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한산한 저녁의 편의점. 음료수를 산 아덴은 편의점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자마자 서도화에게 물었다.
“뭔데? 그 세계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들렸어?”
서도화는 한숨을 쉬었다. 평소 그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아덴은 무척 조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아덴에게 그곳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세상.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었으니까.
마왕이 사라진 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참 많이 궁금하고 또 애틋할 것이다.
그래서 서도화는 하이넬에게 자신들의 좌표를 알려주겠다는 시스템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저렇게 간절한 아덴의 바람이 이뤄지는 것이 더욱 늦춰질 테니까.
서도화가 말했다.
“제2세계의 소식을 들은 건 아니야.”
“그럼?”
“대신 제 2세계의 동료들과 소통할 방법은 생겼어.”
서도화는 아덴에게 시스템과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아덴은 제2세계에서부터 서도화의 상황을 알고 있어 시스템과 보상에 대한 설명을 이해시키기는 쉬웠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직전, 아덴과 케이가 함께 텔레포트 되었고 그로 인해 한 달 정도의 시간 딜레이가 생겼다.
시스템은 그 보상으로 하이넬과 연락 가능한 통신석과 이곳의 좌표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리고 네가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이 세계에 너의 도플갱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너의 몸은 네 원래 몸이 아니며 너의 도플갱어의 몸을 빌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덴이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전부 설명했다.
아덴은 말없이 서도화의 설명을 전부 듣고 정리하듯 내뱉었다.
“그럼 네 말은 이제 곧 하이넬과 연락이 닿을 거고 나도 곧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네?”
“……그렇지.”
“그럼 원래 내 몸은? 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면 내 원래 몸은 어떻게 되는 건데?”
“아마…….”
자세한 건 통신석을 받은 뒤 동료들에게 물어봐야겠지만.
“석화 상태?”
시스템의 말에 의하면 몸을 보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육체를 석화한다고 했다.
아덴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는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렇게 되어버렸으니.”
한 명은 마왕과 함께 사라지고 한 명은 석화가 되어버렸으니.
“많이 걱정할 텐데.”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갑자기 석화된 자신을 볼 동료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러게. 이제 생각하면 좀 후회가 되긴 해.”
서도화 또한 그의 말에 백번 동의했다.
본디 마왕을 소멸시키고 서도화가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면 이를 다 알고 있던 아덴이 동료들에게 설명을 해주겠거니 한 것이 계획이었다.
서도화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건 멸망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모인 동료들 틈에 섞이기에 결코 좋은 정보가 아니니까.
언제든지 돌아갈 평화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은 이 세계를 구하는 일이 그리 간절하지 않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뒷일은 아덴에게 맡기고 끝까지 비밀로 한 채 돌아가고 싶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동료들이 사라진 두 사람에 대한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해 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내 정체를 말한다고 달리 볼 친구들도 아니었는데.”
아덴은 무표정으로 말하는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전혀 없었지만 그가 후회하고 미안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뭐, 그래도 조금 있으면 동료들과 연락이 닿을 테니까. 당장 돌아가지는 못해도 상황 정도는 알 수 있겠지.”
“돌아가는 것에 대해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음료를 마시던 아덴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엔 서도화의 표정이 심각했다.
참 이 세계는 제약이 많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땐 술이 최고인데.
이 세계에선 술을 마시면 안 된단다. 아덴은 제 손에 들린 빈 음료 캔을 구기며 말했다.
“뭔데.”
“네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건 좋아. 너는 원래 그곳의 사람이고 그 세계의 영웅이니까.”
아덴이라는 존재가 어느 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칭송을 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사람인지 서도화는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서도화는 아덴이 꼭 필요했다.
“…계약기간만이라도 아이돌 계속해주면… 안 되겠냐?”
물론 짧지 않은 계약기간이지만 하이넬에게 좌표가 들어가지만 않았더라면 아이돌 활동을 마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고, 무엇도 강제할 순 없으니 모든 것이 아덴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서도화로서는 아덴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곳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아덴을 붙잡는 일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서도화 또한 목숨을 걸고 지켜낸 꿈이니만큼 아덴이 함께하길 바랐다.
“이젠 이곳에도 네가 필요해. 멤버들도 팬들도.”
‘함께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데뷔하기 전에 빨리 끝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고.’
물론 밀리언아이돌로 쌓아온 지금까지의 노력은 허사가 되겠지만.
“흐음.”
아덴의 표정이 또 다른 심각함과 고민 걱정으로 점철되었다.
서도화는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아덴이 고민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멤버들도, 팬들도, 이곳은 아직 네가 필요하다.’
이 말보다 용사, 아덴을 설득할 말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도화의 음료수도 마침내 완전히 비워졌을 때 아덴은 서도화와 자신의 음료수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곤 말했다.
“일단 좀 시간을 줘. 도화 너에겐 미안하지만 나에겐 나의 세계가 가장 중요해.”
“그래.”
“이곳은 내가 없어도 평화로우니까. 판단하기엔 시간이 필요해.”
