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곤혹스러운 시선들이 오간다.
마치 꼭 해야만 하는 특별과제를 서로에게 미루는 것처럼 다들 눈치만 보며 입을 다물었다.
아까의 열정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며 눈을 빛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사실 다들 생각해둔 이름들은 있을 것이다. 다만 팬들을 부르는 이름이니만큼 제 의견을 내는 게 무척 부담스러울 뿐.
예전 그룹 이름를 정할 때와 별반 차이 없는 광경이라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미 배는 띄워져 있어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어메스는 데뷔했고, 그에 맞춰 얼른 팬들이 만족할만한 팬 명을 정해 발표해야만 했다.
계속 팬들과 멤버들밖에 모르는 케이클랍스를 애칭으로 둔 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지…….’
직원들과 멤버들 모두 더는 미룰 수 없는 난제 앞에 난감한 기색이었다.
유제이는 대체로 일을 잘하지만 이런 디테일하게 팬들을 챙기는 부분에서 소형기획사임이 크게 티가나곤 했다.
김유진이 입을 열었다.
“다들 생각해둔 건… 있죠? 의견 있으면 말해봐요. 아, 혹시 부장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다는 건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는 말씀이실까요?”
직원들은 별 기대 없는 눈으로 부장을 쳐다보았다.
부장은 움찔거리며 놀란 표정을 짓다 이내 흐음, 고민하기 시작했다.
팬의 이름을 정하는 데엔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팬과 아티스트 사이의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짓던가 아니면 아티스트의 이름에 조합이 되는 이름을 만들어내던가.
20세기의 감성파 사사오입 김부장의 선택은 당연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짓는 쪽이었다.
“어메스가 난장판이라는 뜻이니까 팬들 이름은 악동 어때요? 악동. 난장판 안에서 함께 노는 친구들이라는 뜻으로. 아니면 아수라. 함께 난장판을 만든다는-”
“네, 잘 들었습니다.”
김유진이 정색하며 말을 막았다. 그럼 그렇지. 작명 센스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팬들에게마저 사사오입이라 불리는 부장이다.
기본적으로 가져오는 이름들이 대부분 너무 올드해 쓰기 힘든 수준이었다.
“하하, 전 그것도 좋은 것 같아요.”
한야의 영혼 없는 말이 부장을 두 번 죽이고.
“오 부장님 악동이라는 거 되게 좋아하시네요.”
“어? 내가?”
“맨날 악동 들어간 이상한 아이디어 내시는 거 케이가 케이파이브에 집착하는 거랑 같은 맥락 아닌가? 근데 악동이 무슨 뜻이에요?”
사회생활 따윈 모르는 아덴이 그를 아무렇지 않게 디스하며 세 번 죽였다.
사사오입 부장은 머쓱해 하며 웃었다.
“하하, 그냥 사고뭉치 뭐 그런 느낌이지.”
라떼는 밴드 이름에 악동 정도는 들어가 줘야 반항아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이야~.
사실 사사오입 부장 또한 뭔가 깊게 생각해 팬 명을 정하자고 했다기보단 정말 시간적으로 이제 슬슬 정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말한 것뿐이었다.
“자자, 내 의견은 어차피 묵살될 줄 알고 있었고. 다들 생각한 거 있으면 말해봐요.”
“어…….”
“부끄러워하지 말고. 뭘 말해도 내가 낸 악동이나 아수라보단 좋은 의견이겠지.”
부장이 농담처럼 하는 말에 직원들은 그제야 조심스레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사실 대표님께서 생각 좀 해두라고 해서 생각해놓긴 했는데-”
“헉 저도요.”
“저두.”
그래서 나온 의견들은.
1.드리머
-함께 꿈을 꾸자
2.용사, 동료
-아덴의 의견
3.블랙
-어메스만의 악동 이미지에 맞는 색을 팬 명으로
4.케이클랍스 유지
그 외에 빛, 어메이징 등등 별별 의견들이 다 나왔지만 이건 김유진 선에서 다 정리되고 네 가지 의견만이 남았다.
그러나 의견이 정해졌으니 이제 선택만 하면 됨에도 사람들은 조용했다.
‘과연 이게 최선일까?’
정말로?
팬 이름을 드리머, 용사, 케이클랍스, 블랙 따위로 지어도 되는 걸까?
‘안 될 것 같은데?’
다들 팬 명에 의미를 담느라 정작 이름 자체가 그리 예쁘지는 않다.
적어도 서도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백번 양보해서 그래. 드리머 정도는 그렇다 치자.
다른 것들은 솔직히 왜 김유진이 자르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케이클랍스는 팬들이 워낙 좋아하니 남겨둔 것 같긴 한데 인간적으로 용사, 동료는 좀 아니지 않나?
서도화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남이 가지고 온 의견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냥 스스로 생각해서 의견을 내보는 거다.
“흐음……다른 의견은 없고요?”
김유진은 제발 있었으면 하는 말투로 물었다.
서도화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고요. 어때요?”
