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첫 음악방송은 녹화방송이었다.
방청객도 없고 타 아티스트와의 교류도 없이 무대 녹화만 끝마치고 일정이 종료되었다.
그런고로 어메스 멤버들의 진짜 음악방송 경험은 음악방송 순회의 두 번째 순서인 MVE 러브뮤직이 처음이었다.
“케이는 되게 아침잠이 많구나? 애가 정신을 못 차리네.”
숍 실장의 웃음소리에 서도화가 케이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케이에게만 무려 네 명의 스태프가 붙어 있다.
한 사람은 산송장처럼 졸고 있는 케이의 고개를 조심스레 고정해주고 두 사람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고 그 앞에서 또 다른 스탭이 붓으로 피부의 잡티를 가렸다.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 사람을 무려 넷이나 대동시켜두고 잠이나 처자고 있다니 너무 호사스럽고 건방진 거 아닌가 했지만 직원들은 이런 상황이 몹시 익숙한 듯했다.
“참나.”
서도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정면을 보았다.
그러자 서도화의 머리를 고데기로 말아주던 디자이너가 피식 웃었다.
“어제 잠 못 잤나 보다. 케이. 그렇지?”
“아, 네. 맞아요. 못 자더라고요.”
“그럴 만하지. 이제 두 번째 아냐? 아니다. 정석 음방은 처음이지? 긴장해서 어떻게 자. 나는 절대 못 자.”
서도화는 그 말이 맞다는 듯 미소 지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케이는 어제 잠을 설쳤다.
근데 사전녹화 때문은 아니고 어제도 내성 작업으로 한 차례 기절했다가 애매한 시간대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도 방안을 돌아다니며 사부작거리길래 서도화마저 깨서 눈 부릅뜬 케이와 조우했었다.
자라니까 마왕 시절엔 잠도 안잤다며 그러니까 안 자도 된다며 버티다 결국 저 꼴이다.
아주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서 정화에 내성이 생긴 채 다시 세계정복을 하려고 열정을 불태우는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서도화는 케이를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낼 생각 없었다.
‘내성 작업에 태우는 열정의 반만 연예 활동에 태워주면 참 좋겠는데.’
아쉽게도 아이돌 생활엔 여전히 적당히,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협조만 해주고 있다.
멤버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어도 아이돌 생활 자체엔 전혀 흥미가 없는 듯했다.
“자자! 케이! 이제 그만 자. 곧 녹화인데 본격적으로 자면 어떡해? 얼른 일어나!”
아주 제 방인 것마냥 푹 자는 케이를 이병수가 손뼉을 쳐가며 깨웠다.
“잠은 숙소에서 자! 어제는 잘 시간 충분했잖아. 왜 여기서 자고 그래?”
“……미안합니다.”
“얘들아 다시 한번 말해줄 테니까 생각 좀 해두고 있어. 오늘 사녹 끝나고 대기실에서 대기! ‘오늘의 아이돌’ 출연진들이 들어오면서 바로 촬영 들어가는 거야! 끝나고 자면 안 돼. 알겠지? 케이! 알겠지?”
“네!”
“……네.”
케이는 여전히 졸린 얼굴로 대답했다.
본격적인 앨범 활동의 시작.
최근 데뷔한 아이돌 중 가장 큰 화제를 모으며 데뷔한 어메스답게 활동 기간 중 앨범 홍보를 위한 예능 스케줄도 꽉꽉 차 있다.
그중 이들의 첫 예능이 될 ‘오늘의 아이돌’은 아이돌그룹이라면 필수로 거쳐 가는 앨범 홍보 프로그램으로 각종 오락과 함께 자연스러운 곡 홍보도 할 수 있게 해주는 방송이다.
당연하게도 어메스의 데뷔 일정이 잡히자마자 섭외 전화가 왔다고 한다.
이병수가 오늘의 일정에 대해 설명해 주는 와중에도 케이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 채 겨우 눈만 뜨고 있었다.
서도화가 손을 뻗어 케이를 쿡 찔러 깨웠다. 그제야 케이가 겨우 이병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것 봐라?’
머릿속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만 가득하니까 저런 상태가 되는 것 아닌가.
한 소리 해줘야겠다 서도화가 다짐하던 차 옆에서 난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한야가 복잡한 얼굴로 케이를 보고 있었다.
“케이는 아직 그룹에 애정을 못 붙인 모양이야.”
서도화는 대답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그런가 봐.”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케이뿐만 아니고 그냥 보통의 연습생, 아이돌 중에서도 자신의 그룹과 이 일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꽤 있었다.
원래 배우 지망이었는데 소속사의 권유로 아이돌이 된 멤버, 그냥 캐스팅이 되었으니 얼떨결에 아이돌이 된 멤버.
쫓아다니면서 설득하는 캐스팅 매니저도 있는 판국에 케이처럼 얼굴만 잘생겼지, 열정도 실력도 없는 멤버가 없을 리 없다.
그래서 한야나 주상현, 다른 스태프들도 케이를 보며 뭐 저런 게 있나 황당해하지는 않았다.
사실 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흔한 어부지리 멤버라도 제 그룹으로 들이면 꽤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사람 아니겠는가.
