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소규모 홀을 꽉 채운 팬들 사이 누군가가 무대를 준비하는 멤버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멤버들 무슨 곡 한다고 말했나?”
“아니? 말 안 했음. 그냥 하려는 모양인데.”
그녀의 시선이 다시 멤버들에게로 향했다.
무대 의상이 아닌 편안한 복장으로 댄서도, 어떠한 소품도 없이 서 있는 멤버들의 모습에선 저들이 무슨 내용의 공연을 할 것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56번 그룹의 큰 특징은 무대를 가득 채운 댄서들과 컨셉의 극에 달한 소품들이었으니, 다른 그룹보다도 더 평범한 의상으로 오직 다섯 명만 서 있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무슨 무대를 할까? 댄서 없이 멤버들끼리만 공연을 한다고?
기대로 가득 차 환호를 보내고 있을 때 밝은 단상의 분위기 그대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우웅-
진동 소리 같은 전자음이 들려왔다.
“와, 이걸 해?”
“헐 미친…….”
곡의 전주가 들리는 순간 팬들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수십 번도 더 봤던 무대의 시작 부분이기에 무슨 곡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첫 번째 곡은 2라운드에서 선보였던 트리프린스의 룰.
멸망 후 정글이 되어버린 세계라는 컨셉으로 각색해 수많은 철봉과 댄서들과의 합이 무척 인상적인 곡이었다.
“나 소름 돋았어.”
그녀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곤 대형을 바꾼 멤버들을 보며 제 팔을 쓸었다.
단상 위에서 하는 만큼 그때만큼의 위압감도 없고 멤버들 또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이 곡을 이곳에서 보여준다는 것만으로 소름 돋도록 흥미롭기에 충분했다.
“그래, 순위에 이 무대가 없으면 이상하긴 하지.”
거대한 스케일과 타 그룹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남다른 분위기로 수많은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무대다.
팬들 사이에서뿐만이 아니고 밀리언 아이돌 전체를 보더라도 역대급 무대로 평가받고 있는 무대이니 순위권엔 당연하게 들어 있어야 할 공연이었다.
이곳엔 아포칼립스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주었던 노란 조명과 무대 이곳저곳에 불규칙적으로 세워져 있던 철봉, 댄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대를 재현할 수 있는 것일까?
멤버들은 양쪽으로 찢어져 서로를 쳐다보았다.
뿌우우- 뿔피리 소리와 북소리가 웅장하게 울려댔다.
곡이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는 동안 멤버들은 서로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아 개귀엽네?”
이를 본 팬들의 입가엔 한껏 미소가 만면해 있었다.
아, 뭐 굳이 심각한 곡이라고 심각하게 공연해야 할 필요 있나?
여긴 팬들과 56번의 팬미팅 현장인데.
사실 이곳에서는 각 잡고 제대로 추는 것보다 지금처럼 공연을 즐기며 서로를 보고 싱글벙글인 멤버들의 모습을 더 보고 싶지 않은가?
팬들에게 56번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볼 기회는 잘 없었다.
지금까지 나왔던 방송분에도 56번의 분량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들은 합숙에서조차 뚝심 있게 연습만 하더라.
물론 중간 중간 이들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재밌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정말 연습만 대차게 했던지라 다른 그룹처럼 장난치고 노는 장면은 없었다.
거기다 마지막 라운드는 그 사건으로 우울하기 그지없었으니 더더욱 그들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제 56번이 경연에서 벗어나 온전히 즐기며 공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잘된 일인가.
전주가 끝나고 사이드에 서 있던 아덴과 서도화가 함께 가운데로 나섰다.
“오오!”
팬들이 그들의 등장에 맞춰 호응하기 시작했다. 그에 앞으로 나선 아덴과 서도화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무척 야성적이고 위협적이어야 할 부분이 팬들의 호응을 받아 그저 신나고 즐거운 파트로 변모했다.
2라운드에서 보였던 아덴의 살벌했던 분위기도 서도화의 무표정도 오늘의 공연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서도화가 아덴을 지나쳐 앞으로 나서며 제 파트를 불렀다.
다가오는 challenger
끝도 없이 도전해
또 겁을 먹고 도망치지
여전하게
우와아아악!
꺄아아악!
파트가 시작함과 동시에 팬들은 서도화와 아덴이 일순간 움찔할 정도로 큰 함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립싱크라곤 하지만 예전 서도화의 노래가 시작하자마자 정화 영향으로 얼어붙었던 2라운드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어메스의 무대를 수십 번 돌려보며 자연스럽게 정화 내성이 생긴 결과였다.
팬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환호를 멤버들에게 보내주었다.
실제로 보게 된 멤버들의 공연이 그저 좋기 때문에. 마지막 라운드에 안 좋은 기억을 심어준 것이 미안해서 더 크게 소리쳤다.
