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어떻게, 오늘 오시는데 차는 안 막히던가요?”
두 사람이 의자에 앉자 김혜원 교수가 따뜻한 말을 건네며 잘 우려진 차를 건네주었다.
취미가 차라서 이런 컨텐츠가 만들어졌다고 하던가?
그래서 그런지 차 맛이 상당히 좋았다.
도화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와 맛있네요. 차는 좀 막히긴 했는데 일찍 나와서 다행이었어요.”
그러곤 아덴은 엄지로 가리켰다.
“얘는 잔다고 막히는지도 몰랐을 걸요?”
“맞아요.”
아덴이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혜원 교수를 하하 크게 웃으며 아덴의 한쪽 볼을 가리켰다.
“어쩐지! 여기, 아, 메이크업 때문에 아마 화면 상으로는 안 보이겠지만 자세히 보면 아직 살짝 찍힌 자국이 남아있어요. 아주 푹 주무셨나 보네~”
아덴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제 볼을 건드렸다. 그러곤 도화를 따라 말했다.
“차 맛있네요. 교수님.”
“아유~ 어린 친구들이 어쩜 이렇게 예의가 바를까!”
아덴과 예의는 붙일래야 붙일 수 없는 관계였지만 사전 사회화 교육을 잘 시킨 덕분인지 김혜원 교수는 그를 예의 바르다 느낀 모양이다.
‘첫인상은 그래도 잘 잡혔겠네.’
정말 다행이었다.
김혜원 교수는 가벼운 토크를 이어나가다 손뼉을 착 치곤 말했다.
“아참! 여러분 이번에 데뷔곡 너어무 잘 듣고 있어요.”
“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방송에서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저희 딸이 진짜 팬이라서, 데뷔 전에 그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했었죠?”
“아, 맞습니다. 밀리언 아이돌.”
“맞아요. 맞아요. 밀리언 아이돌! 엄청 열심히 보더라구요.”
도화가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감격한 듯 말했다.
“그때부터요?”
“네! 덕분에 저도 어메스 분들 딸이랑 같이 응원하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요! 56번이었죠?”
“네!”
56번.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데뷔 전 56번이란 이름을 달고 작은 소속사에서 번호가 아닌 제대로 된 이름 한번 불려보겠다고 갖은 노력을 다했었는데.
번듯하게 우승하여 데뷔하다니 새삼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 지금은 무려 56번이었던 시절부터 응원해준 사람을 만나는 거니 더더욱 기뻤다.
서도화가 웃자 아덴도 그를 힐 끔보곤 따라 미소 지었다. 이게 바로 아덴식 ‘눈치 봐서 따라 하기’ 사회화 교육이다.
“그래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어메스 분들은 아직 데뷔한 지~ 얼마나 됐죠?”
“한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
“일주일? 아이고 이 얼마나 파릇파릇한!”
좋을 때다~ 김혜윤 교수는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그리우면서도 멤버들을 귀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직 데뷔 후의 추억보단 데뷔 전의 추억이 더 많겠네요?”
그러곤 자연스럽게 데뷔 전 이야기를 소재로 진행을 시작했다.
“저는 어메스의 팬으로서, 그, 뭐라고 하지? 케이클랍스?”
움찔.
도화와 아덴이 동시에 멈칫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들끼리 부르는 애칭이에요.”
“아 이게 정해진 팬 이름이 아니고요?”
“네, 진짜 팬 이름은 누가 봐도 예쁘고 의미 있는 걸로 하고 싶어서, 지금 멤버들이랑 소속사 분들이랑 열심히 고민하고 있어요.”
“어머어머, 빨리 정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우리 딸이 맨날 자기는 케이클랍스라고 자기 이름처럼 사용하고 다니길래 처음엔 무슨 게임 용어인가? 생각했거든요.”
“네에, 비슷해요. 하하. 암호 같은 거라.”
“그러니까. 물어보니까 어메스가 부르는 애칭 같은 거라더라고.”
도화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웃음이 조금 씁쓸해 보이는 건 전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양심에 좀 많이 찔렸다.
물론 케이가 현 세계에 정을 붙여 죽어버린 열정을 조금이라도 되살리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었지만, 아무리 팬들이 그 뜻을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도 진짜 의미는 마왕의 소굴이다 보니…….
이따금 팬들이 행복하게 이 애칭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 오곤 했다.
“그럼 케이클랍스는 어떤 의미로 나온 애칭이에요? 찾아보니까 진짜로 있는 단어는 아니더라고.”
“네, 저희끼리 어릴 때부터 사용하던 비밀암호인데 클랍스가 소유라는 뜻이에요.”
“그럼 케이클랍스는?”
“저희 어메스 멤버 중 케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케이의 소유라는 뜻이에요. 그 친구가 지은 이름이라.”
“어머, 케이의 소유라니. 그 멤버 분 굉장히 로맨티스트인가보다~”
“하하.”
