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무대 전체를 감싼 붉은 천과 반짝이는 전구들 그리고 형형색색의 깃발.
서커스장을 연상시키는 무대의 중앙에는 신사 모자를 쓰고 연미복을 입은 멤버가 서 있었다.
“누구야?”
“도화 아니야?”
“몸이 도화가 아닌데. 아덴? 한야?”
팬들은 무대에 선 멤버가 누구인지 유추하기 시작했다.
길쭉한 모자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와 ㅅㅂ 분위기 뭐임;;
-시작도 안 했는데 취향이냨ㅋㅋㅋ
-56번 컨셉이 서커스임? 이걸 어케 이김…
-후반에 개날아다니겠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적이 시청자들의 채팅과 관객들의 환호로 채워지는 사이 무대 위로 빛바랜 아코디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붕 떠 있던 카메라가 천천히 모자로 얼굴을 가린 멤버에게로 향했다.
스포트라이트 하나만 내려와 있을 뿐 어두운 공간. 노이즈가 낀 듯한 소리.
그리고 그저 무대 위에 선 채 가만히 있는 서커스 단장.
누가 봐도 밝고 즐거운 서커스는 아니었다.
기묘한 아코디언 소리와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서커스 단장에게 천천히, 천천히 다가가는 카메라.
그렇게 카메라가 완전히 멤버에게 근접했을 때, 드디어 멤버는 고개를 들고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표정 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서 있는 멤버는, 바로 한야였다.
우와아아아!!!!
-오프닝 ㄱㄹㅈㄷ
-이의 제기함 왜 56번만 세트에 공들여줌?
-회사가 돈이 많은가 보지
-님 모름? 저 멤버 아빠가 데스티니 대표임. 돈 냄새 날 수밖에 없음
-ㄹㅇ? ㄷㄷ… 어쩐지 무대 퀄이 좋더라니
-?멤버 집 부자인 거랑 무대 퀄은 별개이지 않음? 소속사는 작던데
-진짜 기대돼ㅠㅠㅠㅠ응어어어어
사람들의 환호 속 한야는 빤히 카메라를 노려보다 씨익 웃었다.
평소와 같이 보는 사람마저 유해질 만한 미소가 아니었다. 마치 악몽으로 이끄는 악마처럼, 공포 영화 속 악역처럼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단연 시청자, 관객들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56번 그룹엔 어떤 무대든 그날의 주인공과 같은 확실한 임팩트의 멤버가 있었다. 오늘은 그게 바로 한야이리라.
“멋지다 형.”
주상현이 말하자 그의 곁에 있던 서도화도 미리 세트장에 올라가 있던 아덴도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케이는 코웃음쳤다.
그리고 뚝.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
그리고 다른 곳에 또 다른 스포트라이트가 내려왔다.
어둠 속에 빛나는 열정
고고한 불꽃이 피어올라
그의 등장에 현장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전형적인 cg처럼 생긴 얼굴로 그에 딱 맞는 판타지스러운 옷을 입고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케이.
그의 주위로 댄서들이 연기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왔다.
두려움이 시야를 가려도
나는 꿋꿋히 서네
케이는 읊조리듯 파트를 내뱉었다. 그가 앉아 있는 세트장의 풍경은 마치 케이가 원래 살고 있던 케이클랍스와 유사했다.
검고 높은 그곳에서 케이는 노래를 부르며 댄서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고 파트가 끝나자마자 툭, 또 조명이 꺼졌다.
다음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내려온 곳은 케이의 아래쪽 무대 위에 선 주상현이 서 있는 곳이었다.
주상현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댄서들과 함께 파워풀한 댄스를 추며 제 파트를 시작했다.
“어우…….”
누군가 고개를 뒤로 빼며 탄식했다.
주상현은 자신의 파트를 부르며 댄서들을 조종하듯 춤을 췄는데 댄서들이 온몸을 꺾고 비틀고 아주 난리가 났다.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말 그대로 어둠의 서커스에 딱 맞는 춤사위가 몰입감을 더해주었다.
