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이 끝났을 때 이미 멤버들은 모든 촬영을 끝낸 것처럼 지쳐있었다.
“이제 하나…….”
서도화가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딱 두 시간 지나있었다.
체감상으론 한 다섯 시간 내도록 운동한 것 같았는데.
“나 이제 케이 안 놀리려고.”
“저도요.”
주상현도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이 세계로 넘어온 뒤 너무 하찮아진 탓에 엄살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운동하고 돌아올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연약할 수 있냐고 비웃어댔는데, 새삼 케이가 다시 보였다.
이 정도 하드한 트레이닝을 받고 제 발로 걸어서 집으로 들어온 게 대단한 것이었다.
“하아……. 이제 알았느냐. 한야 형은 운동만 하면 악마가 된다.”
“그렇네.”
“그렇더라고요.”
두 사람은 이제야 케이의 말을 납득할 수 있었다.
잔뜩 지친 모습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멤버들을 보며 지나가던 아덴이 낄낄거렸다.
“와 너네 진짜 연약하다.”
“…….”
아 이런 기분이었구나.
새삼 케이의 기분을 깨달은 서도화와 주상현이었다.
“자, 다음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제작진의 외침에 멤버들은 힘없이 일어나 터덜터덜 이병수와 한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다음 촬영 장소는 작은 스튜디오에 마련한 세트장이었다.
호화로웠던 첫 번째 장소와는 달리 이번엔 어둑한 빈 세트장에 촛불 모양 조명 소품, 그리고 커다란 블라인드 하나만 하나 있는 단출한 모습이다.
“이거 약간 고해 장소 같지 않아요?”
“진실게임이 이렇게 진지한 거였어?”
좀 지나치게 어둑하고 차분하고 조용한 것이 세트장 분위기만 보면 연습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떠올리며 고마웠다 미안했다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첫 번째는 격한 운동이었고 두 번째는 눈물 뽑기인가?
‘힐링이라더니.’
오히려 지난 촬영보다 체력도 부치고 정신적으로도 소모가 심한 촬영인 거 같다.
“약간 수련회 같은 분위기다. 재밌겠는데?”
“형, 저건 뭐예요?”
“저건 스크린 같은데 동영상 보는 건가? 무대 영상 보여 줬으면 좋겠다. 그렇지 아덴아?”
“뭐, 네. 형이 보고 싶으면 봐야죠.”
아직 헬스장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서도화, 케이, 주상현 셋과는 달리 한야는 학생 시절이 생각난다며 아덴을 데리고 세트장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한편 서도화는 얼른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조용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자가치유 : 원기회복] 발동!
눈앞에 텍스트가 떠오르고 서서히 몸의 피로가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채워지고 있군.”
케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서도화가 씨익 미소지 었다.
원기회복이란 일정 시간 동안 기력, 체력, 마나를 회복해 유지시켜주는 스킬이다.
이 스킬 참 오랜만에 써본다.
보통 밤을 새워가며 며칠 내내 전투를 치르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소생시키는 수준의 치유술을 썼을 때 기력을 보충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말이 원기회복이지 뒤에 쓸 체력, 마나, 기력을 끌어다 쓰는 개념이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효과가 끝난 뒤 반송장 상태가 되기도 하고 수명이 줄거나 기절해 며칠간 일어나지 못하는 등 부작용이 무척 심해 웬만해선 잘 안 쓰던 스킬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지.’
전투 상황도 아니고 그냥 트레이닝으로 빠진 체력, 기력 가져다 쓰는 정도는 뭐, 오늘 밤 기절하듯 잠드는 정도로 끝날 것이다.
엔간해선 이곳으로 돌아온 이후 어떤 스킬이건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최근 그 생각은 버리기로 했다.
아덴과 케이가 함께 오고, 시스템창과 다시 만나고 저쪽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통신석까지 생겼다.
그 이후 깨달았다. 아덴과 케이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끝나도 다 끝난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 그냥 자포자기. 어차피 다시 평범하게 살아가긴 글렀다. 스텟도 재분배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데 마음껏 써먹기나 해야지.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어메스 멤버들은 자리에 서주세요.”
제작진의 외침에 흩어져 있던 멤버들이 카메라 앞에 모였다.
그리고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자 여러분, 벌써 지치신 거 아니죠?
“……아닙니다!”
-어? 대답이 좀 느려지신 거 같은데요?
“아닙니다!”
지친 얼굴로 내뱉는 힘찬 대답에 제작진들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 열정 너무 좋습니다. 자, 그럼 오늘의 두 번째 힐링, 아덴 씨의 희망사항이었죠!
“네?”
“희망사항이요?”
어라? 이상하다? 멤버들이 듣도 보도 못한 소리라는 듯 말하자 또 제작진들 사이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주상현이 물었다.
