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아덴의 말에 하이넬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어디에 있든 용사가 동료를 위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이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그럼. 지금까지 너도 도화도 고생 많이 했으니까. 좀 쉬어간단 생각으로 지내고 있어.”
“어차피 이제 연락이 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아예 손 놓고 있는 일은 없을 거야.”
아덴이 자신과 서도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이넬 또한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상황에 대해 보고도 할 겸 자주 통신하자. 도화.”
“그래. 하루라도 일찍 연락이 닿아서 다행이다.”
“아이돌은 재밌어?”
아이돌을 하겠다고 세상까지 구한 서도화다. 그 간절했던 목표를 드디어 이뤘다고 하는데 재밌게 잘 하고 있을까?
그녀의 질문에 서도화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마냥 재밌기만 했는가 하면 아니었다. 솔직히 보람되고 즐거운 일보단 힘든 일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다시 이곳에 돌아올 만한 가치는 있었다고 생각했다.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어.”
“잘됐다. 건강해 보여서 좋네. 아덴 사고 안 치게 잘 감시하고.”
하이넬의 말에 아덴이 혀를 찼다.
“내 감시를 왜 해? 감시할 거면 마왕을 해야지.”
“무슨 소리야? 둘 다 해야지.”
하이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쟨 용사라 다행이야. 조금만 삐끗했어봐. 마왕보다 더한 놈이 세상에 나타났을 거야.”
“동감하는 바야.”
서도화 또한 아덴과 함께 다니며 몇 번이나 생각했던 말이다.
아덴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하이넬과 서도화는 익숙한 태도로 모른 척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천천히 하라곤 했지만 최대한 빨리 이곳으로 돌아올 방법을 찾아둘게.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 같기도 하고.”
하이넬이 기어코 삐져선 저 멀리 구석에 박혀있는 아덴을 바라보았다.
“때가 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아덴도 그리고 도화 너도.”
마왕과 그의 진영이었던 케이클랍스가 무너지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다.
대륙의 모든 국가는 각국을 관리하던 마왕의 수하로부터 벗어났고 하늘을 가린 독기는 사라졌으며 사람들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사건이 끝나면 반드시 그에 뒤따라오는 문제가 생긴다.
이제 막 마왕이 사라진 이 세상은 아직 영웅이 필요했다.
그녀의 비장한 말에 서도화가 황당해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너도.”
하이넬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말했다.
서도화도 영웅이 아닌가?
신을 넘어선 전투력을 가진 아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마나를 다루는 대마도사 하이넬, 그다음으로 유명한 게 강력한 치유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낸 서도화다.
겨우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겠다는 서도화를 본인 세계도 아닌 이곳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건 양심 없는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원래 하이넬은 양심이 없었다.
여의치 않으면 강제 소환이라도 해야지 어쩌겠어.
사실 서도화는 지금 당장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만큼 광범위 치유에 특화된 사람이 없었으니.
“다시 돌려보내 주기만 하면 되잖아?”
“아니. 아니 아니.”
“도화 너 알지? 내가 마나량 하나는 미쳤거든. 차원 텔레포트 술식만 알면 왔다 갔다 하는 거 별거 아니야.”
“오우, 아니야.”
하이넬은 질색하는 서도화에게 싱긋 웃어주곤 말했다.
“건강히 잘 지내.”
“끄, 끊으시는 겁니까? 형님! 너무 보고 싶습니다! 아프신 곳은 없죠?”
“혀엉니임!!!! 흐어엉!!!! 다시 만나 뵐 날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이넬은 시끄러운 동료들을 타박하며 통신석 연결을 끊었다.
순식간에 무서우리만치 조용해진 공간.
“하아.”
서도화는 통신석을 툭쳐 꺼버리곤 아덴을 보았다.
“다들 무사하다니 다행이네.”
“어.”
“그런데 너 아까 한 말-”
“어, 당분한 할 거야. 아이돌.”
아덴은 서도화가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자신이 필요한 동료가 있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 서도화다.
이 일은 세계를 구하는 것만큼 큰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데 못할 게 뭐가 있는가.
서도화는 자신의 세계도 아닌 아덴과 동료들의 세상을 무려 5년 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지켜준 이다.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춤추고 노래 부르며 잠시 여흥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것보다 너는?”
“어?”
아덴이 물었다.
“아까 하이넬이 한 말 어떻게 생각하는데.”
서도화가 멈칫했다. 아까 전 하이넬이 일이 생기면 서도화 또한 제2세계로 텔레포트 시키겠다고 했던 걸 말하는 거였다.
“하아.”
서도화는 한숨을 쉬며 아덴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전장만 아니면 상관없어.”
