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제가 밀리언 아이돌에서 56번, 어메스 분들을 보면서 느꼈던 첫인상은 멤버들끼리 굉장히 사이가 좋다. 서로 되게 배려가 좋다는 거였거든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특히 도화 씨가 피곤해서 밥도 못 먹고 잠들었을 때 멤버들이 도화 씨를 깨우지는 않고 대신 받은 간식 침대에 올려주고 연습하러 가거나 하는 그런 장면들.”
“아 맞아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라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던 그때. 침대에 잔뜩 쌓여 흘러내리던 간식을 봤던 때가 유일하게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멤버들의 조용한 배려가 느껴져 꽤 기뻤었지.
도화는 그때를 떠올리며 살풋 웃었다.
하도 고생했던 터라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이제 생각하면 꽤 좋은 기억도 많았다.
특히 데뷔 전 멤버들에 대해 많이 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고.
“그때 저희는 사실 이제 막 결성된 그룹이었거든요.”
“오 그래요?”
아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성되고 며칠 안 돼서 바로 우리 경연 프로그램 신청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었어요.”
김혜원이 깜짝 놀라며 하하 웃었다.
“엄청 당황스러웠겠는데?”
“네, 엄청요.”
도화가 격하게 수긍했다.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당시엔 이게 제대로 굴러가는 회사가 맞는지까지 의심했었다.
아마 유제이에 먼저 들어와 있던 연습생이 한야와 주상현이 아니었더라면 서도화는 아덴을 데리고 회사에서 도망 나왔을 것이다.
김혜원은 더 길게 대답해달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서도화를 쳐다보았다.
“저희는 그때 진짜 막 결성된 그룹이고 사실 다들 이 회사에서 연습한 기간도 그리 오래 되진 않았었거든요.”
아덴이 도화를 가리켰다.
“얘는 진짜 막 들어왔을 때예요.”
다른 멤버들은 그래도 몇 달 정도는 연습하며 유제이에 적응한 상태였다. 반면에 서도화는 이제 막 들어와 트레이너들에게 눈치받고 있을 때였고.
이제 생각하면 유제이의 대표 김유진이 참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싶었다.
이제 막 결성된 이들의 무엇을 믿고 그 큰 경연 프로그램에 내보낼 생각을 한 걸까.
“그럼 약간 아, 우리는 아직 얼마 안 됐을 테니까 이번에는 좀 피하고 다음에 도전하자. 막 이런 생각이 들 법도 한데. 바로 경연에 참여했어요. 그죠?”
“네. 대표님께서 너희는 할 수 있다고. 우승까지는 바라지 않아. 이름만 알리고 오자! 라고 힘껏 밀어주셨어요.”
“대표님도 대단하시네요. 여러분들을 상당히 신뢰하셨나 보다. 우리 애들은 잘될 거라고.”
“많이 믿어주셨어요. 그리고 저희에게도 되게 좋은 시간이었어요.”
오합지졸로 모여서 서로에 대한 성격조차 모르던 멤버들이 경연을 계기로 굉장히 가까워졌으니까.
이들이 밀리언 아이돌 내에서 조금씩 친해지는 과정은 팝넷 측에서 [우리 친해졌어요: 어메스식 애정 쌓기]라는 너튜브 영상을 통해 팬들에게도 공공연히 보여질 정도로 분명히 티가 났었다.
“맞아요. 보는 내가 다 흐뭇하고 그렇더라고. 도화 씨가 케이 씨 안무 봐주는 것도 그렇고 모두 새벽까지 남아서 같이 연습하는 것도 참 재밌게 봤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케이 씨가 파트 따냈다고 울 때엔-”
김혜원은 자신이 방송을 통해 봤던 멤버들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밀리언 아이돌에 관련한 비화를 이끌었고 그 이후 자연스럽게 데뷔 이후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번 데뷔 타이틀 곡 이름이?”
“네, 크레센도라는 곡입니다.”
“소개 한번 해주세요.”
“넵! 라틴팝풍의 곡이고 어메스만의 유니크한 분위기와 열정적인 가사가 무척 매력적인 곡입니다. 어메스의 자랑인 아크로바틱 댄스와 음색이 무척 좋으니 한번 들어봐 주세요! 또 저희의 첫 세계관 스토리가 들어간 뮤직비디오도 무척 공들여 준비했으니 이쪽도 봐주시면 무척 감사드리겠습니다!”
서도화가 말을 마치자마자 세트장 바깥 스피커에서 크레센도가 들려왔다.
도화와 아덴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세트장 한가운데로 자리 잡고 춤을 췄다.
“와! 갑작스럽게 틀었는데도! 역시 금방금방 안무로 들어가네요?”
김혜원이 감탄하며 덩달아 일어나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쳐 주었다.
자다가도 노래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 춤출 정도로 연습을 했다 보니 사전에 조율 없이 갑작스레 음악을 틀어도 바로 튀어 나가 안무를 맞출 수 있었다.
서도화는 춤을 추며 아덴을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짜식!’
이제 어느덧 용사티를 벗고, 벗어도 될 걸 벗은 게 맞나 걱정되긴 하지만… 어쨌든 아이돌처럼 능숙하게 춤을 추고 있다.