아덴의 표정은 심각했으나 이내 자신을 따라 일어나는 서도화를 보며 스르르 풀렸다.
“통신석 받으면 꼭 나한테 말해주고. 마왕은 내가 돌아갈 때 알아서 데려갈 테니까 걱정 말고.”
“쓰읍, 걔는 여기 있는 게 좋지 않겠냐? 진지하게.”
케이는 여기서 나름 잘 적응하는 것 같던데.
서도화가 말했으나 아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너희 세상이 평화롭다고 방심하지 마. 그건 마왕이야. 힘을 숨기고 기를 줄 아는 놈이라고.”
사람의 육체로 마족들의 정점에 선 자다.
지금 당장이야 힘도 없어 툭하면 지치고 쓰러지는 볼품없는 모양새지만 마왕은 언젠가 부활한다.
“이 아름다운 세계도 멸망할 거다. 마왕은 내가 데려가.”
이번만큼은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
“도화, 너는 네 소중한 세상을 지켜야지.”
결코 케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무너트린 마왕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래. 알았어.”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덴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뭘 더 데리고 있겠다느니 하겠는가.
제2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아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마치 예전 수십, 수백의 동료들이 뒤따르던 용사일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케이도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아덴처럼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죽어도 비밀로 해야겠네.’
그것만큼은 사양이다. 케이는 지금처럼 이빨 빠진 호랑이, 어벙하다 못해 멍청한 모습으로 있는 게 낫다.
아덴과 서도화가 자리를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멤버들에게 각자의 음료수를, 어느새 돌아온 한야에게도 당근 주스를 건네고 두 사람은 각자의 침대로 향했다.
둘은 멤버들 중 가장 먼저 침대에 누웠지만 아마 깊은 고민으로 가장 늦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 * *
시간은 흘러 그로부터 열흘 뒤.
밀리언 아이돌의 마지막 경연 날 아침이 되었다.
멤버들은 새벽부터 숍에 나와 메이크업과 헤어세팅을 받는 중이다.
“한야 형 오늘 좀 쎄다. 무서운데요?”
주상현의 말에 디자이너 실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한야 씨 오늘 이미지 대변신이야.”
“형, 진짜로 영화에서 볼 법한 메이크업, 아니 이건 그냥 분장 아니야?”
서도화도 신기하다는 듯 한야의 곁에 다가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이미지 변신.
개성이 넘치다 못해 철철 흐르는 멤버들 사이 무대 위에선 유독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한야였으나 오늘은 다르다.
한 갈래로 내려 묶은 꽁지머리. 짙고 어두운 색조 화장과 눈 밑에 검게 그린 작은 초승달 문양.
묘하게 조커와 같은 분위기도 풍기는 것이 어둠의 서커스 단장 그 자체다.
아마 의상까지 입으면 그 생김새만으로도 팬들로 하여금 무대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인물이 될 터였다.
“하하, 그래? 조금 어색하긴 하다. 괜찮을까?”
그러나 상당히 비밀스럽고 사악해 보이는 메이크업과는 달리 짓는 표정과 말투는 착하기 그지없었다.
그 부조화에 뒤에서 지켜보던 이병수가 눈을 부릅뜨고 다가와 한야에게 말했다.
“알지 한야야? 리허설 때도 말했지만 정색해야 해. 무대 위에서. 지금처럼 상냥하게 웃고 그러면 안 돼. 알지?”
“압니다. 매니저님. 걱정 마세요.”
“에이 병수 형은 뭘 그런 걸 걱정해요?”
아덴이 껄렁하게 다가와 이병수에게 말했다.
“이 형, 정색 얼마나 잘하는지 형은 모르시죠? 장난 아닙니다.”
그러고 엄지척. 그 모습을 보는 한야는 무슨 말이냐며 그냥 다정히 웃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서도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가서 매를 벌 짓을 하는 놈이다.
저놈은 언제고 저렇게 장난치다가 뒤통수 후려맞을, 아 이미 맞은 적 있던가?
‘하이넬이었던가 광대였던가 아니면 내가 때렸던가.’
하여튼 장난이 하도 심하고 생각 없이 말하는 바람에 누군가에게 뒤통수 거하게 맞은 적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애들 오늘, 한야 뿐만 아니라 전체가 다 영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네~”
김유진이 멤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정말 이제 연예인 다 됐다.
유독 한야의 컨셉이 눈에 튀어서 그렇지 오늘은 다른 멤버들의 메이크업과 컨셉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함께 아크로바틱을 할 아덴과 케이는 쌍둥이처럼 눈 밑에 검은 보석을 대칭되게 붙였으며 케이는 예쁘고 큰 눈을 강조하든 한쪽 눈 위에도 희고 작은 보석을 여러 개 붙여놓았다.
막내 주상현은 귀여운 이미지를 덮고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을 했으며 서도화는 주상현과 상반된 새하얗고, 붉은 색조 메이크업을 받았다.
아마 의상을 갖춰 입으면 이들의 개성은 한층 더 짙어질 것이다.
마지막 퍼레이드, 서커스 컨셉 다운, 컨셉에 절은 그룹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모습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