초 단위로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장은 자신의 능력을 떠나서 정신적으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 게 아니고 단순히 치유력이 필요하다면 당일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조건으로 응해줄 수는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동료들이 굳이 은퇴한 동료를 복귀시킬 정도면 보통 치유사로는 감당이 불가능하다는 것일 테니까.
“아, 아무튼 그건 그런 일이 있을 때 생각하고.”
무엇보다 안 가는 게 제일 좋은 거지.
서도화는 황급히 말을 돌리며 아덴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연습이나 하러 가자.”
“오늘은 쉬는 거 아니었냐?”
아덴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도화를 따라 일어섰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아덴의 신념대로 기왕 아이돌을 해보기로 한 이상 제대로 노력해볼 생각이었다.
* * *
밀리언 아이돌이 끝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다 되었다.
그간 자유롭게 연습하며 휴식을 취했던 멤버들은 오랜만에 다시 방송국 문을 두드렸다.
“와 이게 얼마 만이야.”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한참 전에 봤던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에 탄 어메스 멤버들은 의식적으로 대화를 나누며 천장 한구석을 힐끔거렸다.
여기저기 카메라가 붙어있을 거라는 언질을 듣긴 했는데 진짜로 사방에 달려있었다.
아무리 경연으로 카메라가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해봐야 공연, 연습만 주구장창 했지 어색한 건 여전했다.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비추는 카메라가 솔직히 부담스러워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주상현과 한야가 열심히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 말을 주고받으면 금방 끊겨버렸다.
아직 데뷔도 못 한 연습생들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대화를 이끌어나가기가 참으로 힘든 법이다.
‘이, 이러다 불화설이라도 나면!’
어메스의 대표 시무룩 달인 주상현이 이번에도 극단적인 생각을 하며 겁을 집어먹었을 때, 다행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의 제작진들이 보였다.
“어어~ 왔어?”
“안녕하십니까!”
“PD님, 어메스 왔어요!”
멤버들이 제작진 입에서 나오는 ‘어메스’란 이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움찔거리는 찰나 회의실의 문틈으로 PD가 고개를 빼꼼 내밀곤 씨익 미소 지었다.
“어서 들어와.”
멤버들이 꾸벅 인사를 하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어메스를 기다리고 있던 PD는 밀리언 아이돌의 기획을 담당한 도성한. 그가 이번 어메스의 예능도 맡게 되었다.
서도화는 제작진의 안내를 받아 의자에 앉으며 책상 위 카메라를 보았다. 당연하겠지만 이 회의실도 곳곳에 카메라가 붙어있었다.
“자, 먼저 우리 서로 잘 아는 사이지만 그래도 저는 자기소개 할게요.”
도성한 피디가 말했다.
“저는 이번에 우리 어메스 멤버들 예능 촬영을 담당하게 된 도성한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지현서 작가예요. 잘 부탁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지현서 작가는 인사하는 멤버들 각자의 앞으로 두 장씩 종이를 배분하였다.
서도화가 제앞의 종이를 훑었다.
이번 예능의 기획을 간략히 정리한 것으로 보였다.
“이번 예능 이름은 공개된 그룹 이름에 맞춰서 지으려고 결정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어요. 제목은 ‘어메스로 놀아보자’입니다.”
“어메스가 난장판이라는 뜻이잖아요. 되게 재밌는 그룹 이름이라 난장판으로 신나게 놀아보자! 그런 뜻으로 지었어요.”
PD와 작가는 종이에 적힌 내용에 조금의 살을 붙여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어메스로 놀아보자’는 일명 페이크다큐 컨셉으로 다양한 주제에 어느정도 대본과 리얼한 상황이 교차되어 나가는 예능이었다.
“예를 들어 어메스가 놀이공원에 갔다. 그럼 놀이공원에 간 거 자체는 리얼하게, 물론 간단히 이렇게 해라 하는 식으로 상황 지시를 내릴 수는 있어요. 웬만하면 리얼하게 갈 거지만. 아무튼 리얼하게 가고 그에 맞춰 인터뷰는 대본대로 진행한다던가 하는 식입니다.”
간혹 단편으로 제작된 예능 등에서 사용되기도 하는 방식이었다.
“미션도 있고, 주제도 있고 한데 아무래도 어메스의 그런 활동적인 이미지를 소비할 수 있는 촬영을 많이 할 거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멤버들 개개인의 캐릭터를 최대한으로 살려서 보여주는 걸 최종 목표로 해봅시다.”
도성한이 힘있게 말했다.
사실 아직 이미지조차 제대로 박히지 않은 신인들을 데리고 예능을 하는 게 쉽지는 않다.
그러나 어메스만큼 개성 강한 멤버들이라면 뭐, 무난히 재밌는 방송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