그 와중에 저 격한 안무를 하면서도 주상현의 라이브는 무척 안정적이다.
-역시 경력직 신인ㄷㄷ
-아니 쟤는 뭐 저렇게 안정적이냐…
-저것도 아직 제 실력 다 안 보여줬다는 게…
저 순하고 귀여운 얼굴이 무대만 들어가면 완벽히 컨셉에 절어버리니 팬들은 안 좋아할 수가 없다.
주상현의 파트가 끝이 났다.
주상현이 댄서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췄다.
그러자 은은히 조명이 밝아져 오며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대신 현장에 푸른 빛이 채워졌다.
오? 오우와아아악!!!!
사람들은 열광했다. 다음은 어디서 튀어나오려나 했더니 주상현의 반대편에서 지금까지의 검은 옷차림의 멤버들과는 상반되게 새하얀 차림의 멤버와 댄서들이 튀어나왔다.
서도화였다.
아슬하게 줄 위를 걸어
to be still walking
흔들려도 떨어져도
걷고 또 걸어
강렬하고 몽환적인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서도화는 서도화 특유의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댄서들을 조종하는 건 주상현과 같았지만 힘차고 격렬했던 주상현과는 다른 우아하고 유연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미치겠다…….”
아니 그냥 미쳤다.
관객들은 서도화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그의 노래에 익숙해졌다 했더니 이젠 그의 춤 실력이 눈에 들어온다.
힘 있으면서도 몸의 유연함을 최대한 활용한 춤사위, 듣기 좋고 때론 성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 청량한 목소리, 그리고 모든 것이 무척 잘 어울리는 비주얼까지.
저렇게까지 아이돌이란 직업이 어울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컨셉에 절여진 게 저렇게 완벽히 잘 어울리는 이들이 있을까.
서도화의 파트가 끝이 났다. 푸른 빛이 돌던 조명은 또 은은히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다음 타자는 아덴. 아덴은 공중그네가 있는 높은 장치 위에 서서 댄서들과 무대를 꾸렸다.
멈추지 마
뭘 하고 있는지
돌아보지 말고
지금은 일단 달려
아덴은 파트에 맞는 제스처를 취하며 노래 부르곤 카메라에 시선을 둔 채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곤 미리 대형을 맞춰 서 있던 멤버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 순간 카메라가 뒤로 훅 빠지며 한야의 후렴구 파트와 함께 단체 군무가 시작되었다.
개성적인 의상, 나눠진 댄서와 안무. 모두가 다른 안무를 추고 있는데 곡에 맞춰 묘하게 딱딱 맞아들어갔다.
참 독특하면서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무대였다.
-그 사건 이후로 ㅈㄴ이갈고 나온듯ㅋㅋㅋㅋㅋㅋㅋ
-미친거 아니냐…..공짜로 보는게 양심 아플지경임
-이거 안무 누가짠거? ㅁㅊ…
-누가 공짜로 보래 얼른 하트 안 누르냐?
-ㅈㅅ…
-아직 1절도 다 안 했는데 벌써 우승각
늘 독특한 무대를 보여주던 소래담의 그룹이 기권하니 독보적인 유니크함 이미지는 단연 56번이 가져갔다.
마치 정말 서커스를 보는 것처럼 경연이나 아이돌 그룹의 공연을 본다는 생각이 안 들고 하나의 빛나는 퍼레이드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 무대의 임팩트를 누가 넘어설 수 있겠는가.
시청자들의 말대로 그 사건 이후 역전의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유제이와 멤버들이, 그들의 작곡가와 안무가, 연출가, 비주얼 디렉터팀 모두가 이를 박박 갈며 만든 무대였다.
이 무대를 위해 김유진은 또 적자를 봐야 했지만 뭐 어떤가.
1위만 하면 다시 긁어올 수 있는 자본일 텐데.