서도화가 말없이 케이를 보고 있자 한야가 작게 중얼거렸다.
“케이가 그룹에 정 붙일 방법이 없을까. 조금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한야의 말에 서도화도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잠시 열심히 잘한다 했더니 밀리언 아이돌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느슨해졌다.
마치 이 정도면 충분히 협조한 것 아니냐는 듯. 이젠 함께 있어 주며 방송에 출연해 인간인 척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협조하고 있다는 듯.
사실 애써 미루고 있었을 뿐이지 원래 세계로 돌아갈 희망이 있는 한 ‘계속 여기서 살고 싶으면 협조하라’는 말로 활동을 이어가는 건 한계가 있다.
‘그것보다 더 좋은 미끼가 뭐 없을까?’
케이가 어떻게든 여기에 정을 붙일 수 있을 만한…….
“……아.”
“아?”
서도화의 탄성에 한야가 그를 바라보았다. 서도화가 옅게 미소 지었다.
“형.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어?”
딱 하나 생각난 방법이 있다. 정확히는 그룹이 아니라 팬들에게 애정을 붙이는 방법이지만 어쨌든.
똑똑.
“어메스 이동합니다!”
그때 제작진이 대기실에 고개를 빼꼼 내밀어 녹화가 시작됨을 알렸고 멤버들은 앞장서는 이병수를 따라 녹화가 진행될 무대 뒤로 향했다.
“우와아아아!!!”
팬들의 환호 속에 무대 위로 등장한 멤버들은 새삼 다시 쑥스러워하며 나란히 섰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둘, 셋!”
“난장판으로 놀아보세! 안녕하세요! 어메스입니다!”
멤버들의 인사에 잠시 조용해졌던 스튜디오 안은 다시 함성으로 가득해졌다.
서도화는 씨익 웃으며 팬들에게 손 흔들어주고 서둘러 대형을 맞춰 섰다.
“오랜만이에요~”
이미 사전녹화에 무척 익숙한 주상현의 친밀한 인사를 끝으로 긴 시간 녹화가 시작되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메스였습니다!”
새벽부터 시작된 사전녹화가 끝이 났다.
틈틈이 메이크업, 헤어 수정을 했기에 멤버 모두 겉보기엔 이제 막 무대에 선 것처럼 뽀송했지만 사실 의상 속은 땀이 흥건했다.
“여러분 정말 고생 많았어요!”
“감사해요!”
“얼른 들어가서 밥 먹어요. 오늘 감사해요!”
“생방 때 봐요!”
멤버들은 어메스보다 더 피곤한 고행이었을 팬들에게 한 마디씩 감사 인사를 하고 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이병수는 멤버들이 밑으로 내려오자마자 제작진들에게 인사시키랴 등 떠밀어 이동시키랴 무척 정신없어 보였다.
“얘들아 고생했어. 들어가면 알지?”
“네, 오늘의 아이돌 촬영.”
“잘하자!”
중요한 무대녹화는 끝이 났지만 아직 어메스의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멤버들이 서둘러 대기실에 들어서자 각종 소지품과 담요, 의상 등으로 지저분하던 대기실이 그새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우와 뭐야. 엄청 깨끗해졌어.”
주상현이 너스레를 떨며 장난치자 스태프들 중 가장 대기실 어지럽히기를 잘하는 로드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두 사람이 머쓱하게 웃었다.
“얘들아! 얘들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놀아! 자연스럽게 있어! 지금 출연진들 주차장에 도착했다고 하거든?”
제일 많이 긴장한 듯한 이병수가 대기실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쳤고 그에 맞춰 스태프들은 구석으로 숨기 시작했다.
서도화는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대충 거울을 보는 척했고 케이와 아덴은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대기실을 살피다 서도화의 양옆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자연스러움을 연출하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 여기다. 여깁니다. 잠만, 일단 이름 가려.”
“오케이.”
“자 여러분 여기가 바로 오늘의 게스트가 있는 곳입니다. 누구게~요!”
문밖에서 오늘의 아이돌 진행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기실 안이 더욱 조용해졌다.
“오늘의 게스트가 누구인지 힌트 한번 주시죠.”
“음~ 일단 아~주 건방져요.”
“건방져요? 뭐가 건방지죠?”
능글스럽게 어메스를 건방지다 평하는 진행자의 목소리에 멤버들이 단체로 움찔했다.
“감히 말이죠. 저희가 대선배잖습니까?”
“오오, 우리가 대선배다?”
“네, 맞잖아요. 그런데 감히 어? 우리가 직접 찾아오게 만들어? 라떼는 말입니다. 신인이 방송에 출연하다. 그라면 마! 하루 전에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어? 인사 딱 하고!”
“예끼! 이 사람아! 당신 그러다 큰일 나! 말 조심해야 해요. 얼마나 인기 많으신 분들인데!”
문 앞에서 한참이나 진행을 이어가던 진행자들이 겨우 문고리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작을 멈춘 채 문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멤버들이 다시 인위적인 자연스러움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대기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카메라와 진행자들이 가득 들이닥쳤다.
“오늘의 게스트 공개합니다!”
“예에! 어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