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화내지 말자.
가뜩이나 욕먹고 있는데 카메라 앞에서 기분 나쁜 티라도 나면 상황은 더 안 좋아질 것이다.
화는 거짓 폭로자한테만 내면 된다.
‘지금은 공연에 집중하자.’
감정적으로 흔들려서 무대를 망치는 게 그가 원하는 것일 터.
서도화가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쉬었다. 연거푸 심호흡을 하자 억울함과 분노가 조금 억눌리는 듯했다.
패시브 스킬 정화, 평소 쓰기 싫어도 강제로 쓰이는 거 이럴 때 이용이나 해먹어야지.
이제 연주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서도화에 대한 소문 대신 그의 연주와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래, 사람 하나 잡는 데 어둠이 왜 필요해? 입과 머리만 있으면 되지. 그리고 어둠 어쩌고 하는 거 좀 케이 같다.
케이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서도화를 지켜보았다. 역시 감정제어를 몹시 잘한다.
아우라처럼 타오르던 어둠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이제 그는 평소처럼 정화 기술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이는 그의 몸에서 어둠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돌아선 그의 시선 끝엔 자신을 향해 비소를 날리는 아덴이 있었다.
“걱정되냐?”
“헛소리라고 했다.”
케이의 진지한 대답에 아덴은 껄렁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너 쟤 연주할 때 귀 제대로 틀어막아라. 무대 위에서 기절하지 말고.”
“민폐는 끼치지 않는다.”
“그럼 됐어.”
케이는 가볍기 그지없는 말투의 아덴을 떨떠름하게 쳐다보다 서도화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의 소리로 말했다.
“음유시인의 복수를 도울 생각인가?”
“어.”
아덴은 망설이지도 않고 말했다. 사실 돕지는 않고 그냥 곁에 있어줄 생각이다.
서도화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혼자서 잘 처리해왔다. 다만 동료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복수는 외롭지 않을 터이니.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면상이라도 확인하려고.”
“……말투가 저렴하기 그지없구나. 아덴.”
“네가 뭔데 내 말투를-”
아덴은 생각없이 케이에게 대답하다 멈칫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다.”
또 저도 모르게 원수인 마왕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말았다.
제 성격은 이래서 문제다.
조금만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 금방 경계가 풀려버린다. 그래서 늘 아덴 대신 주변의 동료들이 새로운 사람을 경계하고 받아들이는 역할을 했었다.
서도화는 이 문제에 대해 ‘너는 용사니까 어쩔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았었다.
“얘들아 지금 밥 사러 갈 건데 뭐 먹을래? 경연 직전이니까 든든한 거 먹자.”
대기실 내에 쩌렁쩌렁하게 이병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갈비탕이요.”
아덴은 가장 먼저 메뉴를 말하며 서도화에게로 향했다.
“저는 안 먹어도 괜찮아요.”
“……혀엉. 안 돼요!”
그냥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거부한 서도화는 주상현의 걱정은 좀 받았지만 괜찮았다. 그는 어느새 평온함을 되찾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시간 뒤 5라운드 경연이 시작되었다.
* * *
모니터 화면 속 대형 스크린엔 커다란 숫자로 카운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 화면의 오른쪽 채팅창에 올라가는 채팅들은 가히 대기실 분위기를 암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ㅋㅋㅋㅋ 하다못해 본인 손으로 해명문이라도 내고 출연해야 하는 거 아님?
-사실이니까 해명도 못 하는 거임ㅋㅋㅋ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연생도 따돌림 시켰다고 하면 학교에서는 또 어땠을지…
-…오늘 혹시 서도화도 나오나요…? 아니죠?
-그멤 버 나오면 저 이제 밀리언 아이돌 안 봅니다
-유제이는 그멤 아니면 실력 좋은 멤버가 없나;; 주상현 센터 올리고 탈퇴시켜라
-죄송한데 혹시 뭔 일 있었나요?ㅠㅠ
-아무리 잘생기고 실력이 좋아도 인성이 되바라지면 품고 갈 수 없음 적어도 나는 그럼… 유제이는 팬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함
아직 오프닝도 시작하기 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팅창은 56번 서도화에 대한 비난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아, 모니터 잠시 끄는 게 어때.”
이병수는 서둘러 모니터를 만지작거리며 전원 버튼을 찾다 들려오는 서도화의 목소리에 인상을 쓴 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저 어차피 시력이 안 좋아서 채팅창 잘 안 보여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자신 때문에 멤버들이 경연 상황을 못 보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다만 서도화는 이 사태를 눈으로 직접 목도하며 몇 가지 느낀 바가 있었다.
첫 번째로 생각보다 사람들은 폭로 글의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내용의 글이었다.
실제로 몇몇 사람들이 폭로 글의 문제점을 찾아 설명했지만 뭐, 들으려는 사람이 있겠는가?
