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첫 번째 현장에서의 촬영이 끝난 직후 케이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연습생이 된 이후 가장 행복하고 뿌듯하며 거만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봐 음유시인. 난 연기가 적성에 맞는 듯하다!”
“어 아니야.”
그냥 원래의 너처럼 하라는 말에 겨우 감을 잡아 역할에 임했으면서. 감독에게 연기 너무 잘한다고 한번 크게 칭찬을 받자 아주 신이 났다.
지금이야 악역이니 마왕의 위엄에 걸맞은 연기를 보였다 치다. 하지만 반대로 그에게 선한 역할이 주어진다면 차마 보기 힘든 모습을 보여줄 테지.
그래도 촬영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먹을 불안한 멤버였던 케이가 예상외의 활약을 보여준 덕분에 첫 번째 촬영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음 촬영으로 이동할게요!”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밤이 되기 전까지 이어지는 촬영은 제1세계의 어메스 촬영분.
여기서부터는 다섯 명이 다 따로 떨어져 제각각의 장소에서 촬영에 임하게 된다.
의상과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다음 촬영 현장으로 이동한 서도화는 노을이 낄 듯 말 듯한 하늘과 건물 아래를 번갈아 보았다.
높은 건물의 옥상, 바람도 선선한 게 어떤 카메라로 찍어도 참 예쁘게 나오겠다 싶은 풍경이었다.
첫 번째 촬영과는 상반되는 새하얗고 하늘하늘한 의상. 제 1세계 어메스의 서도화는 멸망해가는 세계의 구원자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멤버들 보단 움직임이 적지만 주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슬픈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바람을 느끼는 등 표정과 제스처 연기가 필요한 역할이었다.
“도화는 역시 밝은 게 잘 받네. 곱다 고와.”
스타일리스트가 서도화의 머리를 적당히 고정시켜주며 만족스레 말했다.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확실히 어두운 색보단 밝은 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계열은 케이나 아덴에게 훨씬 잘 어울리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쉽고 다른 멤버들이 부러운 건 있었다.
“저도 좀 멋진 거, 직업복을 입고 싶었어요. 한야 형이나 아덴처럼.”
참고로 한야는 갑작스럽게 멸망을 맞이한 세계에서도 직업윤리를 실현하고자 애쓰는 경찰, 아덴은 속을 알 수 없는 군인을 맡았다.
케이는 제 1세계에서도 악역이고 주상현은 살아남겠다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학생 역을 맡았다.
다들 뮤직비디오 촬영 등에서만 입을 수 있는 특수한 복장을 입고 있는데 서도화는 여느 무대에서든 무난하게 입을 법한 의상이라 좀 아쉬웠다.
그러자 스타일리스트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서도화를 흘기며 말했다.
“야, 네가 제일 예쁜 옷 입었어!”
“예에?”
곁에 있던 또 다른 스타일리스트가 덧붙였다.
“그리고 제일 비싸지.”
그러곤 두 사람은 씨익 웃었다.
“다른 애들처럼 땀 흘리고 움직이고 그런 역할이 아니라서 맘먹고 꾸며 놨더니. 참 나.”
“입고 싶으면 나중에 음방에서 한번 입혀줄게.”
하늘하늘하고 밝은 의상. 서도화의 성격과는 대비되지만 외모 이미지와는 찰떡처럼 딱 어울리는 의상이다.
뮤직비디오에선 제일 예쁘게 나올 녀석이 직업복이 입고 싶네 뭐네 하고 있으니 스타일리스트는 그게 웃기면서도 어이없었다.
실제로 다른 곳에서 촬영 중인 멤버들은 의상이 불편하네, 덥네, 가뜩이나 어두운 세트장에 의상도 어두워서 멋진 옷이 안 보인다, 왜 아름다운 나만 화려하지 않은 의상을 입히냐는 등 말이 많았다.
“아이, 그게 아니고-”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서도화가 스타일리스트들의 역성에 밀려 얼떨결에 사과할 때쯤 드디어 하늘에 노을이 깔렸다.
제작진의 말에 서도화가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왔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서도화가 준비된 듯하자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큐!”
서도화는 옥상의 난간에 손을 올린 채 아련하고 답답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멀쩡한 건물과 멀쩡한 하늘, 멀쩡히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차들이 보였지만 서도화에게 만큼은 모든 것이 무너져 가는 멸망한 세상이 보이듯 연기해야 했다.
서도화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러곤 혼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슬하게 바스러지는…….”
뚝 멈춘 노래. 서도화가 슬픈 표정으로 하늘을 보다 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살짝 웃었다.
“컷!”
“와아! 오글거려!”
서도화는 컷 소리가 나자마자 제 손을 한껏 오무려 보이며 몸을 떨었다. 그러자 제작진도 이에 공감하는지 크게 웃으며 잘했다고 서도화를 칭찬해주었다.
뮤직비디오의 시작 장면, 제1세계의 서도화가 한때 친구였던 어메스 멤버들과 노래방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를 떠올리며 한 소절 작게 불러보는 부분이었다.
이 다음엔 서도화의 시선을 따라 도로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주상현에게로 장면이 넘어간다.
