점 삐뚤어지고 있었다.
장우진.
이 개새.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이 자식은 글을 그렇게 잘 쓰면 작가나 할 것이지.
이 정도로 분위기가 격앙됐으면 이젠 해명해봐야 소용이 없다. 사실 해명하기에도 무단결석은 진짜라 애매하다.
한야와 김유진이 데스티니와 연락을 취해봤지만 해당 글이 어떤 연습생이 쓴 글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는 이야기만 돌아왔다고 한다.
그에 한야는 이번 라운드 끝나고 싹 다 처리할 거라며 평소 쓰지 않던 말을 쓰는 등 완전히 다크해졌다.
그 글의 작성자가 장우진이라는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황. 딱히 해결방도가 없는데 억울하게 공격은 계속 받고 있는 상황.
그래서 결국 삐뚤~해진 서도화는 결심했다.
‘직접 조져버리겠어.’
오랜만에 용사와 한 쌈박질하던 성깔을 살려 이 상황을 직접 해결하겠다고.
“연습 재개하겠습니다!”
우나나의 외침에 서도화는 한층 거칠어진 눈빛으로 일어났다. 손에 든 아름다운 하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서도화는 그 눈빛 그대로 연습실 한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삐뚤한 표정과는 달리 그 손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다정하고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도화야? 표정 좀 풀자.”
서도화는 생각했다.
일단 연습을 열심히 할 것이다. 열심히 연습해서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1위 할 것이다.
그리고나서 직접 장우진을 찾아가 조질 것이다.
진짜로 조져버릴 것이다.
‘가만히 있기에는 욕을 어지간히 먹었어야지.’
“응?”
생각없이 무대를 준비하던 케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케이가 자신의 몸을 쓸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험악한 얼굴로 하프를 연주하는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서도화가 하프를 켜고 있는데 몸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정화 당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설마 내성이 생긴 건가!’
케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거푸 자신의 몸을 쓸어보고 있을 때 아덴이 피식 웃으며 케이에게 말했다.
“이야, 일년에 한번 정도 있을까말까한 흔치 않은 날인데 그게 오늘이네.”
“뭐?”
“그거 아냐? 음유시인도 타락하면 정화 못 해.”
케이가 무슨 말이냐는 듯 인상을 구겼지만 아덴은 그저 흥미롭게 웃으며 대답 없이 서도화를 쳐다볼 뿐이었다.
신의 사랑을 듬뿍 받은 성스러운 음유시인. 하지만 그런 이도 사람인지라 이따금 내면의 어둠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리고, 어둠에 사로잡힌 자는 정화 기술을 쓸 수 없다.
그가 연주를 하는데 정화가 발동되지 않는다는 건 서도화는 지금 장우진에 대한 분노가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