“아덴 형은 진실게임이 뭔지도 오늘 알았는데요!”
아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가 설명해줬어요.”
그러자 도성한 피디가 능글스럽게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멤버들과 함께 있는 시간 자체가 힐링이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랬죠?”
-멤버들과 함께하는 진실게임. 서로의 진솔한 이야기도 오붓하게 해볼 수 있고 너무 좋지 않습니까? 막 힐링이 저절로 될 것 같지 않아요? 아덴 씨.
도성한의 물음에 아덴은 씨익, 주인공다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은데요?”
-거봐요.
도성한의 거들먹거리는 말에 한야가 대답했다.
“근데 사실 저희도 좋기는 좋아요. 사실 저희끼리 모여서 오붓하게 대화를 나눠볼 기회가 많이는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다 같이 이야기하면 좋죠. 그렇지 얘들아?”
-그래도 여러분들 체력을 생각해서 아덴 씨가 말씀하셨던 또 다른 힐링이죠. 등산은 뺐습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도성한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멤버들과 진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 ‘뭐든 들어줄게! 너에게 전하는 나의 마음!’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 이름 훈훈해 훈훈해.”
-그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저기 오른쪽에 블라인드 보이시죠?
도성한이 사이드에 있는 커다란 블라인드 스크린을 가리켰다.
-한 명씩 저 뒤로 들어가서 한 멤버를 지목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전하면 됩니다. 참 쉽죠?
“……어?”
“응? 하하.”
주상현과 한야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서도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 규칙이면 오붓함이랑 좀 멀어지지 않아요?”
그건 오붓하게 고마웠어, 미안했어 서로를 토닥이며 훈훈하게 울고 그런 느낌 안 나오지 않나?
‘멤버들과 함께하는 진실게임. 서로의 진솔한 이야기도 오붓하게 해볼 수 있고 너무 좋지 않습니까?’
라던 도성한의 말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연출될 게 뻔한 규칙이었다.
멤버들의 반응에 도성한은 ‘글쎄요?’ 흘리듯 말하고 서둘러 게임을 진행시켰다.
-참고로 점수는 이번 코너의 주인공인 아덴 씨의 판단 하에 매겨집니다. 아덴 씨가 보기에 감명 깊었다! 하는 사람 순으로 주관적인 순위를 매겨 점수가 배분될 겁니다.
원래 이런 건 출연자들의 불평불만이 심해지기 전에 진행시켜야 재밌는 법이다.
“그럼 첫 번째로 누가 해볼래요?”
서도화의 물음에 한야가 손을 들었다.
“그럼 제가 해보겠습니다.”
“오오, 역시 리더.”
한야는 싱글벙글 웃으며 블라인드 뒤로 향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누가 말하는지 다 아는데 블라인드가 꼭 필요해요?”
주상현의 물음에 아덴이 말했다.
“마주보고 말하기 부끄러울까 봐 있는 거 아니야?”
“그런가?”
-자자, 한야 씨 준비 되셨나요?
“네, 준비 됐습니다.”
한야의 대답에 맞춰 세트장의 조명이 어둑해졌다. 그리고 블라인드 뒤로 조명이 들어와 한야의 실루엣이 비춰졌다.
“오오!!!”
“아아. 잘 들리나요?”
“……목소리가 왜 이래?”
아덴이 당황하며 물었다. 케이 또한 조용히 눈을 바짝 키운 채 경계하며 블라인드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한야의 목소리가 변조되어 나오고 있었다.
“아아아, 그냥 말하면 되나요?”
“네!”
“저희 귀기울여 듣고 있어요!”
“그럼 말하겠습니다!”
눈 밑이 퀭한 거 치곤 쉬지도 않고 말하며 채워지던 오디오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집중하는 가운데 한야가 말했다.
“저는 멤버 모두에게 리더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오 뭔데요?”
“궁금해궁금해.”
“일단 우리 어메스 멤버들. 언제나 서로 도와가며 열심히 해줘서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요!”
주상현이 크게 대답하자 다른 멤버들도 하나 둘씩 한야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어유 우리가 더 감사하죠.”
“한야 형, 저도 고마워요.”
“한야 형이 이 길, 그룹에 가장 크게 공헌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바입니다.”
“저는 우리 어메스 멤버들이 너무 귀엽고, 기특하고 또 자랑스러워요.”
멤버 사랑의 대명사 한야답게 세트장의 분위기는 더없이 훈훈해졌다.
하하호호 훈훈하게 한동안 칭찬과 덕담을 이어나가던 한야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금 낮아진 헬륨가스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요.”
“……엇?”
그런데요?
“아무리 예쁜 동생들이지만 그래도 한 명 한 명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은 있어요. 우선 도화부터.”
“……나?”
서도화가 힐끔 도성한을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심드렁하게 멤버들의 덕담을 지켜보던 그가 미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