립싱크에 입모양을 맞추는 것도 잊고 넋이 나간 듯 팬들을 보고 있던 서도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런 그를 보고 팬들이 더 크게 소리치자 서도화는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하던 대로 묵묵히 무대를 만들어나갔다.
서도화의 앞으로 아덴이 나섰다.
hey 감정을 드러내지 마
함부로 고개를 들지 마
이곳은 우리의 영역
제 파트에 입을 맞추면서도 걱정스레 서도화를 힐끔거리던 아덴이 씨익 웃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서도화가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아덴은 알 수 있었다.
겨우 서도화가 마음을 놓은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었다.
두 사람이 자신의 파트를 끝마치고 사이드로 빠지자 반대편에 대기 중이던 세 멤버들이 가운데로 향했다.
“우아아악! 케이, 상현, 한야아!”
주상현, 케이, 한야의 파트가 차례대로 이어지는 동안 친구를 붙잡아 흔들며 온갖 호들갑을 다 떨고 있던 그녀는 문득 한구석의 움직임을 느끼고 시선을 옮겼다.
서도화가 아덴을 끌어당긴 채 무언가를 속닥이고 있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지?’
왜인지 서도화는 무척 진지하고 심각하게 아덴에게 뭔가를 말했고 아덴은 씨익 웃으며 서도화에게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것을 본 그녀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아덴의 행동에 서도화가 질색하며 또 무언가를 속삭였고, 아덴은 서도화에게 손을 휘저어 보이며 다시 엄지를 추켜들었다.
딱 봐도 귀여운 장난을 치고 있는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서도화는 제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아덴의 행동에 결국 그의 등을 약하게 치곤 다시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이씨.’
그녀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카메라만 있었으면 당장이라도 저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을 것을.
모처럼 찍을 만한 피사체가 찍을 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촬영 금지라니 그녀에겐 이렇게 답답할 때가 없다.
바로 그때, 서도화가 아덴의 등을 밀며 함께 단상의 중앙으로 향했다.
마침내 멤버 모두가 무대 중앙에 모였다. 그러곤 아덴과 케이를 제외한 멤버들이 뒤로 빠졌다.
“우워어어!”
스트리밍으로만 봤던 아덴과 케이의 댄스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아크로바틱 외엔 실력적으로 눈에 드러나지 않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 구간이었다.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춤을 추는 장면은 정말 두 사람이 싸우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는 것처럼 긴박하며 살벌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아직 데뷔도 안 한 연습생들이 이런 포스를 내뿜으며 무대에 임할 수 있는지. 경연이 끝난 직후 칭찬과 클립영상이 난무했던 부분이었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댄스 브레이크를 시작했다.
원래 두 사람을 보조하던 댄서들의 역할은 주상현과 서도화, 한야가 대신해 그나마 허전함을 채워주었다.
케이는 눈을 부릅뜬 채 살벌하게 아덴을 바라보았다.
‘하찮군. 적당히 죽어버려라. 용사.’
원래 이 부분은 진짜 싸울 때와 같은 감정을 담은 채 해야 한다고 2라운드 때 서도화가 말했었다.
그러나 케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뭐하는…….’
케이는 당황했다. 아덴이 웃고 있었다. 그것도 싱글벙글, 서도화나 주상현에게나 보여주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케이를 보고 있었다.
케이는 하마터면 안무를 멈출 뻔 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덴은 단 한 번도 케이를 저렇게 본 적 없었다. 웃으며 자신을 볼 때라곤 인간주제에 마왕을 업신여길 때밖엔 없다.
아덴은 케이가 당혹스러워하고 있음을 알아챘지만 그럼에도 계속 한야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안무를 이어나갔다.
최대한 사이좋은 척.
진심 어린 표정 따위 개나 줘 버리고 모처럼 한 가식 떨며 미소 지었다.
이를 본 서도화가 ‘허’ 작게 웃었다.
‘잘하네.’
저렇게 미소 짓고 있으니 웬일로 진짜 아이돌 같다. 꽤나 보통의 아이돌처럼 잘생기고 상큼해 보였다.
저놈 저거, 표정 잘 지을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 안하고 있었구나.
케이가 당황하면 할수록 저 가식적인 표정이 더욱 짙어지는 걸 보면 어지간히 케이를 엿먹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편 팬들의 반응은 솟아오른 광대를 어찌할 줄 모르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경연 때는 그렇게 죽일 듯이 쳐다보더니…….’
56번의 ‘기존나쎈’ 이미지에 거하게 공헌했다고 할 수 있는 구간이었다.
그러나 역시 합숙 방송에서 봤던 대로 무대 아래에선 무척 다정하고 여린 아이들이었다.
팬들은 합숙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는 케이의 여린 모습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같은 부분임에도 경연 때와는 달리 무척 자상히 케이를 바라보는 아덴의 모습을 보고 있다.
팬들에게는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