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관객들과 시청자들은 서도화의 등장과 동시에 공연의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었음을 알아차렸다.
비트는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음에도 무겁게, 혹은 격하게 진행되던 무대가 서도화와 하얀 댄서들의 등장으로 부드럽고 우아해졌다.
“와아…….”
역시 서도화다.
누군가 생각했다.
서도화는 노래든 춤이든 사람들이 넋을 놓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이는 법을 아는 사람 같았다.
그런 경이로움을 서도화를 지켜보는 멤버들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 오직 아덴뿐이었다.
서도화는 게으르고 잔머리 좋은 성격과는 달리 성스러워 보이는데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었다.
오죽하면 동료들이 말하길 오합지졸 아덴 파티가 신에게 선택받은 고고한 영웅 파티로 추앙받는 건 서도화의 내숭 때문이라고 할까.
‘우리를 믿고 여러분들은 피하세요.’
‘우리가 여러분들을 지킬 것입니다.’
하프를 띵땅이며 말하는 서도화의 모습은 성자 그 자체. 심지어 진짜 성자가 따로 있었는데도. 어쨌든 성스러운 언행으로 선동하는 데엔 도가 튼 놈이다.
‘저 아우라.’
그래, 일반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저 아우라 때문에.
서도화가 성스러워지고 싶을 때 그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넋을 뺏기는 것도 당연했다.
세상의 모든 아련함을 얼굴에 품고 있는 듯한 표정,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눈빛.
저런 뻔뻔함을 어디서 배웠나 했더니 이 세계 아이돌 연습생을 하며 익힌 기술이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아덴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서도화의 모습에 완전히 몰입한 모양이었다.
마왕 케이마저도.
서도화는 안무를 부드럽게 이어가며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페이즈를 전환하듯 분위기를 바꾸는 중요한 역할. 소싯적 시절의 경험을 살려 최선을 다해 안무의 선을 살렸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들과 미친 듯이 올라가는 채팅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끝까지 애절하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은.
콰앙.
사방으로 흩어져 댄스 브레이크를 춘 멤버들. 그들의 가운데에 있던 한야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쳤다.
서도화에게로 향했던 관객들의 시선이 획 돌아 한야에게로 향했다. 카메라는 한야의 모습을 클로즈업하고.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무대 위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째깍째깍
째깍째깍
한야가 고개를 들고 모자챙을 쓸며 씨익 웃었다.
떨어지면 끝나
팔을 활짝 벌리고
환호를 받아들여
목적지로 향하네
한야의 파트가 끝나고 파앙! 폭죽이 터져 나왔다.
사방에 금가루가 흩뿌려지고 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어둡고 애절했던 노래는 활기차게 뒤바뀌어 마지막에서 모두를 들뜨게 했다.
서도화가 고개를 돌려 아덴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제 타이밍에 맞춰 그럭저럭 폭죽에 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렇지 않게 다음 파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폭죽과 동시에 서커스 단원들과 댄서들이 한 대 모여 기술을 선보이거나 춤을 추기 시작했고 멤버들 또한 안무를 추며 천천히 한곳으로 모였다.
대형을 맞춘 멤버들과 댄서들이 군무를 추고, 서커스 단원들은 날아다녔다.
축제, 퍼레이드 그리고 피날레. 그 무엇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화려한 무대였다.
“허허.”
이들을 화면을 통해 확인하던 촬영감독이 만족스레 웃었다.
멤버 모두의 안무가 딱딱 떨어졌다. 그러나 모두 의상이 제각각이라 그런 걸까?
마치 모든 배우가 각자의 개성을 뽐내는, 멋들어진 뮤지컬의 커튼콜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김유진.
기획력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다.
“얘네는 진짜 크게 되겠다.”
크게 안 될 수가 없겠다.
56번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무대를 모두 본 감독의 감상평이었다.
데뷔 전부터 그 큰 사건을 넘기고 이렇게 완벽한 재기에 성공하다니.
기획력과 자본, 그리고 멤버들의 실력과 끼까지. 삼박자가 맞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공연은 어느새 마무리로 향하고 있었다.
금가루로 가득한 무대에 어느새 이들의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꽃가루가 휘날리고 있었다.
서도화가 안무를 이으며 센터로 향했다.
This is our stage
This is our playground
Anywhere we go
we'll be proud
서도화의 등장과 함께 다시 푸른빛으로 변한 조명. 서도화가 자신의 파트를 끝마치고 쑥 뒤로 빠졌다.
마지막 센터는 한야였다.
한야가 정중히 손을 모으고 타악! 힘차게 발을 모았다. 한야가 차렷 자세가 되자마자 멤버, 댄서, 서커스 단원까지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곡이 뚝 끊겼다.
조명도 천천히 어둑해졌다.
한야에게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졌다.
째깍째깍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와 함께 한야가 모자를 벗으며 관객들에게 깊이 인사했다.
그리고 한야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마저 꺼지며 공연은 끝이 났다.
와, 와아아아!!!!!
지금껏 없을 정도의 큰 함성이 귀에 꽂혔다. 멤버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관객들에게 깊게 인사했다.
분명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의 기간을 두고 경연에 임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복귀한 것처럼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이는 아마 그 사건 이후 처음 서는 경연 무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은 지금처럼 큰 함성 같은 건 없었으니까.
