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부터 시작하는 아이돌 생활-153화 (153/270)

제153화

대형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의 계단.

인위적으로 낡고 더럽혀진 것처럼 꾸며진 위치에서 한야가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쉿.”

이병수는 투닥거리는 서도화와 아덴을 조용히 시키며 한야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서도화는 이병수의 말을 못들은 척 또다시 장난을 치려 하는 아덴을 멀리 밀어내고 한야를 구경했다.

경찰 복장을 한 한야는 총을 손질하고 있었다. 마치 방금까지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다 잠시 숨을 돌리며 재정비를 하는 것만 같았다.

표정도 상황도 무척 막막하고 슬퍼 보였다.

한야는 평소의 웃음기 하나 없이 묵묵히 총을 닦곤 일어나 창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곤 창밖을 보며 깊게 한숨 쉬었다.

“하아…….”

서도화와 마찬가지로 일상과 별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풍경이겠지만 뮤직비디오에선 무너져 내린 건물과 오염된 먼지가 가득한 아포칼립스 세상으로 보일 터다.

서도화와 아덴은 서로를 곁눈질하며 척 엄지를 추켜들었다.

한야의 연기가 무척 안정적이고 보기 좋다는 의미였다.

“컷!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감독의 조금 피곤해진 목소리와 함께 한야의 개인 촬영도 끝이 났다.

멤버들은 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이병수를 따라 다음 촬영 장소로 향했다.

차에 탄 서도화가 창밖을 보았다. 예쁘게 깔렸던 노을은 어느새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밤이 되었다.

벌써 촬영을 시작한 지 몇 시간이나 흘렀다.

“피곤해?”

이병수의 물음에 세 멤버는 일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아덴이 말했다.

“전혀 피곤하진 않은데 배고파요.”

“다음 촬영 장소에 밥차 불렀더라. 거기서 뭐라도 먹어.”

“밥차가 뭐예요?”

아덴의 물음에 서도화가 가볍게 대답해주었다.

“밥.”

“밥? 뭐 있는데?”

그가 다시 묻자 이번엔 한야가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우리 아덴이가 좋아하는 고기도 있고, 이것저것 다 있어. 맛있을 거야. 덴이가 한 요리가 제일 맛있겠지만.”

“고기 있으면 뭐.”

아덴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곤 서도화를 따라 창밖을 구경했다.

어두컴컴한 도로에 오로지 차의 라이트 불만 환히 들어온 바깥 풍경.

딱히 볼 게 없는 풍경이지만 잔잔한 어둠에 평화가 깔려 있다는 것만으로 용사에겐 큰 행복과 볼거리가 되었다.

잠시 후 촬영 장소에 도착한 멤버들은 정신없이 의상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흐엉! 형들 너무 보고 싶었어!”

가장 늦게 촬영이 끝난 주상현이 울상을 지으며 멤버들에게 달라붙었고, 촬영은 빨리 끝났지만 이동 시간 때문에 주상현보다 늦게 온 케이는 자신의 역할에 무척 만족했는지 여전히 컨셉 잡고 구석에서 마왕처럼 굴고 있었다.

“내가 세상을 파괴할 것이다. 내가 멸망의 원흉이 될지니……. 인간들은 모두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그렇게 되기 전에 넌 나한테 뒤져.”

“헛소리 말고 메이크업 받아. 바보야.”

도대체 무슨 촬영을 어떻게 하고 와서 저러는지는 몰라도 아덴과 서도화가 칼같이 케이의 말을 잘라내 버렸다.

“……너넨 정말 몹쓸 인간들이구나.”

만족스러운 컨셉의 촬영에 신나서 낄낄거리던 케이의 입꼬리가 싹 내려갔다.

그러든지 말든지 서도화가 퉁명스레 말했다.

“이제 그런 컨셉으로 촬영하는 거 끝났으니까 그만해. 메이크업 다 받으면 안무나 맞춰보자.”

재기의 꿈에 부풀어있던 케이가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한때는 마왕이었으나 지금은 그룹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보호가 필요한 일개 멤버일 뿐이다.

“……알겠다.”

케이는 분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는가? 지금은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는데.

순순히 대답하는 케이를 보며 아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 이제 마왕 못 하는 거 아니냐?”

“……뭐?”

“멤버들한테 정 제대로 붙이고 있는 거 같은데.”

아덴은 비아냥거리듯 말하곤 씨익 웃었다. 별거 아니게 말했지만 케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말이었다.

멤버들에게 정을 붙이고 있다.

이는 인간을 증오하여 마왕이 된 케이가 다시 인간에게 희망을 품고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과 같으니.

그럴 리 없다고, 자존심을 지키듯 말하고 싶었으나 케이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최근 아덴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었다.

“걱정 마라 용사여. 적어도 네 녀석에겐 어떠한 감정도 지닐 일 없을 터이니.”

“바라던 바야. 징그러우니까 제에발 가지지 마라.”

