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한참 다른 그룹들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는 시간. 이미 공연이 끝난 그룹들은 꽤 자유롭게 방송국 내부를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서도화는 장우진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부터가 큰 숙제…였으나 아니게 되었다.
“그자는 저쯤에 있다. 들리는 목소리가 여전히 비열하군.”
라고 한때 세상에서 제일 비열하던 마왕이 말했다.
“비열하면 마-”
이때를 놓치지 않고 한 마디 던져보려는 아덴의 말을 서도화가 옆구리를 찔러 막았다.
도움이 될 때는 굳이 시비 걸지 말자. 지금은 빠르게 장우진을 찾기 위해 케이의 좋은 귀를 빌려야 했다.
케이는 자신이 성능 좋은 감지기 정도로 쓰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의 엄청 좋은 귀에 대해 자랑해대며 장우진을 찾아다녔다.
“뭐, 편하긴 하네.”
서도화가 중얼거리며 웃었다.
원래는 순위 발표가 끝나고 혼자서 다녀오려고 했는데 얼떨결에 두 녀석에게 이끌려 계획보다 빨리 장우진을 만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경연이 끝난 뒤 후다닥 찾아다니는 것보단 대기 중인 지금이 시간은 더 많으니 이야기 나누기엔 훨씬 편했다.
“근데 나 지금 복수하려는 거 아닌데? 그냥 글 지우라고만 할 건데.”
당사자보다 열심히 장우진을 찾는 케이의 뒤를 편하게 따라다니며 서도화가 말하자 아덴이 그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야 너 눈 아직 빨갛다.”
서도화가 곧바로 제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고 신나게 이곳저곳 둘러보던 케이가 힐끔 서도화의 눈을 확인했다.
아. 최대한 빨리 무대를 빠져나왔는데 그 짧은 사이 들킨 모양이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잠깐이지만 울컥하는 바람에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여기 있다.”
그때 케이가 손을 들어 화장실을 가리켰다.
오, 때마침 있는 장소가 참 괜찮다. 케이는 들어가보라 손짓하며 팔짱을 끼고 문앞에 섰다.
“감시하고 있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케이가 몹시 협조적이었다.
“어어, 망 봐줘서 고마워.”
케이는 ‘망을 본다’는 말이 무척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인상을 구겼지만 이번에도 별말 없이 얼른 들어가 보라 눈짓했다.
서도화는 케이에게 씨익 웃어 보이며 아덴과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어어? 이런 우연이!”
서도화의 큰 소리에 손을 씻던 장우진이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이렇게 또 보네.”
아덴이 서도화를 힐끔거렸다. 서도화의 표정이 바뀌었다.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상당히 짜증 섞인 눈으로 장우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덴은 케이처럼 어둠을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기운을 느낄 수는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케이가 있었더라면 서도화가 곧 어둠에 잡아 먹힐 거라 말할 터다.
그만큼 도화는 분노하고 있었다.
“……뭐냐?”
장우진은 서도화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곤 그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지나갈 수 없었다. 아덴이 화장실의 입구를 막은 채 장우진을 내려다보며 버티고 있었다.
장우진의 인상이 한층 더 구겨졌다.
“너희 지금 뭐 하냐?”
그의 말에 서도화가 장우진을 빤히 쳐다보다 획 돌아 앞으로 걸어갔다.
텅-, 터엉!, 텅!
그러곤 화장실 문 하나하나를 열어 안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뭐하냐고. 비켜.”
아덴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친구가 할말 있다는데. 그것만 듣고 가라.”
“이건 또 무슨, 너네 일진 놀이 하냐? 아이돌 관두려고?”
장우진이 헛웃음 쳤다. 길을 가로막은 키 크고 덩치 좋은 멤버, 할 말 있다면서 말은 안 하고 화장실 문이나 열어보는 서도화.
볼일 보러 왔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아무도 없네.”
서도화는 화장실 문을 전부 열어보고서야 다시 장우진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를 보며 씨익 웃자 장우진이 움찔 눈을 키우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뭐지? 이 쎄함.
가까이서 마주한 서도화가 뭔가 이상했다. 재수 없는 얼굴은 여전했으나 뭔가 눈빛이…….
눈이 살짝 맛이 간 것 같은데……?
장우진이 한 발짝 더 물러섰다.
조용하고 찍소리도 못하던 어리고 여린 그 모습이 없다. 자신이 아는 그 서도화와 분위기가 달랐다. 밖으로 나가려는 자신을 막고 있는 한 성깔 할 것 같은 연습생과 뭔가 다른 서도화.
장우진의 본능이 맹렬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좀 위험한 상황인 거 같은데? 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문 장우진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던 서도화가 툭 말했다.
“형, 재밌어요?”
이런 장난이 재밌어요?
서도화의 말에 장우진의 입가가 떨리다 픽 웃음을 흘렸다.
굳이 장대하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장우진은 서도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서도화의 열이 끝까지 오른 눈빛이, 아무 말 없이도 그가 화난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아, 그거 때문에 잔뜩 성이 나서 이딴 시답지도 않은 위협을 하는구나. 장우진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아 혹시 그 폭로? 그거 설마 내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냐 인마.”