“응? 고요?”
김유진과 직원, 멤버들은 그건 또 무슨 의미를 가진 단어냐는 듯 불신가득한 눈으로 서도화를 쳐다보았다.
말하기 전부터 딱히 기대를 받지 못하는 사사오입 부장의 심정이 이런 걸까?
서도화는 그 민망함과 머쓱함을 새삼 느끼며 말했다.
“고요하다할 때의 고요예요. 아시다시피 저희 어메스는 전체적으로 시끄럽고 사고뭉치라는 이미지가 강하잖아요. 멤버들도 그렇고 그룹 이미지나 이름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저는 약간 저희 그룹이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이미지같기도 하거든요.”
고요.
폭풍의 한 가운데, 폭풍의 눈에서 느낄 수 있다는 고요함. 거기서 착안해낸 이름이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어메스 멤버들의 가운데서 고요히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어때요?”
참고로 서도화가 이걸 어떻게 생각했냐면 ‘고요 속의 노래’란 음유시인의 스킬 중 하나를 떠올리고 말한 것이었다.
고요 속의 노래란 20초간 전쟁통 속에서도 서도화의 주변만은 고요해서 서도화도 노래에 집중하고 주변에서도 노랫소리가 잘 들리도록 하는 짧은 시간 내에 최고의 효율을 내야할 상황에 적절한 스킬이다.
“……좋은데?”
뜻까지 들은 김유진이 모처럼 눈을 빛내며 화색이 되었다.
“고요. 발음하기도 귀엽고 괜찮은 거 같네.”
김유진은 화이트 보드에 적힌 팬명 후보 명단의 가장 아래에 ‘5. 고요’와 그 뜻을 적곤 말했다.
“직원들 싹 다 불러와요. 우리끼리 한번 투표해보자고.”
***
그로부터 며칠 후.
[띠링! 왔어요~어메스가 왔어요~서프라이즈~!]
어메스 멤버들은 팬들에게 어느 예고 없이 갑작스레 온앱 라이브 방송을 켰다.
-헐?
-뭐야 갑자기?
-?
-보고싶었어ㅠㅠㅠ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데뷔 후 활동하느라 한참 정신없을 시기. 케이와 서도화의 온앱 이후 정말 오랜만의 라이브 방송에 팬들이 빠르게 모여들어 감격의 채팅을 올리기 시작했다.
-단체 라이브냐고ㅠㅠㅠㅠㅠ
-와 오늘 학원 안가길 잘했다
-알람보고 놀라서 달려왔다...
-우리 어메스 밥은 먹어썽??
“안녕하세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우 그러게요. 저희가 너무 갑작스레.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왔죠?”
어메스 멤버들은 기뻐하는 팬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데뷔하고 나서 정신도 없고 시간도 없던 터라 하고싶어도 못했던 상황.
첫 1위를 한 이후엔 언제 시간내서 꼭 하겠다고 벼루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
“여러분 저희 1위 했는데 이제서야 라이브를 켰어요. 죄송해요.”
한야가 말하자 주상현이 맞장구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맞아요! 그때 바로 왔어야 했는데! 아 너무 아쉬워~”
“그러니까요. 하하, 일단 인사 한번 드리고 시작할까요? 둘, 셋.”
“어메스로 놀아보자~ 안녕하세요. 어메스입니다!”
멤버들은 팬들과 소통하며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아덴 셰퍼드짤? 그게 뭐야?”
채팅을 보던 한야가 묻자 주상현이 곧바로 대답해왔다.
“아아! 그거 그거잖아. 그 도화 형이랑 나랑 1위하고 울었을 때 아덴 형이 어쩔 줄 몰라하면서 그랬던 거.”
“아아, 나도 그거 봤어.”
서도화가 말했다. 아덴 셰퍼드짤. 어메스가 첫 1위를 했을 당시 오열하듯 울던 주상현과 서도화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다 고개를 들이밀어보거나 툭툭 치는 아덴을 보곤 팬들이 주인이 울자 당황하는 셰퍼드 같다고 해서 만들어진 짤이다.
최근 들어 엄청나게 돌아다니는 터라 SNS를 별로 안하는 서도화도 이것만은 알고 있었다.
아덴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 얘네 울어가지고! 저는 우는 사람 달랠 줄 모른단 말이에요. 우는 거 달래는 건 도화가 잘해요.”
간단히 요즘 팬들 사이에 유행하는 어메스 짤, 일화 등을 언급하며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가 한층 편안하고 화기애애해졌을 때.
“사실은 저희가 여러분들께 말씀드릴게 있어서 이렇게 온앱을 켰어요.”
한야가 자연스레 오늘 라이브 방송의 목적을 언급했다.
“오늘 저희가 라이브로 찾아온 이유는, 뭐죠? 도화 씨?”
한야가 갑작스레 도화에게 바톤을 넘겼고 도화는 잠시 당황하다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드디어 저희 팬분들의 이름이 생겨서 공지에 올라가기 전에 직접 말씀드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