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무대 뒤, 서도화는 1번 그룹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경연 장인 데스티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처음으로 내는 오리지널 곡은 무조건 히트시키리라는 의지가 돋보이는 곡을 가져왔다.
처음은 좀 유니크한가? 특이한가? 잘 안 들어본 신기한 멜로디처럼 느껴지다가 후렴구는 무척 대중적인 멜로디로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곡.
‘저 곡은 무조건 히트하겠네.’
1번 그룹은 오히려 마지막 경연에서 힘을 빼고 밝은 느낌으로 갔다.
그 모습이 오히려 마지막인 만큼 경연 자체를 즐기겠다는 것처럼 보여 보는 사람마저 즐겁게 만들었다.
물론 저들의 무대를 보는 서도화는 전혀 즐기지 못했다.
‘잘 부르고 잘 쳐 웃네.’
저렇게 보니까 되게 티 없이 순수해 보이네.
“이야…….”
서도화의 모습을 본 아덴이 기함했다.
“또 저러네.”
오늘도 서도화의 주위에 타락의 아우라가 가득하다. 서도화는 이제 1번 그룹을 보는 것만으로도 성질이 나는 모양이었다.
“쟤 하나 벼랑 끝에 매달 때까지는 계속 저러겠는데?”
“네? 벼랑 끝에 뭐를 매달아요?”
사람을.
주상현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아덴은 촬영 중임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이제 아덴도 카메라 앞에선 귀족처럼 좋은 말만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야는 서도화를 보았다. 서도화와 멤버들은 그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김유진이 직접 조사해 본 바 서도화의 의심대로 게시글의 주인은 1번 그룹의 장우진이었다.
서도화가 1번 그룹으로 인해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는 이상 이 사건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야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한야가 무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신나게 무대를 즐기고 있는 1번 그룹이지만, 조만간 저 모습은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56번, 모여서 대기해주세요!”
“네!”
그리고 마침내 1번 그룹의 무대가 끝이 났다. 그들은 당연하게 수많은 시청자들의 마음 점수와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다.
1번 그룹은 듣는 사람마저 들뜨게 만드는 좋은 무대를 보여주었다.
다음은 어메스의 차례다. 무대 위가 암전되고 1번 그룹이 아래로 내려가자 틈 없이 56번의 VCR이 재생되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식사는 하셨어요? 너희는 잠 좀 잤어?
VCR의 시작은 유제이 식구들의 회의 모습이었다. 화면은 김유진 대표의 등장으로부터 회의실 전체 풍경을 보여주었고 자연스레 직원들과 멤버들의 모습도 비쳤다.
김유진을 바라보는 케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오오~ 관객들 사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완전한 민낯임에도 여전히 그 비주얼이 살아있다.
어느 각도로, 어느 모습을 봐도 아름다운 놈. 그게 케이였다.
-참 감개무량하네요. 우리가 최종라운드까지 오다니.
김유진의 말에 짝짝짝 작고 소심하게 박수 치는 주상현의 모습이 보여졌다.
-다들, 우리 유제이 직원분들도, 또 멤버들도 열심히 해줘서 너무 고맙고, 마지막까지 열심히 해주세요.
-네!
-그럼 일단 곡을 한번 들어볼 텐데요.
김유진의 말에 맞춰 직원이 노트북으로 곡을 들려주었다. 곡은 VCR에선 묵음 처리되어 들리지 않았지만 멤버들의 표정과 ‘오’ 하는 탄성으로 무척 만족스럽게 잘 뽑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어 한야의 인터뷰가 나왔다.
-오리지널 곡…….
주황색의 배경 앞에 홀로 앉은 한야가 조금 고민하는 듯 웃었다.
-직 분들이랑 멤버들이랑 뭘 하면 좋을지 상의를 많이 했거든요.
-저희들의 첫 곡인데 최대한 멤버들의 매력을 가득 담은, 그러면서도 이번 마지막 경연에 어울릴 만한 곡과 컨셉이 뭘까.
