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노래 커버야 평소에도 많이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까지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부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긴장이 아니라 부담이었다.
처음 보는 관계자나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노래 부르는 건 굉장히 익숙한 일이라, 더는 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라디오 부스의 통유리창 바깥으로 어메스를 보기 위해 찾아온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상황이다.
심지어 국내 팬만 있는 것도 아닌지, 모니터로 보이는 실시간 문자 중계창엔 수시로 한글과 영어, 그리고 서도화가 잘 모르는 글자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메인작가가 말하기를 근 반년 간의 방송 중 가장 뜨거운 반응, 가장 많은 청취자가 듣고 있다고 했다.
모두가 노래를 준비하는 서도화와 한야를 주목하고 있다.
‘이 느낌은…….’
이 옹기종기 좁은 공간에 모여서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노래 부르는 것.
마치 월말평가 때와 같았다.
서도화와 한야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뭐.’
부담스러운 분위기이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공연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서도화와 한야에게는 암묵적으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오랜 기간 함께 연습생 생활을 하며, 또 때로는 같은 팀으로 월말평가를 준비하며 서로의 실력을 무척 잘 알게 된 탓이다.
애초에 노래실력을 떠나 두 사람 다 부담감에 강한 편이었다. 첫 라디오 라이브지만 잘 해낼 수 있으리라.
“자, 그럼! 한야 씨와 도화 씨가 준비가 다 된 것 같으니 한번 들어보도록 할까요?”
서도화와 한야가 준비를 마치는 동안 다름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던 오슬리가 화제를 전환하듯 말했다.
“두 분 준비되셨어요?”
“네! 준비됐습니다!”
두 사람이 힘차게 대답했다.
“오오, 갓 데뷔한 신인다운 무척 열정적인 대답이네요. 그럼 무슨 곡을 불러주실지 청취자분들께 소개 부탁드릴게요.”
한야가 말했다.
“네, 저희가 이번에 부를 곡은요. 올리의 ‘Showcase’입니다.”
“여어어어! 오오오오!”
오슬리가 크게 호응하며 좋아했다. 올리의 쇼케이스라는 곡은 오슬리가 한참 미국 톱 싱어들을 프로듀싱하던 시절 직접 작사작곡한 곡으로 그의 커리어에 비해 크게 히트한 곡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들은 아는, 은근히 유명한 축에 속하는 곡이었다.
해외에서의 인지도에 비해 국내 인지도는 현저히 떨어지는 곡이었는데 이 곡을 두 사람이 들고 왔다.
“우리 어메스 친구들이 여기 출연한다고 일부러 이 노래를 선곡해 왔나 봐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끼는 곡인데요. 저도 기대하고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슬리가 진심으로 기대에 차서 설레어 하는 게 서도화에게까지 듬뿍 전해졌다.
서도화는 또 한 번 부담감을 느끼며 이어폰을 끼고 마이크를 들었다.
잠시 후 이어폰을 통해 쇼케이스의 전주가 들려왔고 두 사람이 노래를 시작했다.
* * *
띠링!
오슬리는 시종일관 싱글벙글거리며 한야와 서도화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실력 좋은 아티스트가 자신의 곡을 커버하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다.
오슬리 그는 무척 호쾌한 사람이지만 음악과 보컬에 관해선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못 부르는 것에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잘 부른다의 허들이 상당히 높은 축에 속한다고나 할까. 웬만해선 오슬리의 입에서 잘한다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기 쉽지 않았다.
“잘한다…….”
그런데 두 사람, 특히 서도화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물론 이제 막 노래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성대가 잘 여물지 않은 어리고 서툰 느낌은 있지만 지금보다 아티스트로서의 경험이 좀 더 쌓이면 틀림없이 완벽한 가수가 되리라.
노래의 시작과 동시에 돋아난 소름이 그가 얼마나 서도화의 노래에 만족했는지 알려주었다.
사실 서도화야 노래 잘 부른다는 이야기는 밀리언 아이돌 경연 때부터 업계에 자자했고 오슬리가 서도화보다 놀란 건 오히려 한야였다.
‘노래 합이 맞네?’
어메스는 비교적 서도화와 주상현의 실력 존재감이 너무 커서 다른 멤버들이 묻히는 감이 있지만, 오슬리가 보기엔 한야도 상당한 원석이었다.
그룹의 래퍼라고 했던가?
유제이는 이 곡에 랩이 포함되어있어 한야를 서도화와 함께 세운 모양인데 한야는 노래에도 꽤나 재능이 있었다.
그도 그럴게 서도화와 보컬 합이 맞지 않는가. 서도화의 노래에 맞춰 은은하게 들어가는 한야의 낮은 화음이 무척 안정적이고 부드럽게 들렸다.
대한민국 아이돌 중에, 아니 어떤 아티스트와 견주어도 연륜 빼고는 지지 않을 실력을 가진 서도화와 듀엣을 부르는데 거슬리지 않는다면 충분히 잘 부르는 것이다.
어메스는 래퍼마저 보컬이 좋구나 생각하던 오슬리는 한야가 랩을 부르기 시작하자 결국 입 밖으로 ‘크으’ 탄성을 내고 말았다.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데 포지션이 래퍼인 이유가 있었다.
