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케이는 워딩을 고르는 것치고도 고민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고민하나.
서도화도 팬들도 모두 같은 호기심을 안고 케이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노래가 참으로 귀에 남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래 소리가 참으로 거슬렸다.
“옛날에도 도화는 줄곧 노래를 자주 부르곤 했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부르는 노래가 참으로 거슬렸다.
“그래서 다가갔습니다.”
그래서 접근했다.
“친해지고 싶어섭니다.”
어떻게든 조져 놓으려고.
“처음엔 꽤 긴장했습니다. 도화의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아서.”
마왕인 걸 들킬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음유시인의 주변엔 늘 아덴과 동료들이 있었으니.
“그러나 막상 다가가니 무척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저를 많이 챙겨주었어요.”
서도화가 케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다행히도 그간의 아이돌 생활로 조금의 눈치는 생겼는지 진짜 첫 만남이 아닌 동료로서의 첫 만남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랬었다. 동료였던 시절만 해도 케이를 정말 많이 챙겼다. 아덴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케이도 그것만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배은망덕한 놈.’
서도화가 고개를 돌려 다시 채팅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채팅을 확인하느라 케이의 표정이 조금씩 진지해짐을 알지 못했다.
“말수가 적은 저에게 계속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그랬… 었습니다.”
케이는 한참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인생의 마지막 온기였습니다.”
어찌보면 그때가 마왕이었던 케이가 그 세계에서 느꼈던 마지막 온기였다.
당연히 그때는 그들을 속인다는 생각으로 어울렸으니 그걸 온기라고 느끼지 않았지만.
…그걸 왜 이제 와서 온기라고 느끼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오오.”
서도화가 반응이라기도 뭣한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케이의 진지한 표정을 새삼 보게 된 건 둘째치고, 미사여구를 떠나 저게 케이가 자기 얘기를 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좋은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마왕이? 나에게?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마지막 온기라고까지 말한다고?
‘진심인가?’
“와. 그렇게까지?”
서도화는 뚫어져라 케이의 표정을 뜯어보았지만 케이는 끝까지 서도화를 쳐다보지 않고 말을 끝마쳤다.
상당히 묘한 분위기가 되었지만 카메라엔 케이가 민망해 서도화를 쳐다보지 못하는 정도로 보일 것이다.
서도화는 매우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 질문을 마무리지었다.
“네, 케이는 저를 그렇게 느꼈다고 합니다. 아, 그리고 채팅에-”
도화는 그 이후로도 케이와 대화를 나누며 중간중간 팬들의 질문을 캐치해 대답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쯤 드디어 도화가 원하던 질문이 채팅창에 등장했다.
-팬명은 언제쯤 나와요?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도화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채팅창에 팬분들 이름은 언제 정하냐고 물으시는데, 그러게요? 저희 언제쯤 나올까요?”
서도화가 능청을 떨며 케이에게 묻자 케이가 화들짝 놀라다 그걸 나한테 왜 묻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서도화는 예상한 답변이라는 듯 다시 화면을 보며 말했다.
“사실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저희도 여러모로 어떤 이름이 좋을지 열심히 고민하고는 있는데.”
서도화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음…….”
그러다 획 케이에게 물었다.
“야, 너는 만약에 네가 팬분들 이름을 정한다면 뭘 할 거 같아?”
이렇게 묻는다면 케이는 촬영 인터뷰때에 말했던 답변을 그대로 말할 거다.
서도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케이클랍스.
“나 말인가? 난 당연히 케이클랍스다.”
서도화가 활짝 웃었다.
“오오, 케이클랍스. 좋은데?”
“……어? 진짜인가?”
“어 진짜 좋은 듯.”
서도화는 당황하는 케이에게 진짜 친구가 쓸 법한 말투로 대답해주며 엄지를 추켜들었다.
케이는 무척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용사 파티의 일원인 음유시인이 케이클랍스를 좋다고 말한다고?
만약 아덴이 이 꼴을 봤으면 배신자니 뭐니 화를 내며 날뛸 것이다.
케이클랍스는 마족의 소굴, 마왕의 영역.
마왕의 상징이었으며 그 세계의 인간들에겐 욕으로 쓰이는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곳을 음유시인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기쁘다기보단 무척 당황스러웠다.
……물론 이는 서도화의 권모술수였다.
권모술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물론 서도화는 그 세계에서의 일을 잊지 않았다.
서도화에게도 케이클랍스는 듣기만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그런 장소였다.
하지만 저 사이코 같은 마왕에겐 케이클랍스가 최고로 깊은 애정이 담긴 장소였다.
비록 자신과 아덴에게는 욕이었지만 마왕에게는 욕은커녕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포근하며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그런 장소였을 터.