“그럼 방금 어릴 때부터 사용하던 암호라고 했는데 제가 듣기는 들었거든요? 누구랑 누구가 소꿉친구라고 하던데.”
김혜원의 질문에 지금까지 도화에게 대답을 맡기고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던 아덴이 자신과 도화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친구요.”
그러자 도화가 하하 웃으며 아덴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케이랑 같이 셋이 소꿉친구예요.”
“와~ 너무 신기하다~ 그럼 소꿉친구 셋이 같이 데뷔한 거예요? 엄청 소중한 인연이다.”
“저희도 되게 신기했어요.”
도화는 처음 아덴과 케이는 회사에서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렸다.
참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빌어먹게 신기했다.
“케이는 해외에서 살던 친구라 몇 년 동안 못 만났었거든요.”
“아덴은 그래도 종종 만났지만 살던 곳이 달라서 고등학교 올라간 이후론 거의 못 봤고.”
혹시나 로건 리가 고등학생 때 무슨 사건이 있을 걸 대비해 고등학생 때는 잘 만나지 못했다고 말해놓는 게 좋겠지.
아덴의 도플갱어인 로건 리가 18살에 14살까지 캘리포니아 살다가 돌아왔다고 하니 이렇게 말하면 대략 시기가 맞을 것이다.
“너어무 궁금하다~. 멤버 모두 첫만남이 어떻게 돼요? 어떻게 친구로 만났고 어떻게 동료로 만났고 그런 거.”
김혜원 교수는 그나마 대답을 쭉쭉 잘 하는 도화를 보며 질문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는 어… 그래도 꽤 인연 있는 사람들이랑 데뷔를 하게 돼서.”
“제가 듣기로는 원래 엄청 큰 회사의 연습생이었다고 하던데?”
“맞아요. 거기서 연습하다가 한야, 저희 리더 형을 만났고 사정이 있어서 그만둔 이후에 지금 저희 소속사 사장님께서 연락 주셔서 가봤더니 거기 한야 형이 떡하니 있더라고요.”
도화는 차분히 멤버들과 지금의 소속사에서 처음 만났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아덴과 케이와의 만남엔 많은 거짓을 섞어 말해야 했지만, 처음 소속사에서 만나게 되었을 땐 너무 갑작스러워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는 등 그 당시의 막막한 심정은 솔직하게 말했다.
“와 그럼 소꿉친구인 세 분도 누가 소개해주고 같이 왔다가 같이 캐스팅되고 같이 오디션 보고 이런 게 아니고 그냥 따로따로 연습생이 된 거예요?”
“네.”
“우연히 같은 소속사에 있었던 거고?”
“네네. 맞아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너무 신기한데?”
“저도 놀랐어요. 아덴이나 케이나 평소 TV도 안보고 이런 연예계에 관심이 없던 친구들이라서.”
TV는커녕 그런 게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에서 살던 놈들이다. 서로 조금이라도 강한 힘을 길러 서로를 쓰러트리기 위해 노력했지 설마 무대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차라리 평소 흥도 많던 하이넬이 더 아이돌에 가깝지.
“몇 년 새에 무슨 바람이 들었나. 정말 놀랐어요.”
거기다 대한민국에 소속사가 얼마나 많은데 이제 시작한 자그마한 회사에서 만나는 건 어지간한 인연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상현이는 연습생으로 들어와서 친해졌고요.”
“그렇구나. 진짜 운명이다. 소꿉친구가 각자 다른 곳에서 캐스팅돼서 같은 그룹이 되다니! 아덴 씨는 어땠어요? 멤버들끼리 첫 만남.”
도화가 아덴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건 도화도 궁금해하던 것이다.
지금과는 달리 전혀 사회화가 되지 않았던 아덴과 케이는 과연 멤버들과 어떻게 만나서 적응하고 있었던 걸까?
아덴은 잠시 생각하다 도화를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저는 도화랑은 다르게 전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어요. 제가 굉장히 경계심도 많고 그랬었는데 한야 형이랑 상현이, 대표님이 많이 챙겨주셨어요.”
“아, 저희 소속사 대표님을 말하는 거예요.”
“……맞아요. 저희 대표님. 아무튼 소속사 분들도 멤버들도 너무 착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라 별 어려움 없이 적응했어요.”
어려움은 아덴이 아닌 케이에게 있었지만 그건 뭐, 넘어가고 묻어두자…….
“정말로 제가 보기에도, 물론 저는 어메스 분들의 모든 걸 아는 건 아니겠지만 이렇게 방송으로도 보고~ 하다 보면 다들 참 착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넘치는 그룹이구나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만나서 그룹으로서 밀리언 아이돌에 참가했군요.”
김혜원 교수는 자연스럽게 데뷔 전 첫 만남 이야기를 꺼내며 밀리언 아이돌로 화제를 넘겼다.
“밀리언 아이돌. 저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메스 분들을 처음 알았거든요? 그때, 도화 씨의 끝내주는 보컬 실력과 멤버들의 아크로바틱, 댄스가 상당히 화제가 되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