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케이의 두 눈에 적대감이 가득해졌다.
“나더러 소멸하라는 것이냐? 네놈,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내가 언제 소멸하라고 했어? 넌 정화해도 안 사라져.”
서도화가 빛이 흘러나오는 제 손과 케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치유술이 아니라 무슨 퇴마 빔이라도 맞은 것처럼 아파하더니 이마저도 조금씩 적응되어 이젠 괜찮은 모양이다.
이건 케이가 마왕이었으나 본질은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넌 인간이잖아.”
“…….”
“뭣보다 난 소멸시킬 힘도 없어. 마족도 소멸시키지 못하는데 마왕을 어떻게 소멸시켜?”
정화와 치유술로 마족을 잠시 기절시키거나 일시적으로 멈칫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이 효과가 소멸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부정한 존재에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긴 했으나, 결국 치료에 치중된 마법일 뿐 공격 효과는 무척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도화는 혈혈단신이 아니라 많은 동료들과 함께 마왕의 소굴 케이클랍스로 쳐들어간 것이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힘없는 건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그럼 무슨 의도로 한 말이냐.”
적대적이던 케이의 눈빛은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경계가 잔뜩 서려 있었다.
서도화는 예상 그대로 행동하는 케이의 모습에 한숨을 푹 쉬고 침착하게 말했다.
“내성을 만들자는 의도였어. 노래 부를 때마다 아파하는 거 나도 불편하고.”
앞으로 서도화는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보컬 실력도 나날이 늘어날 테고 이따금 팬들의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될 날도 생기겠지.
또 어떤 때는 임의로 스탯을 조정하여 보컬 실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케이가 언제까지 함께 아이돌 생활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때마다 괴로워하고 또 고통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지는 건 비효율적이다. 멤버들과 직원들은 걱정할 것이기도 하고.
이제 그러지 말자는 뜻이었다.
“내성을…….”
“평소보다 강한 정화를 받고 내성이 생기면 내가 실력이 늘어도 당분간 너한테 영향은 없을 거다.”
어쩌면 핵이 없는 마왕에겐 치명적인 일이라 아예 진짜 인간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 이건 케이도 알고 있으리라.
케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서도화는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케이가 씨익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서도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케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말 그대로 마왕, 중2병에 어울릴 법한 웃음소리였다.
“괜찮은 생각이군. 음유시인. 모처럼 마음에 드는 제안을 했어.”
“뭔 소리야 이건.”
“네가 말한 대로 한다면 난 정화에 대한 내성을 얻고 다시 볼품없는 인간이 된다.”
그렇게나 싫어하던 인간이 된다고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케이는 웃고 있었다. 쟤 왜 저래? 떨떠름함에 저절로 입이 닫힌 서도화가 찌그러진 얼굴로 케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에겐 내성이 생기지! 웬만한 그대의 노래로는 결코 꺾이지 않을 내성이!”
“……그런데?”
“난 원래 인간에서 마왕이 된 몸. 다시 인간이 된다 한들 처음부터 다시 마기를 끌어모아 마족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면 될 터.”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울 것이다.
지금 당장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조차 알 수 없으니 굳이 마왕으로서의 힘은 필요가 없다.
다시 마족이 되는 건 원래 세계로 돌아간 이후 당분간 용사를 피해 다니며 하면 되는 별거 아닌 소사였다. 그런 것보다 지금 케이에게 그보다 탐나는 건 서도화에 대한 내성이었다.
“지금의 너는 전투 때와는 같으나 다른 강함을 가지고 있군.”
마법엔 소질이 없는 아덴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겠지만 케이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전투적인 능력에 분배되었던 마나가 묘하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 뭉쳐진 게 모였다. 최후의 전투 때와 마나의 그릇은 그대로, 그러나 정화 능력 혹은 노래 실력에 조금 더 집중된 것일 테지.
다시 전투를 치르게 되는 날이 오면 정화 능력은 오히려 지금보다 줄어들고, 원래의 일명 전투용 마나 배분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혹여나 서도화가 아덴을 따라 다시 그의 세계로 돌아와 자신에게 맞선다고 한들 지금 생긴 내성은 사라지지 않을 테지.
용사들의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인 음유시인의 정화에 대응할 힘이 생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거라! 음유시인이여! 네가 날 도와준다니 이런 때도 오는구나!”
“뭔…….”
뭔 헛소리야……. 서도화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원래 세계로 돌아간 이후의 일을 서도화가 생각 못 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정화에 대한 내성이 생기나 안 생기나 어차피 서도화는 그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 없고 케이도 그 세계로 보낼 생각이 없다.
그러니 괜찮지 않겠나 싶어서 제안한 것이었다.
“자! 얼른 해라! 나에게 내성을 부여하여라! 고통은 잠시뿐이니!”
“잠시뿐 좋아하시네.”
양팔을 쫙 펼친 채 신나게 서도화를 독촉하던 케이가 뚝 말을 멈췄다.
아덴이 문에 기대선 채 불만스러운 얼굴로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 서도화 괴롭히지 말고 둘 다 좀 나오지? 녹음하러 가야 해.”
“벌써 그렇게 됐냐?”
서도화가 일어나 아덴을 따라 방을 나섰다.