서도화는 시선을 돌려 거울을 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모르는 척했고, 대신 주상현이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대사를 그렇게 완벽하게 외우고 있어? 진짜 재밌게 플레이했나 봐.”

주상현은 여전히 둘을 추억의 게임에 과몰입한 멤버들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간이 대기실 문이 열리며 제작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메스 준비 아직 덜 됐을까요?”

“다 됐어요~”

어메스 스태프들의 손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의상, 헤어, 메이크업 수정까지 끝낸 멤버들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야 우리 애들 진짜!”

멤버들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안 하는데 매니저 이병수와 스태프들이 난리가 났다.

“비주얼만 내세워서 먹고사는 그룹이라고 해도 믿겠어. 하하하하하!”

역시 개인별 촬영보단 단체 의상을 맞춰 입고 세워두었을 때 비주얼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있었다.

온종일 함께하며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메스의 성장을 도왔던 이병수였다. 하지만 왜일까, 최근 그는 멤버들의 잘 꾸며진 멋진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이상했다.

마치 다 큰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가 된 것처럼, 자식의 믿음직스러운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된 것처럼. 무언가 기특하면서도 뿌듯하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벅참을 느꼈다.

다사다난했던, 하루하루가 위기였던 나날이 지나고 어느덧 그들이 이렇게나 화려한 복장을 한 채 자신들의 데뷔곡 안무를 추는 날이 오다니.

그 마음이 그의 눈빛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자 아덴이 부담스럽다는 듯 고개를 쭉 뒤로 빼며 말했다.

“형 우리 아직 데뷔 안 했는데요.”

저런 눈빛은 데뷔하고 받는 게 서로 덜 민망하지 않나?

고작 뮤직비디오 안무 촬영으로 저런 반응을 보이면 데뷔할 땐 얼마나 좋아하려고 그러나.

“쉿쉿. 예의 없게 왜 그래?”

서도화가 급하게 아덴의 입을 막았고 이병수는 아차차 퍼뜩 정신을 차리고 민망함에 헛기침했다.

“그으…렇지. 아직 너네 데뷔 안 했지. 열심히 해! 가자!”

멤버들이 이병수를 따라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오늘의 마지막은 단체 안무 촬영.

내일도 촬영이 잡혀 있었지만 체력은 여기서 죄다 태우고 갈 예정이었다.

멤버들과 댄서들이 지정된 위치에 자리 잡자 감독이 확성기를 잡고 한결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해 뜰 때까지 촬영하면 굉장히… 슬프겠죠? 빨리 끝내고 다 같이 기쁘게 퇴근합시다.”

“네!”

멤버들도 댄서들도 제작진과 스태프들도 마지막 촬영에 임하는 각오가 남달랐다.

빨리 끝내자!

그리고 빨리 집에 가서 자자!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마지막 촬영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멤버들은 곧장 숙소로 돌아가 샤워만 겨우 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어메스는 뮤직비디오의 회상 씬 촬영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오락실로 향했다.

“아, 우리 이런 스토리였구나.”

오락실 한구석에 마련된 코인노래방 안, 서도화는 비하인드캠을 앞에 두고 작게 중얼거렸다.

서도화는 정말 오랜만에 교복을 입었다. 몇 년만의 교복 차림이었지만 육체의 나이는 여전히 열여덟이었으니 아무런 이질감 없이 자연스레 잘 어울렸다.

그리고 서도화의 곁에는 주상현이 교복을 입은 채 같은 의자에 앉아 그와 똑같은 흐리멍텅한 표정으로 바깥을 보고 있었다.

현역 고등학생인 주상현 또한 당연히 교복이 무척 잘 어울렸다.

코인노래방 부스 안 서도화와 주상현의 맞은편의 의자엔 케이가 뾰로통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타인과 같은 복식이어야만 하지?”

“그럼 벗던가.”

서도화가 받아치기도 귀찮다는 듯 툭 내뱉었다. 케이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에게 수치를 줄 생각이군.”

“형 그 말투 고치기로 한 거 아니야? 나는 좋지만.”

케이는 주상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 또한 서도화, 주상현과 함께 교복 차림이었는데 케이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단정한 교복보단 어제 서도화가 입었던 실크 셔츠가 더 어울렸을 것이다.

그리고 코인노래방 바깥엔 단정한 경찰 복장의 한야와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집에서 대충 입고 나온 차림새의 아덴이 스태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휴가 나온 군인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던가?

서도화는 이곳에 와서야 오늘의 촬영이 어떤 내용의 이야기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서도화가 비하인드캠을 의식하며 말했다.

“왜 오락실에서 만나 노는 회상 씬이 있는데 현재 시점에도 상현이는 학생이고 다른 멤버들은 직업이 있나 했거든요.”

오락실에서 노는 건 뮤직비디오 속 직업이 없는 서도화, 케이, 주상현 셋이고 이번 회상 씬은 과거 멤버들의 스쳐 지나간 인연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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