한야는 작곡가 앞에서 당당하게 랩 파트를 개사해 왔는데 그게 퍽이나… 완벽했다.
“이야…….”
오슬리가 연신 감탄하며 동영상을 계속해서 찍어대는 동안 주상현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조용히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해외에서든 국내에서든 상당히 영향력 있는 프로듀서. 그가 무척 만족스럽게 두 사람의 공연을 지켜보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크게 화제가 될 것이다.
비슷한 상황을 댄스로 겪어본 적 있던 주상현은 유명 프로듀서가 관심을 보이는 게 얼마나 큰 기회를 만들어주는지 알고 있었다.
오슬리가 우리 형들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비록 그게 자기 자신이 아니라도 뿌듯함에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의 곡 커버가 끝이 났다.
오슬리는 노래가 끝나고 자신의 마이크가 열리자마자 언제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틀고 즐겼었냐는 듯 짧은 소리를 냈다.
“이야…….”
그리고 잠시 말이 없다가 말했다.
“제가 제 곡을 커버한 걸 듣고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은 되게 오랜만인 것 같아요.”
“아유 감사합니다.”
서도화와 한야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인사했다.
“아니 진짜로요. 제가 한 소절 듣자마자 아, 이거다 싶어서 바로 동영상으로 두 분의 모습을 담아 뒀는데 정말 제가 다 고마울 정도로 너무 잘 불러주셨어요. 노래는 물론이고 화음도 너무 좋았고 랩까지 완벽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다음에 같이 작업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오슬리는 농담하듯 가볍게 툭 던지고 바로 다음 진행으로 넘어갔다.
“자, 다음 코너는 게스트의 재치 있는 연기와 목소리로 읽어드립니다~ 나의 사연 코너! 잠시 광고 듣고 올게요~”
오슬리의 말과 함께 부스 내 모든 마이크가 꺼지고 대신 공간 가득 광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는 광고가 시작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부스에서 나갔다.
어메스 멤버들은 그가 나간 후에도 한동안 꼼짝도 앉고 자리에 앉아 주변 눈치만 보고 있었다.
‘뭘 해야 하지?’
이 순간 주상현을 제외한 멤버 모두가 서도화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냥 라디오였다면 광고를 시작함과 동시에 긴장이 탁 풀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보이는 라디오가 아닌가. 광고를 들으며 얼어있는 지금의 모습조차 모두 화면으로 송출되어 어마어마한 수의 시청자들에게 보여지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평소처럼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거겠지.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꼿꼿이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 부스 밖 오슬리를 보았다.
오슬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메스의 매니저 이병수와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다.
조용한 침묵 속 어색하게나마 제일 먼저 말을 꺼낸 건 역시 보이는 라디오가 익숙한 주상현이었다.
“병수 형 되게 기뻐 보인다. 그치.”
주상현을 시작으로 멤버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대화를 하고 계시길래 저렇게 웃음꽃이 피었을까.”
“우리 칭찬하고 있는 거 아닌가? 저 형 우리 칭찬하면 되게 좋아하잖아.”
아덴이 툭 내뱉듯 말했고 서도화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칭찬할 게 뭐가 있어. 오늘 우리 딱히 한 게 없어. 별로 재미도 없었던 것 같아.”
서도화의 말에 아덴이 케이를 가리켰다.
“뭘 쓸데없는 걱정을 해? 웃기는 건 좀 있다 쟤가 다 할 건데.”
아덴의 말에 케이가 버럭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내가 무슨 네 노, 너희들을 웃기는 광대인 줄 아는가!”
“이것 봐, 역시 광대는 나 놀리려고 말했던 거 맞잖아!”
갑자기 주상현도 대화에 끼어들어 아덴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예전 등산을 하며 별명을 광대로 하자던 아덴의 말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아덴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뭔 소리야. 내가 언제 케이 보고 광대라고 했어? 내가 아는 광대는 웃기는 녀석 아니거든. 누구보다 진지하게 곤봉 휘두르는 친구였거든. 너 지금 광대 무시하냐?”
“아니 대화가 또 이상해! 이상해지고 있잖아! 형도 뭔 말 좀 해봐. 아덴 형이랑 케이 형 또 싸워.”
“야야, 방송 중이다.”
“방송 중이라서 내가 참아준다.”
아덴이 서도화의 말대로 잠자코 앉으며 케이를 보고 실실거렸다.
한편 대화가 들리지 않는 부스 바깥에선 오슬리와 이병수가 멤버들을 보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긴장 많이 했었나 봐요. 멤버들끼리 있으니까 단번에 떠들썩해지네.”
“예에, 아무래도 대프로듀서님께서 진행을 하시다보니.”
“하학! 대프로듀서가 뭡니까. 아무튼 사이 좋아 보이고 좋네요. 이제 저 다시 들어가 봐야 하는데 제가 말한 거 한번 논의해보시고 연락 주세요.”
오슬리가 이병수에게 씨익 웃고는 다시 녹음부스로 들어갔다.
이병수는 오슬리가 돌아서자마자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인기가 많아도 탈이다.”
서도화의 목소리가 확실히 프로듀서들의 무언가를 자극하기는 하나 보다.
만나는 프로듀서마다 서도화를 중심으로 어메스의 다음 앨범 프로듀싱 제안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