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갑자기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무슨 생각을 하기는. 미친 듯이 포인트 끌어 모아 스탯 올리고 있지.
아마 이만큼의 스탯으로 정화가 들어가도 소멸까진 안 될 것이다. 제2세계에서도 적에게 스턴을 거는 용도로는 사용할 수 있었지만 소멸까지는 힘들었다.
순간 좋은 생각이 들었다. 서도화는 열심히 스탯을 올리다 말고 멈칫 케이를 바라보았다.
“야, 하프도 켤까?”
위풍당당하게 하겠노라 말했던 케이가 움찔 당황한 듯 도화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서도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프는 좀 과하긴 하지.
“안 할게.”
“……아니, 해라. 고통은 잠깐뿐, 고통을 이겨내고 나면 너의 정화는 이제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하겠지.”
“아니 됐어. 안 할게.”
서도화는 빠르게 스탯 세팅을 마무리했고 케이를 쳐다보았다.
“적당히 버텨보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말해. 내일도 새벽부터 스케줄 있는 거 잊지 않았지?”
“안다. 걱정 말아라. 음유시인, 어쭙잖은 배려말고 제대로 하거라. 이제 난 적당한 정화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서도화가 말없이 제 스킬창을 힐끔 보았다.
……어쭙잖은 배려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세팅이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하급마족은 한 방에 소멸하지 않을까?
“한다.”
케이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유시인이 그 어떤 노래로 공격하더라도 전부 이겨내리라!
인간에게 굴하지 않으리라!
물론 핵은 없지만.
케이를 빤히 쳐다보던 서도화가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케이가 힘차게 외쳤다.
“나는! 마.왕.이-”
그리고 기절했다.
“……응?”
눈을 깜빡거리며 졸도한 케이를 잠시 멍하니 쳐다보던 서도화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보컬 스탯을 내렸다.
“뭘 마왕이야. 핵도 없는 게.”
기절한 건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원래 스턴이라는 게 적을 잠시 기절시키는 거 아니겠는가.
아마 30분도 안돼서 일어날 것이다.
* * *
‘…이곳은?’
케이의 눈가가 짙어졌다.
방금 전까지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으며 내성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이 꿈을 꾸는 걸 보니 결국 기절해버린 모양이다.
케이의 눈앞엔 어린 인간 아이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 앙상한 몸과 더러운 옷.
어린 인간 아이는 과거의 자신이었다.
시리도록 서늘한 바람이 썩은 나무 벽의 틈사이로 파고들어 어린 케이의 살을 스치고 갔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어찌할 줄을 몰라 하던 아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겁에 질린 눈으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 배고-”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거라.”
“배, 배고파요…….”
정말 참고 참다가.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도 더 참다가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자 칼날 같은 말이 돌아왔다.
“더 이상 이 집에 먹을 건 없구나.”
“배가 고프거든 너처럼 쓸모없는 아이라도 먹여줄 수 있는 집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느냐.”
배가 고프다면 다른 집을 찾아라. 이 집에서 나가라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케이는 알고 있었다. 이 집에서 나가봐야 추위에 죽거나 굶어죽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보자.
단단한 흙바닥을 긁으면 손에 작게 흙이 잡혔다. 어린 케이는 이것을 입에 넣어 오물거리며 다시 몸을 웅크렸다.
이를 그의 부모였던 인간들이 매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지겨워.”
작게 내뱉는 중얼거림은 마왕이 되는 바람에 청각이 몹시 좋아진 어른 케이만 들을 수 있었다.
검은 짐승으로 불리던 인간 아이는 아직 몰랐다.
이날 밤, 결국 자신은 벼랑에서 떨어져 마족의 손에서 크게 될 것이라는 걸.
그때, 모든 것이 안개처럼 흐트러지며 눈앞의 광경이 바뀌었다.
“가지 말거라!”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 굳어진 케이가 반응했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과 조금 더 큰 소년 케이가 보였다.
케이는 여전히 어린 자신을 붙잡는 저 남자를 기억했다.
벌써 백 년도 더 된 날의 일이지만 그럼에도 저 얼굴만은 잊을 수 없었다.
“너는 인간이다! 가지 말거라. 네가 인간으로서 살겠노라 한다면 내가 네 아비가 되어주겠다. 아이야.”
잠깐의 동행을 한 것으로 이미 마족으로서의 삶을 택한 케이에게 겁도 없이 정을 주려고 했던 인간이었다.
그의 말에 소년 케이는 잠시 흔들렸으나 결국 마족이 되는 길을 택했다.
인간으로서 기꺼이 아버지가 되어주겠다며 마족의 소굴까지 찾아온 이는 결국 마족에게 살해당했다.
‘알고 있었다. 모든 인간을 원망할 필요는 없었음을.’
그러나 이를 인정하면 어쩔 것인가. 자신의 원망은, 원한은. 결국 인간에 대한 복수는 어찌되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지난 날 자신에게 인간으로서의 정을 준 이는 많았다.