-그러다가 생각하게 된 거죠. 아예 컨셉에 완전히 빠져보자. 저희 56번만 가능한 컨셉을 정하고 컨셉에 맞는 곡을 찾았던 것 같아요.
한야에게 제작진이 물었다.
[최종라운드에서 56번의 컨셉은 무엇인가요?]
한야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서커스입니다.
한야의 대답이 들리자마자 관객석이 난리가 났다.
VCR이 진행되는 동안 빠르게 설치되던 무대 장치들. 뭔가 좀 거대하다? 싶었더니 이게 서커스용 장치들이었다.
“좋은데?”
“서커스! 56번이랑 개찰떡이네.”
안 그래도 묘기와 같은 무대들을 보여주며 이목을 끌던 56번이었다.
서커스 컨셉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아마 같은 컨셉이라도 56번의 무대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팬들의 기대가 한층 올라갔다.
그리고 VCR 화면은 전환되어 연습실을 풍경을 보여주었다.
흑백의 필터가 씌인 연습실 화면, 비가 오는 CG와 함께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멤버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으으…….
-와…….
앓는 소리만 내며 땀 범벅인 모습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서도화와 주상현의 모습, 연습실의 한구석 아예 엎드려 기절한 케이의 모습.
-뭐야. 물? 다들 물?
-……아덴아, 나 물 좀 부탁해.
치사하게 혼자만 체력이 남아돌아 멀쩡한 아덴과 지친 얼굴에도 미소를 띠며 물을 부탁하는 한야.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팬들 사이 웃음이 맴돌았다.
무대 위에서의 잘난 56번과는 완전히 다른 꼬질꼬질한 모습이지만 사실 방송을 본 이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방송에서 보여준 무대 밖 멤버들 또한 자신들끼리 온종일 연습에 매달려 있었으니까.
[쉽지 않네….]
멍하게 숨을 고르는 서도화의 모습에 자막이 붙었다. 그러다 화면이 전환되어 이번엔 서도화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번 라운드는 평소보다 많은 것, 그리고 해본 적 없던 것들을 시도해 보았어요.
[예를 들면요?]
-진짜로 서커스 기술을 보인다던가, 잘 춰본 적 없던 장르의 춤을 춰본다던가. 평소 안하던 걸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체력 소모가 빠르더라고요.
서도화는 자신의 인터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로 체력 소모가 심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뒤로 깔리는 BGM이 상당히 귀여웠다.
똥띠롱- 똥띠롱-
귀여운 브금 속 서도화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끝마치곤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근데 아덴 혼자만 여유로운 거예요. 너무 치사하지 않아요?
[치사해요?]
-좋겠다. 체력 좋아서.
저 당시 무슨 생각으로 저 말을 한 걸까. 말할 땐 몰랐는데 영상으로 보니 자신은 진심으로 체력 좋은 아덴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화면이 전환되어 멤버 모두가 퍼질러져 있는 사이 콧노래까지 부르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장난치는 아덴을 보여주었다.
곧 아덴의 인터뷰로 전환되었다.
-오늘 하루 일정이요? 공연에 필요한 서커스에서 쓰는 기술 배우러 갔다가 밥 먹고 바로 연습하러 왔죠? 오늘은 그게 다예요.
저 인터뷰가 진행된 시점은 연습으로 지친 멤버들이 잠시 쉬어가자고 뻗은 직후였다.
인터뷰를 보면 다른 멤버들은 지쳐선 차분한 모습으로 인터뷰를 하는 반면 아덴 혼자 인터뷰의 느낌이 달랐다. 무척 활달함이 느껴졌다.
[다른 멤버들이 아덴 씨 체력 좋다고 부러워하시던데요.]
-도화 아니면 상현이죠? 저는 아직 더 연습할 수 있어요. 아직. 재밌잖아요.
[체력 정말 좋으시더라고요.]
-아이 뭐, 이 정도야. 연습하다 보면 멤버들이 쉽게 지쳐서 항상 생수 운반은 제가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힐러 같다.