‘다 끝났다.’
관객들의 함성을 듣게 되는 순간 서도화는 마음을 크게 치고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다.
그 시련과 고난을 겪고 결국엔 무사히 경연을 마쳤다고.
물론 전부 끝난 건 아니었지만.
“하아.”
서도화가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승하지 못해도 괜찮다.
실수 없이 완벽히 무대를 마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우니.
비난이 아닌 환호 속에 무대에서 내려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
하던 대로 담담하게.
아직 순위 발표도 안 나왔는데 괜히 감회가 새로운 듯 티를 내는 건 좀 볼품없으니까.
서도화가 감정을 눌러 담을 때 한야가 다가와 서도화를 토닥였다.
“도화야 정말 수고했다.”
“……형도요.”
과연. 리더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감정을 참아내기가 힘들긴 하다.
* * *
어메스는 자신들의 무대가 끝난 뒤에도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오늘은 평소의 경연과는 다르게 모든 참가자가 세트장에서 다른 공연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멤버들은 땀을 말리고 헤어와 메이크업만 수정한 후 곧바로 세트장으로 향했다.
다시 온 세트장은.
“어서 와요. 어엄청 멋있더라! 여기서 계속 감탄하면서 봤어요.”
서영이 엄지를 추켜들었다.
“감사합니다!”
서도화는 멤버들과 함께 서영에게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가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좋은 무대를 봤다고 후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서영과는 달리 다른 그룹의 모습은 몹시 암울했다.
그런 게 있지 않은가. 카메라가 있으니 티는 못 내겠는데 마음은 몹시 불안한 상태. 그게 고스란히 서도화에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1번 그룹인 데스티니 그룹의 표정도 크게 좋지는 않았다.
서도화 개인적으론 저 침울한 얼굴이 몹시 보기 좋았다. 1번 그룹의 공연을 관객,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완전히 묻어버리겠다는 각오로 공연하긴 했었으니까.
아무래도 그 각오대로 공연을 아주 잘한 모양이다.
“얼른 앉으세요.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멤버들이 자리에 앉았고 그들 가까이로 카메라가 다가왔다.
“와, 긴장된다.”
기다렸다는 듯이 주상현의 입에서 여느 경연 방송에서 많이 들어본 듯한 말이 튀어나왔다.
서도화가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공연하고 있는 그룹도 이를 갈고 온 듯 역대급 스케일의 공연을 준비해왔다.
무척 잘했고 아마 크게 화제가 될 무대로 보였지만 어쩐지 질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이고 온몸이 쑤시네.’
얼마나 긴장했는지 여기저기 안 아픈 근육이 없다. 서도화가 모니터를 지켜보며 어깨를 주무르고 있을 때 그의 머릿속으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케이파, 아니 어메스는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케이의 목소리였다.
서도화는 저도 모르게 질려오는 표정을 간신히 참아낸 채 다시 초롱초롱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카메라 앞이다. 질색하지 말자.
저건 좀 급하다 싶으면 허락도 없이 텔레파시로 말을 걸어온다.
그냥 잠시 참았다가 나중에 쉴 때 물어보면 되는 걸 가지고.
어차피 말 걸어봐야 서도화는 텔레파시를 쓰지 못하니 대답해줄 수도 없는데.
‘그나저나 그놈의 케이파이브는…….’
서도화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룹 이름이 어메스로 정해지고서도 자기 혼자 속으로 케이파이브로 부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멤버 중 가장 밴댕이 소갈딱지인 건 아무래도 케이가 아닐까?
아무튼 서도화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이가 봤다면 그냥 어깨 근육을 풀려고 그러는가 보다 하겠지만 케이는 알 것이다.
‘모르겠는데?’라는 의미임을.
정말 모르겠다.
4라운드 1위의 기세를 몰아 5라운드에서도 좋은 성과를 냈더라면 확신에 차서 예상 순위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5라운드엔 두 계단이나 떨어진 순위를 받았다 보니.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건 이 경연은 지난 라운드의 성적이 이번 라운드의 성적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떡상도 충분히 가능한 환경.
그렇기에 오해가 풀리고, 무대가 완벽하고, 팬들의 기세가 구름을 뚫고 올라간 지금이라면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걸 수 있었다.
* * *
세 번째 순서였던 그룹의 공연이 끝이 났고 그 이후 남은 다섯 팀의 무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밀리언 아이돌을 보러 와주신 팬 여러분,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 경연을 끝까지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그룹의 무대가 끝난 직후 참가자들이 대기 중인 세트장으로 화면이 전환되었고 서영이 진행을 시작했다.
“이로써 밀리언 아이돌 최종라운드의 모든 공연은 끝이 났고요. 이제…… 하하, 순위 발표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어우, 저까지 너무 떨리는데요.”
서영은 떨린다는 제스처를 취하곤 이어 말했다.
“과연 밀리언 아이돌의 최종 우승자는 누가 될지! 팝넷과의 협업과 글로벌 마케팅 지원을 받게 될 주인공은 누가 될지! 집계를 위해 잠깐의 휴식 시간 뒤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관객들의 탄식 소리가 여기 세트장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채팅창도 짜증으로 가득해졌지만 서영은 괘념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잠시 후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