세계 멸망 주제의 뮤직비디오치곤 신파적인 부분과 우정, 단합 등을 상당히 강조하는 스토리라고 했던가.
연기하는 사람마저 이렇게 오글거리는데 이게 영상에서 멋지게 보일 수 있다고?
서도화가 의아해하며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영상으로 봐도 오글거리기만 할 것 같은데 감독은 확신에 차선 당연히 멋있을 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이후 서도화는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촬영했고 누군가를 발견한 뒤 옥상에서 내려가기 위해 걸음을 떼는 씬을 찍으며 개인 촬영은 마무리되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너튜브 채널용 비하인드캠과 매니저 이병수가 다가왔다.
“도화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병수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도화 네가 제일 빨리 끝났다고 하네?”
“그래요? 어, 저 휴식이에요?”
한 장소에서만 촬영을 진행했던 서도화와는 달리 다른 멤버들은 장소를 옮겨가며 촬영해야했다.
다른 멤버들의 촬영이 길어지는 바람에 서도화에게 다음 촬영까지 여유시간이 생겼다.
다음 촬영까지 뭘 할까? 잠시나마 눈을 붙이기엔 시간이 애매하고. 서도화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그럼 다른 멤버 촬영하는 거 보러 가도 돼요?”
비하인드캠 뒤로 숨은 이병수가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곤 가능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다른 멤버 보러 갈래요. 제일 가까이 있는 멤버가 누구예요?”
“건물 안에 있는 멤버가 제일 가깝지. 근처에 아덴 촬영 중일 건데.”
“오 그럼 아덴 보러 갈래요.”
이병수는 말없이 가자며 손짓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화 씨 좀 있다 봐~”
서도화는 제작진들에게 인사하고 아덴이 촬영 중인 스튜디오로 향했다.
아덴의 개인 촬영 세트장은 상당히 어둡고 그의 얼굴만큼이나 위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와 무슨 괴물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비주얼이네요.”
서도화가 세트장 내부를 둘러보며 비하인드캠에 대고 말했다.
군인 컨셉이라고 하더니 무슨 에어리언에게서 살아남는 공포액션 영화 속 촬영장 같았다. 낡은 철근으로 이어진 건물에 떨어져 튀는 전선들, 그리고 의미를 모르겠는 사슬과 초록 조명.
그 속을 촬영 중인 아덴이 거닐고 있었다.
“군인 맞아요? 약간 각색이 너무 많이 들어갔는데?”
서도화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아덴은 감독에게 주문받은 그대로 무표정하게 세트장을 살피며 걸었고 그 모습이 제법 잘 어울렸다.
서도화의 말대로 정석적인 군인의 모습이기보단 멋있어 보이라고 느낌만 내는 영화 속 인물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서도화는 크으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쟤가 피지컬이 좋기는 좋네.”
키도 크고 근육도 탄탄하니 입은 옷이 상당히 잘 어울린다. 붉은 머리에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건방진 모습마저도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약간, 특수작전 수행하는 좀 재수 없지만 멋진 그런 역할 있잖아요. 딱 그런 느낌이에요. 악역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서도화가 비하인드캠에 아덴에 대한 감상을 늘여놓고 있을 때 컷 소리와 함께 아덴의 촬영도 마무리되었다.
아덴은 카메라가 멈추자마자 곧바로 표정을 바꿔 활짝 웃으며 세트장에서 내려와 서도화를 향해 달려왔다.
촬영하느라 못 본 줄 알았더니 서도화가 왔음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가 여기 왜 왔냐?”
“반갑냐?”
“어.”
아덴은 순순히 대답하며 이병수가 건네준 음료를 받아들었다.
“촬영 일찍 끝나서 구경하러 왔어. 역시 한 곳에만 있는 멤버들이 제일 빨리 끝나네.”
“아덴, 너 연기 많이 늘었더라.”
“연기는 무슨.”
아덴이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냥 평소 내 모습이었는데 뭐. 카메라 없고 이게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하라길래 그렇게 한 건데.”
아덴은 상황에 몰입했을 뿐이다. 감독의 말대로 이 세트장 내부의 모습이 실제 상황이었다면 아덴은 똑같이 웃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여유롭게 이곳저곳을 살피며 돌아다녔을 것이다.
서도화는 어이없어 피식 웃었다. 아덴 녀석은 그게 바로 연기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배우에 비하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몰입이고 연기겠지만 뮤직비디오를 위한 것으로는 훌륭한 연기가 아니었겠는가.
서도화는 아덴에게 대충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여주곤 이병수에게 물었다.
“다른 멤버들은 아직 덜 끝났대요?”
이병수가 휴대폰을 확인하곤 말했다.
“케이랑 상현이는 끝나고 돌아오는 중인데 촬영 장소가 좀 멀다 보니 이동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고. 한야는 야외 촬영 끝나고 요 밑에 계단에서 촬영 중이라는데.”
“보러 가도 돼요?”
“한야 형 볼래요.”
서도화와 아덴이 동시에 말했다. 이병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가자 손짓했다.
“한야 촬영만 끝나고 우리도 출발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