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부터 시작하는 아이돌 생활-122화 (122/270)

제122화

서도화는 그때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아침, 점심, 저녁, 늦은 밤, 새벽할 것 없이 띠링띠링 울려대던 알림 소리.

말 한 마디 없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시스템. 얼마나 말도 많고 또 허술한지, 처음 이것과 대화를 나눴을 땐 시스템 뒤로 분명히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띠링!

[제발요 저 죽는다니까요?]

띠링!

[말하기 싫어요? 화났어요? 그럼 ‘응’ or ‘아니’로만 대답해줘도 되는데!]

띠링!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래도 되고요!]

띠링! 띠링!

[ㅠㅠㅠㅠㅠ제발 한 번만요. 답답해 미치겠네!]

[들리는 건 맞죠? 인간적으로 그건 말해줍시다. 아아! 들리세요? 용사 서도화여!]

이거 현실인가? 악몽 아니고?

“하아…….”

서도화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내뱉어졌다.

그러자 시스템은 눈치 없이 좋다고 조금 더 빨리 더 많은 텍스트 창을 띄우기 시작했다.

[역시 들리시는 거죠?]

[그렇게 질린 표정 완전 오랜만이에요! 그 표정 저랑 아덴 님한테만 지으시잖아요!]

[아 이제 마왕 케이 추가.]

[제 데이터베이스에 추가해둘게요.]

시끄럽다. 너무 시끄럽다. 지금 새벽 2시다.

팬미팅을 끝내고 연습까지 마친 후 겨우 자려고 누운 거란 말이다.

낭창하게 제 할 말만 하는 시스템의 텍스트 창을 보던 서도화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소멸시켜 버릴까.”

그러자 갑자기 시스템이 조용해졌다.

서도화는 한다면 한다. 예전 제2세계였다면 시스템을 무시했다간 내가 죽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녀석에게 어울려주었지만 지금은 다르니까.

죽음에 위협당하는 건 이제 서도화가 아닌 시스템이었다.

정적 속에서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조용해졌으니 잠이나 자자.’

시스템이 겁을 먹고 다시 도망을 간 건지 아니면 서도화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생각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우선 잠이다.

서도화는 지금 너무나 졸렸다.

‘아쉬우면 다시 찾아오겠지.’

서도화가 혹할 만한 보상안을 가지고.

어차피 지금은 멤버들이 곁에 있어서 시스템과 대화도 못한다.

서도화는 눈을 감았다.

띠링!

알림음이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 했다. 내일 확인해야지. 다행히 시스템은 그 이후 서도화의 잠을 방해하진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서도화는 일어나자마자 시스템의 구구절절한 텍스트를 읽어야만 했다.

[일어나면 꼭 대답해줘야 해요 알겠죠? 보상이 마음에 안 들면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은 협의해줄게요…. 지금은 멤버들과 같이 있어서 모르는 척하는 거 맞죠?

그런데 진짜 어려운 보상은 못해줘요ㅠ 나도 해주고는 싶죠. 진짜라니까요? 그간 정이 있는데! 근데 능력이 없는 걸 어떡해요ㅠ

저는 바보 똥멍청이입니다. 플레이어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저는 쓰레기예요.

저는 왜 늘 이 모양인 걸까요.]

먹먹하다 먹먹해.

왠지 텍스트 보내면서 얘 좀 울었을 거 같다.

서도화는 어이없어하며 텍스트를 치워버리고 말했다.

“나와.”

그러자 뾰롱……하는 힘 빠지는 알림 소리와 함께 노이즈가 잔뜩 낀 텍스트창이 나타났다.

[드디어 절 불러주셨군요…….]

텍스트만 읽고 있는데 시스템의 우울함이 보이고 들리는 듯 했다.

‘시스템이 우울할 수가 있나?’

있겠지? 소멸을 무서워하는 걸 보면.

서도화는 문득 든 생각을 접고 텍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숙소에서 살게 된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졌다. 숙소는 무척 좁고 멤버들은 24시간 붙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외출마저 허락을 받고 나가야 하는 상황.

멤버들을 먼저 연습실에 보내고 혼자 남을 상황을 만드느라 꽤 애를 먹어야 했다.

특히 아덴의 경우 무턱대고 조금 뒤에 연습실로 가겠다고, 혼자 있으려고 애쓰는 서도화를 이상하게 여겨 오늘따라 같이 가자며 고집을 피워대서, 떼어낸다고 고생 좀 했다.

[이해합니다. 네.]

[사람들이 있는데 저와 대화를 하실 수는 없었을 테죠.]

[남이 보기엔 혼잣말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예전과 같은 난감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제2세계에서 초반에 혼자 다닐 때는 눈치 안 보고 시스템에게 말도 걸고 대화도 하고 했었다.