서도화가 어이없어 코웃음 쳤다. 아니라는 장우진은 굳이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은 아니라면서 실실 웃고 있는 꼬락서니가 참 꼴보 기 싫었다.
장우진의 눈에 서도화는 여전히 18살 여렸던 예전의 서도화였다. 만만하고 괴롭히기 쉬운데, 재수없게 실력은 좋은.
데스티니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빌어먹게 사라지지도 않고 기어 올라온 연퀴벌레.
장우진의 눈빛도 바뀌었다.
그도 이 상황에 열받은 건지 입안에서 혀를 굴리곤 서도화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나도 그 글 봤어. 근데 솔직히, 야, 한 달 잠수 타고 짤린 건 사실이잖-”
“접근하지 마.”
“…….”
장우진의 눈빛이 바뀔 때부터 그를 경계하던 아덴이 그가 한 발짝 다가오자마자 반사적으로 서도화와의 사이를 막아섰다.
아덴이 장우진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살벌해도 너무 살벌했다.
‘얘 아이돌 맞아?’
장우진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이돌이라기엔 진짜 마음만 먹으면 때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아이돌이라기엔, 진짜로 사람을 때려본 적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장우진의 반응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던 아덴이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떨어지라고.”
“어어, 그래.”
장우진이 냉큼 떨어졌다. 서도화가 장우진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간군상이다.
서도화가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형이랑 말싸움이나 하러 온 건 아니고요. 우리 그럴 시간 없어요. 지금.”
서도화는 장우진이 아픔을 참고 있든 말든 제 할 말을 했다.
제 꿈을 부수려고 했던 사람이다. 아프든 말든 뭔 상관인가.
서도화는 지금 이곳에 말싸움 따위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협박하러 온 거예요.”
“……뭐?”
장우진은 참 바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로 지능이 좀 떨어졌다.
생각해보라. 그렇지 않고서야 단순한 열등감으로 그것도 경연 도중에 이런 일을 벌였겠는가?
혹여나 일이 잘못되어서 지금처럼 정체가 들키면 어쩌려고?
경쟁 상대가 순위를 역전해서 그런 가짜 게시글로 장난을 좀 쳐봤다는 걸 어떻게 해명하려고 뒷생각 못하고 일을 저질렀을까.
“하아.”
서도화가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다.
이 멍청한 새끼는 아마 자기 회사가 지켜줄 거라고, 아무도 모를 거라고, 알아도 서도화가 설마 보복할 리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래 사실 맞다. 아마 5년 전 그대로의 서도화라면 그의 예상이 맞을 것이다.
케이가 장우진과 최여운의 대화를 듣고 경계하라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인 줄 몰랐을 것이고, 진짜 18살이던 서도화는 장우진을 무서워했었으니까.
“형은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뭐, 방법이라도 있어 너?”
작성자가 장우진이라는 걸 알아봐야 네가 뭘 할 수는 있겠니?
서도화가 백날 천날 범인은 장우진이라고 말해도 장우진이 회사를 등에 업고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장우진이 씨익 웃었다.
“쯧.”
서도화가 혀를 찼다.
이젠 대놓고 자기가 그랬다고 말한다.
이런 멍청한 사람에게 딱 맞는 협박거리가 있었다.
“단체메신저.”
서도화의 말에 장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저 아직 그거 안 지웠는데.”
시종일관 까불거리던 장우진의 입이 꾹 다물렸다.
단체메신저. 이전 연습생들끼리 월말평가, 연습실 시간 등을 조정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서도화는 달라진 장우진의 표정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참 뭐 같은 추억이 많은 메신저다.
언제나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던 서도화, 늘 월말평가 1위를 놓치지 않았으며 데스티니의 기대주로 불렸다.
그로 인해 대놓고 괴롭힘당하는 일이 많았는데 의도적으로 월말평가에서 서도화를 소외시키거나 연퀴벌레 등 비하적인 별명을 만들거나 대놓고 무안을 주는 등등 참 일이 많았다.
늘 활발하게 돌아가는 단체메신저였던 만큼 그 모든 과정은 단체메신저 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괴롭힘의 주동자는 장우진이었다.
사려야 할 건 서도화가 아니라 사실 장우진이었다.
그래서 저 자식이 바보라는 거다.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감정적으로 구는 게.
굳어선 아직도 말이 없는 장우진에게 서도화가 물었다.
“형, 인성 안 숨겨?”
“뭐?”
“데뷔 안 할 거야? 데뷔하려면 내 입에서 네 이름 석 자 안 나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텐데?”
아, 그런데 안 지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퇴장당했는데 삭제하는 게 당연하니까.
“나 오늘 덕분에 입장문 써야 하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해명되지 않을까?”
하지만 협박하기엔 좋은 소재 아니겠는가? 서도화는 이 일을 크게 키우며 공방전을 할 생각은 없었다.
원하는 것은 하나.
“…야 그냥 장난으로 한 거잖, 읍.”
서도화는 손등으로 그 입을 툭 치곤 말했다.
“글 지워. 다 헛소리라고 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