아덴의 용사 파티도 그 중 하나였다.
마왕 케이는 눈을 감았다.
이제 와서 인간들과 나눴던 정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음유시인의 술수렷다.
그리고 또 풍경이 바뀌었다.
눈을 뜬 케이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형! 아덴 형이 시비 걸면 그냥 무시하라니까?”
“이제 슬슬 화해하자 둘이. 아니, 도화까지 셋인가? 하하.”
“난 아니야. 난 쟤네랑 안 싸웠어.”
“케이랑 화해를 왜 해야 해? 애초에 싸운 적이 없는데. 내가 시비를 건 거지.”
멤버들과.
“케이야. 너희가 사이좋은 거 형이 너무 잘 아는데. 혹시나. 진짜 혹시나 정말로 괴롭힘 당하는 거면 형한테 꼭 말해야 한다 알겠지? 아이스크림 먹을래?”
매니저 이병수의 모습이 보였다.
케이가 헛웃음을 쳤다. 마왕에게 인간으로서 정을 준 최후의 인간들.
이들을 보면 반갑다는 ‘감정’이 생겼다.
그렇게나 부정했는데 슬프게도 결국 케이 자신이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애정을 보이고야 만 것이다.
마왕이 인간에게 애정을 보이며 감정을 나눈다.
마왕이 인간이 되어간다. 죄책감을 느낀다.
결국, 정화가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케이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냥 얼른 꿈에서 깨어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얼마 뒤, 케이는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눈을 떴다.
컴컴한 밤. 그리고 시끄럽게 코골며 자는 아덴의 소리.
현실이었다.
* * *
쇼케이스와 같은 데뷔 쇼의 일정들을 마친 다음날.
멤버들은 음악방송 사전녹화를 위해 새벽 일찍 숙소를 나왔다.
어젯밤 라디오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가뜩이나 피곤한 상태로 엉겨 붙어 울기까지 했으니 이른 스케줄이 버거운 건 당연했다.
마찬가지로 퀭한 눈을 한 이병수는 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도로 곯아떨어진 멤버들을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그래, 차라리 잘 수 있을 때 자둬라.”
이제부터는 정말 쉴 틈 없이 바쁠 테니까.
그 활기차던 멤버들이 잠잘 시간도 부족해 끙끙대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지만 차라리 바쁨을 즐기는 수밖에 없다.
수십, 수백 개의 그룹, 아티스트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대한민국 가요계에 데뷔한 지 고작 하루 된 작은 회사 아이돌이 바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행히도 방송국에 도착했을 때쯤엔 멤버들이 겨우 졸음에서 벗어나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 * *
팝넷의 음악프로그램 POP-스튜디오.
방청객은 없지만 음악 명가 방송국 답게 아티스트와 노래 본연의 매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세트장을 꾸미기로 유명한 프로그램이었다.
“와…….”
서도화는 스튜디오에 지어진 세트장을 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팝넷이 세트구성에 얼마나 진심인지는 몹시 유명하지만 무슨 방송국 내에 폐허로 변한 신전을 지어 놨다.
서도화 또한 팝스튜디오 무대는 매번 챙겨보는 편이지만 이 정도로 빡세게 힘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는데.
역시 밀리언 아이돌 우승자 타이틀 파워가 강하긴 강하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세트장이었다.
“여러모로 제작진분들이 신경 써주기도 했고 우리도 힘 좀 썼어. 멋있지?”
이병수가 뿌듯하게 말했다. 그의 미소는 입을 헤벌레 벌린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멤버들을 보며 더욱 짙어졌다.
밀리언 아이돌 경연 당시에도 세트장 잘 세우기로 유명했던 유제이가 아니던가.
하물며 멤버들의 첫 음악방송인데 적어도 경연 무대보단 더 힘을 줘야하지 않겠는가.
유제이가 크게 투자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팝넷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무대였다.
팝넷은 이 무대를 한동안 채널 대문에 걸어놓고 대대적인 글로벌 홍보를 해줄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얘들아. 잘해.”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려는 게 아니라 진짜 잘해줘야만 했다.
멤버들은 이병수의 말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네!”
안 그래도 잘할 생각이었다. 아마 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미치도록 연습만 했는데, 심지어 자다가도 노랫소리가 들리면 자동으로 안무가 튀어나갈 정도로 연습했는데 자신감이 없으면 이상한 정도였다.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제작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병수는 멤버들의 등을 세트장 쪽으로 밀어주었다.
“잘하고 와!”
그는 물가에 자식을 내놓은 부모의 눈빛으로 멤버들에게 소리쳤고 멤버들은 활짝 웃으며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의상도 갖춰 입지 않은 리허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은 카메라 앞에 서자마자 눈빛이 바뀌었다.
“곡 틀어주세요.”
멤버들과 댄서들이 대형을 찾아 자리 잡자 감독의 무기력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바로 리허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