[힐러요?]
-아니에요. 게임 이야기에요.
아덴은 그렇게 말하곤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서도화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시킨 대로 잘 대답했군.
[반면…….]
아덴의 인터뷰가 끝나고 어둑해진 화면, 자막과 함께 엎드려 있는 케이가 보였다.
거의 바닥과 한 몸이 된 게 얼마나 볼품없는지 관객들 사이에서도 크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곧 있으면 녹겠다
-ㅋㅋㅋㅋㅋㅋㅋ케이 체력 역시 약하구나
-아니 이 그룹 체력 상태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
당연히 채팅창도 ㅋㅋㅋ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케이의 인터뷰는 특이하게 제작진의 걱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케이는 다른 멤버들보다 배는 지친 표정으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케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제가 멤버들에 비해 체력은 약하지만 연습할 땐 제일 잘 버팁니다.
맞는 말이었다. 아덴의 체력이 너무 좋은 덕분에 케이는 아덴을 이기려 아득바득 무리해서 연습을 버티니까.
-조금 누워있다 보면 금방 괜찮아집니다.
[이번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매력 말입니까?
[혹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던가.]
조금은 딱딱한 케이의 말투로 인해 살가운 제작진의 질문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케이는 잠시 고민하다 웃었다. 나름 대담한 미소를 보인 것이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남들이 보면 그냥 힘없는 미소였다. 그조차도 병약미 혹은 처연미라 부를 만한 것이 철철 흘러넘쳤다.
-매력이라 함은, 그것은 바로 제가 아닐까요.
아이고.
서도화가 탄식했다. 아덴은 시종일관 붙어 있어서 인터뷰 직전 조언할 수 있었는데 케이는 그러지 못했다.
케이는 인터뷰 직전까지 기절하듯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저 재수 없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나 케이는 움찔 카메라 너머를 힐끔거리더니 서둘러 말을 바꿨다.
-농담입니다. 멤버 모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으니 발전된 모습을, 아, 이번엔 멤버 개개인의 개성을 잘 봐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러고 주저하다 말했다.
-한국말 잘 못 합니다. 혹시 이상한 말을 했다면 죄송하다 사과하지요. 한국말을 사극으로 배웠습니다.
[오 사극이요? 혹시 생각나는 대사가 있다면?]
-대, 대사? 네 이(삐이-)! 무엄하다!
아마 카메라 너머에 한야가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사극 대사는 어떻게 알았지?’
본 적도 없을 텐데.
서도화는 케이가 곧바로 꺼낸 그럴싸한 사극 대사에 놀랐지만 그 의문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아마 질문자의 생각을 읽고 질문자가 생각한 예상 답안을 그대로 내뱉었을 테지.
이럴 땐 마왕의 정신 컨트롤 능력이라는 게 참 편리하다.
아무튼 서도화는 혼자서도-물론 한야가 지켜보고 있겠지만-인터뷰 잘하는 케이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했다.
‘쟤 진짜 감시만 잘하면 예능 멤버로도 나갈 수 있겠는데?’
물론 감시만 잘하면-의 조건이 꼭 붙어야겠지만.
케이의 인터뷰가 끝이 났고, 마지막 인터뷰는 주상현이 맡았다.
-이번엔 단체 군무! 딱! 이런 것보단 멤버 개개인의 개성에 초점을 둬 봤습니다. 밀리언 관객분들과 시청자분들이 저희 다섯 명의 각자 다른 이미지, 분위기를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구상했어요.
역시 주상현. 케이가 어영부영 말했던 걸 딱딱 정리해서 다시 말했다.
-부디 즐겁게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혹시 케이 형, 아덴 형 무슨 말실수 안 했죠? 아, 아니 불안한 게 아니고 그냥 하핫…….
주상현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VCR이 끝났다. 그리고 56번의 첫 오리지널 공연 이 시작되었다.
서도화는 암전된 무대 위 홀로 서 있는 한야를 바라보았다.
시작은 한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