‘아니 뭐. 부르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아무리 찝찝하고 불쾌해도 팀에 동태눈깔 멤버 하나 생기는 것보다는 자신이 참고 버티는 게 낫지 않겠는가.
아! 아이돌하기 겁나 힘들다!
서도화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을 꾹 참고 웃었다.
“여러분 케이클랍스가 뭔지 아세요? 모르시죠. 너 이거 뜻 팬분들한테 말한 적 있어?”
도화의 물음에 케이가 냉큼 대답했다.
“케이클랍스는 나의 소유라는 뜻이다.”
“맞아. 너의 소유라는 뜻이지.”
도화가 케이에게 수긍해주곤 팬들에게 말했다.
“케이클랍스는 저희 어릴 때 저희끼리 쓰던 암호 같은 건데요.”
서도화 자신이라고 팬들 앞에서 거짓말하고 싶진 않다. 최대한 솔직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 곁에 있는 건 다른 세계에서 온 정신 이상한 마왕, 그리고 용사인 것을.
대충 어릴 적 친구라고 얼버무리길 잘했다. 케이와 아덴에게서 어떤 말이 튀어나오든 어릴 적 우리끼리 쓰던 말이라는 등으로 얼버무릴 수 있으니.
“클랍스라는게 ‘소유’, ‘물건’이라는 의미였어요. 앞에 누구 이름이 들어가냐에 따라 달라지는. 케이클랍스는 케이의 것, 도화클랍스는 도화의 것. 뭐 이런 식으로 썼었지?”
케이는 뭔 헛소리를 하나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서도화가 그렇다고 말하라 강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하, X발…….
케이클랍스를 이따구로 포장해야 한다니.
그것도 피해자 중 한 명인 자신이!
도화는 갑자기 울컥 형용할 수 없는 억울함을 느꼈지만 속으로 삭였다.
그래, 어차피 이깟 억울함은 그 세계에서 수천 번도 더 겪어봤으니까.
그 수많은 억울함을 견디고 간신히 이곳으로 돌아와 데뷔했는데 같은 멤버인 케이 이 새끼를 동태눈깔 아이돌로 만들 수는 없었다.
서도화는 여전히 웃으면서 채팅창을 확인했다.
케이클랍스의 의미를 알게 된 팬들은 케이클랍스에 무척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여기까지도 서도화가 원하던 반응이다.
그러나 당연히 케이클랍스를 팬명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미쳤다고 마왕의 영지명을 팬명으로 정하겠는가.
서도화는 케이와 팬들의 반응에 동조하면서도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케이클랍스는 너무 우리만 알고 있는 그런 거라 좀 힘들지 않겠냐?”
“……그건 그렇다만.”
케이는 무척 아쉬운듯 하면서도 순순히 인정했다. 아마 서도화가 케이클랍스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아 이번엔 그럭저럭 협조해줄 마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케이클랍스. 여기선 어떻게든 포장했다만 원래 뜻이 좋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어메스 멤버들, 그리고 이 방송을 편집본이라도 본 팬들이 아니고서야 모르는 단어인 점, 직접 소리 내어 읽었을 때 그다지 예쁘게 들리지 않는 점 등 진짜 팬명으로 쓰기엔 영 아닌 단어였다.
그럼에도 도화가 케이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여기까지 대화를 이끌어나간 이유가 있었다.
“팬명은 모르겠고 우리끼리 애칭으로 부르는 건 어떨까?”
“애칭?”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채팅창을 살폈다.
-나는 케이클랍스 좋은데… ㅠ
-케이클랍스 말고 다른 암호도 알려줘!
-ㅠㅠ아쉽지만 팬명으론….
-오 좋다
-애칭 좋다
-애칭 케이클랍스 너무 좋아요!♥♥♥♥
다들 의미는 좋다 하면서 팬명으론 에이 설마 케이클랍스가 되겠어? 애매한 반응이더니 애칭으로 우회하자마자 너무 좋다는 채팅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반응을 원했다!
서도화가 씨익 웃으며 케이를 보았다.
“팬들이 애칭으로 케이클랍스 좋대. 어때?”
말없이 한참이나 채팅으로 올라오는 ‘케이클랍스’란 단어를 쳐다보던 케이가 옅게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말엔 어마어마한 힘이 있어서 없던 애정도 애칭으로 부르다보면 생기기도 하는 법.
케이는 앞으로 팬들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단어로 부르며 저도 모르게 사랑하게 될 것이다.
‘팬들에게 애정이 생기면 팬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려 하겠지.’
서도화가 아는 마왕 케이는 자신의 영지, 자신의 부하 등등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거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사는 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