그렇게 하이라이트 부분의 춤을 짧게 추고 아덴은 힐끔 신난 김혜원 교수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갑자기 뛰어올랐다.
우와아아!
김혜원 교수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켜보던 제작진들마저 생각보다 높이 올라가는 아덴의 텀블링에 놀라 감탄사를 쏟아냈다.
서도화가 픽 웃으며 춤을 멈췄다. 이렇게 시선이 모인 곳에서 왜 텀블링 안 하나 했다.
저 정도면 천상 아이돌 아닌가?
서도화는 저도 모르게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이돌은 무슨, 마족을 서슴없이 썰어재끼던 저놈은 다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용사 시켜야 한다.
아덴은 도화에게 불곰 같은 존재였다.
순하고 잘 따르고 얼핏 얌전한 듯 보여도 한번 피 맛을 보면 금세 공격적으로 변해 사람을 씹어먹는 불곰.
물론 아덴은 사람을 씹어먹진 않겠지만 아무튼 같았다.
짝짝짝. 박수 세례 속에 짧은 공연을 마친 두 사람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노래 너어무 좋다! 분명이 1위 할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니, 1위 아니라도 그냥 많은 분들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솔직하신 두 분 너무 재밌으세요. 어쨌든! 크레센도로 데뷔하게 된 어메스인데요. 듣기론 어메스라는 그룹명에도 비화가 많다고 들었거든요?”
“아, 네. 맞아요.”
“이건 저도 저희 제작진 분에게 들은 소문인데 어메스, 밀리언 아이돌 끝나기 직전까지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이 정도 질문이면 아덴도 충분히 대답할 수 있겠는데?
아덴은 이병수가 시키는 대로 대답을 자신에게 맡긴 채 유독 말수가 적었다. 물론 방금의 춤으로 분량을 좀 가져가긴 했겠지만 그래도 착실히 대답하는 모습을 보여줄 타이밍이었다.
서도화가 툭 아덴의 옆구리를 찌르자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네, 사실입니다. 좀 민망하긴 한데, 솔직히 저희 회사 직원들, 멤버들까지 포함해서 작명 센스가 없어요. 진심으로.”
“맞아. 진짜 좀 심해요. 이거.”
서도화가 극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솔직한 발언에 제작진 쪽에서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너무 이상한, 아.”
아덴이 말을 하다 말고 슬쩍 이병수의 눈치를 보자 이병수는 무척 흐뭇한 표정으로 계속 말하라 신호보냈다.
아덴이 당당히 말했다.
“부장님한테 화가 날 정도로 막 이상한 후보들만-”
역시 예능은 아덴이 더 잘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솔직하게 회사 부장급 인물을 디스하는 신인 아이돌.
대형기획사, 아니 대형이 아니라도 어느 회사라도 갓 데뷔한 아이돌이 임원에게 화를 내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 거다.
누군가는 건방지게 볼 것이고 누군가는 유쾌하게 볼 것이고.
아덴만이 가진 독특한 캐릭터에 제작진들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덴은 이때다 싶었는지 그때의 답답한 상황을 막 내뱉기 시작했다.
“심각한데? 이런 이름이면 우리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다들 그렇게 생각해서 계속 뒤로 미뤘죠. 그러다 보니까 시간은 흐르고.”
“아니 도대체 어떤 이름이었길래?”
“사사오입.”
서도화가 잠시 잊고 있었던 그 이름을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악동가도, 케이파이브도 있었고요. 돌격청년, 트루바드, 펜타스틱 뭐 이런…….”
“허허…… 심하긴 심하네?”
그 사람 좋은 김혜원 교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말문이 막힌 채로 그저 웃었다.
서도화가 뒤늦게 이병수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근데 뜻은 하나같이 좋았어요. 부장님이 저희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고 진짜 좋은 뜻으로 말씀하신 건데 센스가 없으신 것뿐이에요.”
“아 착한 분인데 센스가 없으시다~”
서도화는 필사의 사회생활을 하는 중인데 왜인지 제작진 쪽에서 다시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덴이 서도화를 뒤로하고 말문이 터진 것처럼 또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방송에서 이제부터 탈락자들은 그룹 이름을 밝힌다는 규칙이 나와서 그제야 부랴부랴.”
“이때도 또 많이 다퉜어요.”
“왜 싸우셨어요?”
“케이가 자꾸 케이파이브 하자고 고집을 부려서 아덴이 케이파이브 할 바엔 한야파이브 하자고 하는 바람에.”
“아니 그래서 싸웠다고?”
아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어요.”
결국 김혜원 교수마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서도화는 이제 슬슬 이 화제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 아덴의 입을 막고 말했다.
“그래서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저희끼리 막 다투는 와중에 저희 대표님이 난장판이 따로 없다고 a mess. 어메스로 지으신 거예요.”
아이돌치곤 상당한 일화가 담긴 그룹 이름이었다.
김혜원은 한참 웃곤 어메스의 이름부터 데뷔 당일의 이야기 등 부수적으로 짧게 토크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서도화의 찻잔이 빈 잔이 되고 김혜원 교수가 이를 다시 채워줄 때쯤, 방송상으로는 2부.
그리고 이 방송의 주 컨텐츠라고 할 수 있는 질문이 돌아왔다.
“그럼 다음은, 여러분들의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심리상담가 김혜원의 심도 있는 심리상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