“그건 나중에 하자. 아무튼 나와. 목은 괜찮아졌으니까.”
“이야, 그거참 편리하네. 저 자식한테도 그게 통해?”
아덴의 물음에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쟤만 참으면 못할 건 뭐야. 예전에 디오프 치료했던 거 기억 안 나?”
“……아 맞다.”
아덴은 쳇 혀를 차더니 툭 내뱉었다.
“배신자는 빠르게 잊어버리거든 난.”
아주 잠깐 동료로 있었던 디오프라는 이가 있었다.
마족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진 자였다.
자신은 마족인지 인간인지. 진짜 마족을 만나면 자신의 정체성도 확실해질 거라며 마침 마왕의 소굴을 찾고 있던 용사 파티에 합류했었다.
한때 동료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져 싸우던 전사였지만 그는 이후 마왕 케이의 꾐에 넘어가 아덴 일행을 배신하고 케이의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었다.
그도 크게 다쳐 서도화의 치유술을 받은 적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고통을 견디자 치료가 되었다.
그 일로 인해 서도화의 정화가 마족 스턴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또 이 정도 수준의 정화로는 마족을 소멸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야.”
아덴이 서도화를 힐끔 바라보았다.
“마왕 좋을 일 하지 마.”
“케이 좋으라고 하는 일이냐? 자꾸 일에 지장이 생기니까 그렇지. 내성이 생기게 정화를 들이부어 보라고 말한 건 너잖아.”
“그게 아니고 쟤까지 네가 챙기려고 자꾸 지랄하니까 하는 말이잖아.”
“…….”
“목 치료는 네가 왜 해주냐? 쟤가 잘못한 건데. 어차피 저 새끼 일정은 정 안 되면 내일로 미뤄준다고 매니저 형이 말했잖아.”
“……어?”
서도화가 우뚝 멈췄다.
케이의 보호자 역을 자처한 건 그렇다 치고. 내가 혹시 너무 과하게 케어해주고 있는 건가?
어느새 그냥 당연스레 챙겨야 하는 멤버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목도 당연히 고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케이가 그 세계에서 했던 일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새 마왕한테 정이라도 든 거냐?”
아덴의 말에 서도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열심히 하는 모습에 진짜로 정이 든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녹음 부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이병수는 ‘크으’ 커다란 감탄사를 내뱉었다.
“따뜻한 물로 지지는 걸로 이게 돼?”
아직 신인인데 벌써 컨디션 관리가 미흡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케이에게 따끔히 눈치를 줘놨더니 그 짧은 새에 목소리가 깔끔하게 돌아왔다.
경험상 따뜻한 물을 좀 마시는 정도로는 절대 녹음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고 생각해 케이의 일정을 추가로 잡아 놓은 상태였는데 그럴 필요 없을 듯했다.
서도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침이라서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건가 봐요. 물 마시고 시간 좀 지나니까 괜찮아졌어요.”
“그랬구나. 그것도 모르고 내가 너무 눈치를 줬나?”
이병수가 걱정하며 말하자 케이의 녹음을 집중해서 보던 한야가 단호히 말했다.
“아뇨. 전혀요. 당연히 혼나야 했어요. 촬영 때 녹음 생각 안 하고 날뛴 건 맞으니까요.”
“병수 형이 너무 마음이 여린 거예요.”
서도화도 말을 덧붙이며 케이가 녹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선선한 바람에
차갑게 식어가
부유하는 lost moon
어메스의 데뷔 타이틀곡 ‘Crescendo’.
몽환적이고 아련하지만 기타, 플롯, 트럼펫, 북 등 소리가 강한 악기를 리드미컬하게 사용해 굉장히 속도감 있고 크게 울리는 곡이 되었다.
멤버들의 목소리가 없어도 곡이 다했다 할 만큼 전주부터 귀를 휘어잡았다.
이 좋은 곡에 케이와 아덴의 실력 부족을 걱정한 건 기우였다.
경연을 치르며 어느 정도 실력이 안정되었던 터라 케이도 아덴도 적당히 노래에 잘 섞여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는 불러 주었다.
“아니! 거기서 음을 죽이면 어떡해? 아련하게 가라고 했지 묵음으로 부르라고는 안 했지? 다시. 물 한번 마시고.”
물론 여전히 디렉터의 눈에는 그 실력이 상당히 거슬리는 듯했지만.
디렉터 지태엽의 언성에 주상현이 크게 움찔거리며 가사지에 얼굴을 숨겼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팝넷에서 나온 거의 모든 보이그룹의 데뷔곡을 작곡한 작곡가 겸 디렉터로 이번 어메스의 데뷔곡의 작곡가이기도 했다.
주상현이 종이 뒤에서 울상을 지으며 서도화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오늘 안으로 못 끝낼 거예요!’
보이그룹의 곡을 굉장히 잘 뽑는 만큼, 까다롭게 녹음하기로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라고 한다.
지금은 데뷔 비하인드 촬영용 카메라가 있어서 이정도만 언성을 높이지, 없을 땐 욕을 입에 달고 산다고.
서도화는 긴장한 얼굴로 지태엽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그를 만족시키는 게 케이, 아덴뿐만 아니라 어메스 멤버 전체의 숙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