무대 뒤에서 이들을 보고 있는 김유진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 사건으로 순위가 하락한 게 너무 분해서 무리하게 쏟아부었는데, 리허설 때 다른 그룹들의 무대를 보아 무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 공을 들이지 않았다면 우승은 쳐다보지도 못했을 정도로 모든 그룹의 무대가 대단했으니.
그러나 지금 이 무대를 보니 어메스가 우승 안 하면 누가 우승하나 싶을 정도로 멤버들이 너무나 잘하고 있었다.
한야, 서도화, 주상현은 물론이고 아덴과 케이까지 이젠 서로 다른 안무를 하면서도 한 몸처럼 움직였다.
-여러분 지금 우리 멍 때릴 때가 아니에요! 하트 연타!!!!
-56번 하트 좀 눌러주세요, 문자 투표도 꼭꼭 하기
-어차피 우승은 56번일세!!!!
그리고 어디 그 사건 이후 칼을 간 게 유제이와 멤버들뿐이겠는가.
팬들 또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어메스의 우승을 위해 힘써주고 있었다.
‘그래, 우승하자.’
저 먼 다른 세상의 이야기일 것만 같던 우승은 이제 어메스가 바라도 되는 일이 되었다.
우승해서 당당하게 그룹 이름을 말할 수 있도록.
팝넷을 통해 대기업 못지않은 지원을 받으며 데뷔해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휴대폰을 쥔 김유진의 손 또한 팬들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하트를 연타하고 있었다.
어느덧 곡은 하이라이트에 다다랐다.
군무를 끝낸 멤버들은 다시 찢어져 각자의 세트장으로 향했다.
곡은 순식간에 조용해져 최소한의 악기만 남긴 채 다시 아코디언 연주가 시작되었고 카메라는 강렬한 눈빛인 아덴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아슬아슬해
마치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우린 아슬아슬한
레드카펫 위를 걷지
그의 짧은 파트가 지나가고 곧바로 댄스 브레이크, 아니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나온 서커스 단원들이 각자의 기술을 보여주고 아덴과 주상현이 그들 사이에서 댄스 브레이크를 시작했다.
한참이나 격한 안무가 이어지다 아덴은 나무를 타듯 공중그네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 가볍게 공중그네를 타고 반대쪽으로 향했다.
허억!
관객들이 숨을 들이켰다. 위험한 기술이 분명한데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볍게 허공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안전장치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지만 저 기술을 숨 쉬듯 가볍게 춤으로 소화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놀라웠다.
저게 가능한가?
아마 아덴만 가능할 것이다.
팬들이 그의 수준급 아크로, 아니 이제 아크로바틱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기술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이 서도화는 열심히 시설을 타고 기어오르고 날아다니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원숭이인가.’
참고로 아덴은 저렇게 날아다니는 걸 무척 좋아한다.
처음엔 안 다치니까 안전장치 필요 없다고 하는 걸 스태프들이 기겁하며 거부했다고 들었다.
서커스 단원들도 아이돌만 아니었으면 영입 제안을 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던데.
아무튼 그 엄청난 기술들을 선보이되 확실히 무대에 잘 맞게 적당한 선으로 잘 맞춰 안무를 구상해서 그만큼 보는 맛과 몰입도를 확 올려주었다.
아덴이 서커스 단원들과 난리난리 상난리를 신나게 치고 있는 사이 마왕 케이가 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공중그네에 얌전히 앉아 바람결에 머리를 흩날리며 반대편으로 건너갔으며 그 아래서 주상현이 댄서들 그리고 서커스 단원들과 춤추고 있었다.
정말 수많은 인원들과 함께하는 퍼레이드에서나 볼법한 화려한 쇼 같았다.
그리고 다음은.
“갑시다.”
서도화는 자신의 옆에서 스윽 댄서가 내미는 주먹을 힐끔 보곤 자신의 주먹과 맞부딪혔다.
“파이팅.”
다음은 서도화와 새하얀 댄서들의 순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