그게 남들이 보기엔 혼잣말로 보인다는 걸 깨달은 건 용사 파티에 합류한 뒤였다.

“저기… 도화 군,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만, 그, 내가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네만, 그런데 이젠 말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말해보겠네…….”

“네?”

“자네 혹시 어디 아픈가? 헛것이 보인다거나….”

“네?”

용사 파티에 들어간 직후에도 처음엔 몰랐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스템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동료들은 힐끔거리고 말 뿐이었으니까.

그냥 시스템이라는 게, 허공에서 모르는 문자가 튀어나오는 게 신기해서 보는구나 생각했었다.

케이클랍스의 식민지가 된 세리마예 왕국의 해방을 위해 잠깐 파티에 합류한 왕자 오칸이 조심스럽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동료들이 힐끔거리는 건 시스템이 신기해서가 아니라 서도화가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걸 알게 된 이후 굉장히 창피해져 시스템과 대화 나눌 일 있으면 동료들이 자는 시간에 빠져나와 몰래 했었다.

시스템은 그때 그 일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 이해한다는 듯 말하는 시스템을 보며 서도화는 코웃음 쳤다.

“뭔 소리야. 그냥 말 섞기 싫어서 무시한 건데.”

[네?]

물론 멤버들이 있을 땐 시스템과 대화하지 못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것보단 그냥 이놈 일하는 꼬라지가 한심해서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보상안도 엉망, 사과도 엉망, 거기다 도망까지 가버렸으니 제대로 일할 마음이 들 때까지는 무시하고 있어야지.

“아무튼 어떻게 좀 생각해봤어?”

서도화의 말에 시스템은 잠시 텍스트가 없었다. 서도화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안 해봤으면 나 그냥 연습하러 가고.”

또 같잖은 보상안 들이댈 거면 볼 필요도 없다.

서도화도 사람이다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만 서도화를 개고생에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게 만든 놈이 소멸하는 건 전혀 안타깝고 불쌍하지 않았다.

띠링!

[생각해봤어요!]

시스템이 다급하게 텍스트를 띄웠다.

서도화는 빤히 텍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간헐적으로 흐릿해지다 노이즈가 낀 듯 지직거렸다.

그리고 띠링! 또 하나의 창이 나타났다.

[스텟창 복구(영구) 및 상시 재조정, 대마도사 하이넬과의 통신석(한정) 그리고 유제이 엔터테인먼트 좌표 제공, 기억조작, 시나리오가 정해지지 않은 퀘스트 제공 및 퀘스트 보상 선택권]

오. 몇 가지는 말만 달라졌을 뿐 조금 보강한 재탕이지만 그래도 쓸 만한 것들이 몇 개 보였다.

서도화는 씨익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당연히 전부 다 주는 거지?”

서도화의 말에 시스템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띠링띠링 시끄럽게 울려대던 공간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것 봐라. 늘 일을 이따위로 한다.

시스템은 단 한 번도 서도화가 만족할 만한 보상을 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기다린 끝에 시스템이 창을 띄웠다.

[플레이어님 달랑 한 달 가지고 이렇게까지 가져가셔야겠어요?]

“너는 고작 한 달을 가지고 소멸 당하니마니 하냐?”

[……다… 드릴게요.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네가 몸이 어디 있어?”

서도화는 시스템의 텍스트 창에 일일이 토를 달곤 말했다.

“일단 설명해 봐. 저대로 한다는 소리는 아니고.”

[1. 스탯창을 영구적으로 복구해드립니다. 원래는 일회성 복구였지만 영구적으로 바꿔봤어요…. 당연히 스탯은 상시 재조정 가능하게요. 어차피 시나리오도 끝난 마당에 이 정도는 제 권한 안이라]

[2. 대마도사 하이넬과의 통신석을 지급해 드리며, 하이넬 님에게도 유제이 엔터테인먼트 좌표를 제공하겠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이넬 님에게 드리는 것이니 당연히 아덴 님, 케이 님이 그 세계로 돌아가는 날도 빨라지겠죠?ㅎㅎ]

[3. 기억조작. 공백이 있었던 한 달 간의 기억을 조작해드립니다. (주변인 한정)]

[4. 이따금 연예계 생활을 하며 유용하게 쓰일 법한 보상을 퀘스트로 챙겨드립니다]

이를 본 서도화가 말했다.

“장난하나.”

[네?]

“첫 번째, 영구적으로 스탯창 복구는 필요 없어. 일회성이 좋아. 너 같으면 평생 남들이 못 보는 거 나만 보고 살고 싶겠냐?”

서도화가 첫 번째 보상에 대한 설명을 꺼버렸다.