두 번째로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재기가 가능한가 의문이 들었다.
이미 이미지에 큰 타격을 겪었는데 그럼에도 해명이 통할까? 해명을 하면 다시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까?
채팅창에 올라오는 수많은 악플보다 이대로 무대에 서는 게 앞으로도 계속 환영받지 못하게 될까 봐 그게 더 무서웠다.
이미 갖은 상처와 아픔을 겪고 닳을 대로 닳은 마음이 오랜만에 쓰라렸다.
솔직히 처음 그 사이버 렉카의 영상을 봤을 때만 해도 이 일이 이 정도로 커질 줄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폭로 글에 괴롭힘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을 거라곤 당시 당연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직원들의 말로는 팬덤 싸움에 휘발유와 같은 사건이라 이 정도로 일이 크게 번진 거라고 했다.
별일 없어도 견제받고 공격받을 1위 그룹이었기 때문에.
‘해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김유진이 이것도 타이밍이 있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그때 서도화의 어깨 위로 또 머리 위로 두 사람의 손이 올라왔다.
“이번 무대까지만이야.”
“도화야 걱정 마. 다 괜찮으니까.”
한야와 김유진이었다. 서도화는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가 이번 무대까지만이고 뭐가 괜찮다는 걸까?
그러나 서도화는 왜인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며칠간 자신보다 화가 난 모습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두 사람이 오늘은 무척 편안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게 다 해결된 것처럼.
김유진이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네가 억울하게 욕먹는 건 이번 무대까지야.”
“대표님.”
“그러니까 지금은 모니터 끄고 저거 보지 말자. 알겠지?”
그때 갑자기 모니터가 꺼졌다. 아덴이 아예 모니터 코드를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서도화의 고생은 딱 오늘까지. 그렇게 정해져 있다.
김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은 무대에 집중해. 가장 공들여서 준비한 무대니까 채팅창이나 관객 반응에 흔들리지 말고 모르는 척 공연만 해.”
“……제가 뻔뻔하게 행동하는 건 잘해요.”
서도화가 말했다. 그제야 김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리고 경연 끝나면 입장문 쓰자.”
* * *
암전된 무대 위 VCR이 재생되는 동안 서도화는 떨리는 손으로 하프를 꽉 붙잡았다.
무대에 등장할 때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위해 환호해준 팬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가는 게 무서웠다.
미움과 비난보다 실망이 더 무서운 법이다.
최고로 잘 보이고 싶었던 관객들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폭로 글의 주인공이 된 채 그들과 마주하게 되니 무대 위에서 직접 느낄 실망이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그래도 해야 했다.
덜덜 떨리던 손과는 달리 서도화의 표정은 여느 때와 변함없었다.
채팅창에선 VCR이 나오는 내내 서도화에 대한 이야기가 도배되었고 현장에서도 미미한 술렁임이 들렸지만 묵묵하게 하프를 잡고 의자에 앉았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부딪혀보기로 했다.
서도화라고 그냥 감내해야지 하며 생각 없이 무대에 선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부정적인 마음이 클수록 비로소 그 영향력 또한 거대해지는 능력이 있지 않은가.
‘일단 정화하자.’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각해보자면 이런 때일수록 하프를 든 음유시인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무대에 임할 생각이다.
-늘 강하고 신나는 모습만 보인 저희 56번이 이런 컨셉도 할 수 있구나, 이런 무대도 보여줄 수 있구나 하고 느끼실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해 보았습니다. 기대해주세요.
때마침 타이밍 좋게 VCR 속 한야의 소개를 마지막으로 영상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중앙스테이지. 관객들 사이에 둘러싸인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졌다.
“아…….”
관객들 사이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신전처럼 꾸며진 작은 무대 위에서 서도화가 홀로 하프를 든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설마 논란의 그 멤버를 가장 첫 번째로 등장시킬 줄은 몰랐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에 대해 크게 의문을 품지 않았다.
유제이는 논란 속에서도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꿋꿋하게 고수하고 있었고 서도화는 폭로 글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제이 입장에서는 잘못도 하지 않은 멤버를 굳이 꽁꽁 숨겨 두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여론이 여론인지라 논란이 된 멤버를 가장 임팩트 있을 도입부에 등장시키는 게 그리 좋게 보이진 않았다.
-아니 지금 팬들이랑 기싸움 하세요???
-ㅋㅋㅋㅋㅋㅋㅋ놀리는 것도 아니고
-만약 그 일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논란 중인 멤버를 이런 식으로 앞세우는 게 맞다고 보세요?
서도화도 그들의 채팅, 반응을 보았다.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논란의 주인공인 자신이 이 공연의 시작을 맡는 게 좋게 보이진 않을 거다. 기싸움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당당하니까. 그리고 곧 잘못하지 않은 일들은 해명될 테니까.
서도화는 애써 마음을 다잡은 채 연주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