“두 번째, 하이넬과의 통신석은 좋아. 그 세계는 지금 어떻게 수습되어가고 있는지 아덴도 궁금할 테니까. 좌표도 줘도 돼. 아덴은 돌아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도록. 그런데 얘가 돌아가 버리면 어메스는 어떡해?”

[그건.]

“걔네 소리 소문 없이 증발하면 그룹은 망할 거고 대중들은 증발한 두 사람 때문에 동요하겠지. 너 또 보상하러 오게?”

아덴이 돌아가는 건 좋다. 하지만 아덴이 돌아가도 그룹이 망하지 않을 만한 대책을 세우던가 해야 한다.

이를 테면 녀석이 수시로 이곳과 저곳을 오간다던가.

“세 번째, 기억조작 필요 없어.”

나름 회심의 보상이라고 들고 나온 게 이거인 모양인데, 이미 사건이 발생되었고 상처는 상처대로 받고 해결되었다.

거기다 주변인 한정 기억조작이라니? 대중들은 이미 그날의 사건을 다 기억하고 있을 텐데.

“기억조작할 거면 아덴과 케이 신분부터 해결해. 네 번째, 퀘스트도 필요 없어. 내가 왜? 왜 또 너한테 퀘스트 따위를 받으며 살아야하는데? 뒤질래?”

시스템이 또 말이 없었다. 얘 지금 도망가고 싶은 거 간신히 참고 버티는 중일 거다.

원래라면 서도화가 열받아 화내자마자 튀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한다. 쟤 명줄 혹은 직장이 달려있으니.

서도화는 침대가 붙어있는 벽에 느긋하게 기대 시스템을 기다렸다.

잠시 뒤 띠링! 노이즈가 잔뜩 낀 텍스트창이 나타났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런데 기억조작 부분은… 터놓고 말씀드리자면 마왕에 대한 조작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물론 제 권한 밖이지만 제 사수가 도와준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아덴 님은 안 됩니다. 신분을 새로 생성할 경우 아덴 님께서 이세계로 돌아간 이후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습니다.]

“왜?”

그래, 안 그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그날 신분을 만들어달라는 서도화의 말에 시스템은 ‘이미 등록된 신분이라 안 된다’라고 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영 이해가 안 가서 굳이 이렇게 싫은 마음도 꾹 참고 시스템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띠링!

새로운 텍스트 창이 나타났다.

[아덴 님은, 아니 ‘그’라는 존재는 이곳 세계에도 존재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뭐?”

[서도화 플레이어님께서 제2세계에 존재하는 일명 ‘도플갱어’의 몸을 빌려 제2세계에서 활동했던 것처럼]

[아덴 님 또한 ‘도플갱어’의 몸을 빌려 활동 중이라는 말입니다.]

이 무슨…….

[보통 수련의 일종으로 여깁니다만, 도플갱어의 몸을 빌렸을 경우 자신의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곤 가진 바 능력이 초기화 됩니다. 또한 영혼이 빠져나간 원래의 육체는 보존을 위해 석화가 되지요.]

[대신 몸을 빌렸을 때 터득한 기술은 원래의 몸으로 다시 돌아와도 자신의 것이 되지요.]

“…나는 내가 도플갱어 어쩌고인 것도 방금 처음 알았는데?”

[ㅎㅎㅎㅎ말한 적 없어서…? 아니~ 도플갱어도 아닌데 그럼 돌아온 도화 님은 왜 여전히 18세 외견 그대로시겠어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 너무 당연하게 여겨서 잊고 있었는데 마나는 사용할 수 있으면서 외견은 그대로다.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핼쓱해지고 또 조금은 늠름해진 그때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서도화는 문득 갑자기 마나 사용이 되지 않는다던 아덴의 말을 떠올렸다.

[아무튼 아덴 님은 현재 도플갱어 상태라는 말입니다! 신분이 등록되어 있으니 차라리 등록된 신분을 찾는 게 훨씬 빠를 거예요! 으음~ 한국에 있으려나?]

[그럼 기억조작 대신 제가 이걸 찾아보는 건 어때요?]

어쩐지 시스템에 잔뜩 꼈던 노이즈가 조금 가셨다.

시스템의 말에 서도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고, 말했던 보상들에 케이의 신분, 어딘가 교포 출신으로 영어권은 안 돼. 그리고 네가 아덴의 신분을 찾았을 때 지금까지 얼버무렸던 정보와 일치하도록 조작까지 추가해서. 어때?”

노이즈가 조금 많이 짙어졌지만 시스템은 후련하다는 듯 텍스트창의 글씨를 바꾸었다.

[좋아요! 그럼 보상협의는 끝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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